【기획】 동학농민혁명 126년, 국가기념일 제정 2주년
사람답게 사는 세상, 일제 침략에 맞서 국권수호를 외친 동학정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1855~95)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압송사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1855~95)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압송사진

위기때마나 나보다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는 민족정신은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일까? 역사적으로 민중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개혁 정신의 뿌리를 찾다보면 역사 발전의 주체로 민중이 최초로 등장하는 동학 정신과 만나게 된다. 안으로는 낡은 봉건제도를 개혁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밖으로는 일제 침략에 맞서 국권 수호를 외친 동학 정신이야말로 애국 애족정신의 표상이고 근대 민주주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3.1 독립운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동학 정신에 뿌리를 두고 계승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동학란’, ‘동학농민운동’, ‘갑오농민혁명’ 등으로 불리며 축소·왜곡되어왔던 역사는 2004년 3월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정명을 찾았다. 지난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2년째다. 국가기념일 제정 2주년을 맞아 우리 충남 서산·태안지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의의를 찾고자 한다. - 편집부


내포지역 동학군, 서산시 운산면 원벌에서 최초 봉기

1894년 4월 운산 이 진사 응징, 10월 서산관아 점령

 

충청도 서산·태안 등 서부지역에 동학이 처음 들어 온 시기는 1880년경이라고 여겨진다. 원래 내포지역에는 동학세력이 적었으나 1892년 말부터 급격히 늘어났다. 이 해 10월 하순에 공주에서 일어난 교조신원운동 다음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 교조신원운동은 신사의 명에 따라 10월 20일부터 천여 명 도인들이 공주의송소에 모여 21일에 단행되었다. 이 날 동학도들은 행렬을 갖추고 서인주와 서병학의 지휘에 따라 당당하게 공주 관아로 들어가 대신사의 신원을 소청했던 것이다.

동학도 천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자 깜짝 놀란 관원들은 어쩔 줄 몰랐으나 뜻밖에도 의관을 잦추고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자 비로소 안심하였다. 예를 갖추고 격식에 맞게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억울한 사연들을 기록한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올리니 시비를 논할 여지가 없었다. 의송단자를 받아 본 충청감사 조병식은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이틀 뒤인 22일에 제음(題音)을 보내왔다. 그리고 24일에는 각읍 수령들에게 감결(甘結)을 시달하였다. 청원요지는 다음과 같다.

『무고한 백성들을 엄동설한에 내몰아 사경에 헤매게 하고 남편을 징역 보내어 어버이를 이별하고 길가에서 울부짖게 하니 무슨 죄가 있기에 이렇게 하는가. … 외읍에 수감되어 있는 여러 동학도 들을 모두 석방하여 달라. … 한편 임금에게 계달하여 스승님의 신원을 씻도록 해 달라.』

충청감사는 다만 나라에서 정한 동학금단조치는 자신의 권한 밖이라 하여 제외하고 여타 사항들은 동학도의 요구대로 감결하여 하달했던 것이다. 당시 1천여 명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감사로부터 다짐까지 받아내자 민중들은 동학을 주목하게 되었고 동학으로 몰려들었다. 내포 일대에도 소식이 전해지자 엄청난 인원이 동학에 몰려들었다. 대교김씨가갑오피란록(大橋金氏家甲午避亂錄)에 의하면 "소위 동학은 보은 도회 이후에 그 치열한 모습은 달이 다르고 때가 다르게 마을마다 접이 만들어져 사람마다 주문 읽는 기세가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고 물결치는 조수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은 덕포의 박도일(朴道一, 寅浩·龍浩)과 예포의 박희인(朴熙寅, 德七), 목포(木包)의 이창구(李昌九), 아산포(牙山包)의 안교선(安敎善), 산천포(山川包)의 이동구(李東求) 대접주 또는 수접주 등이 이끌었다. 서산 사람 홍종식(洪鍾植)의 증언에도 "하층계급에서 불평으로 지내던 가난뱅이, 상놈, 백정, 종놈 등 온갖 하층계급들이 물 밀 듯이 다 들어와 버렸다"고 하였다. 1894년 5월경에는 내포 일대가 동학세력으로 뒤덮히다싶이 엄청나게 퍼졌다.

동학농민이 내포에서 대규모의 동학혁명운동 깃발을 처음 올린 곳은 운산면(雲山面) 원벌(元坪)이었다.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혁명의 깃발이 올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내포 지역 동학도들은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龍賢里) 보현동(普賢洞)에 있는 이 진사(李進士)를 응징하기 위해 통문을 돌려 약 3백 명이 원벌에 모였다. 이 진사는 평소 동학도를 탄압했으며 소작관계로 마찰을 일으켜 민심을 잃었던 것 같다.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4월 9일에 동학군 1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개심사(開心寺)로 넘어 가는 것을 보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포지역 동학군이 최초 봉기한 서산시 운산면 원벌. 원래 원평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되고 서산시 원평 학생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안내문이나 표지석이 없다.
내포지역 동학군이 최초 봉기한 서산시 운산면 원벌. 원래 원평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교되고 서산시 원평 학생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안내문이나 표지석이 없다.

『어제 동학도 백여 명이 원평 마을에 와서 자고 오늘 개심사로 향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개심사로 가는 동학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보현동 이 진사가 평소 동학을 심하게 배척하여 동학도 들이 원한을 품고 개심사에 모여 회의한 후 그 집을 부수리라 한다. 예전 내포에는 동학도가 매우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으니 이 역시 시운이라 매우 통탄스럽다.』

그 때 몸소 참여했던 서산 홍종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일차로 통문을 돌려 가지고 홍주 원벌(元坪)에 대회를 열게 되었다. 구름 모이듯 잘도 모여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 만 명 모였으며 이 소문은 이 진사에게 갔다. 우리는 개심사란 절로 이진을 하였다가 가니 이 진사는 전과를 사죄하고 죽기를 청하였다. 항자불사(降者不死)라고 우리는 그를 효유하여 놓아 보냈다"고 하였다.

35년이 지난 1929년의 증언이므로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김윤식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인원수는 과장되었으나 사실은 믿을 만 하다. 이 사건이 터진 다음 민중들은 더욱 동학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4월 초순에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동학의 기세는 더욱 강성해졌다.


동학군, 10월 1일 서산관아 점령

 

전라도에서 5월 초에 동학군이 관군과 화약하고 각지로 흩어지면서 6월 중순부터 군현에 동학 집강소를 설치됐다. 그런데 1894년 6월 21일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는 불집을 터뜨렸다. 그들은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김홍집 내각을 세워 이 나라를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동학군들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격분하기 시작하였다. 7월 하순에는 여러 포(包)에서 일본군을 응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내포 일대의 동학군들도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항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였다.

예포 대접주 박희인은 예산군 삽교 북쪽 목시(木枾)에 도소를 세우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덕산 대접주 박인호(朴寅浩)도 덕산에 도소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동학군을 효유하기 위해 9월 초에 대원군 명의로 효유문(曉諭文)을 시달하였다. 그리고 김홍집 내각은 일본군에게 동학군 토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일본군으로부터 승낙을 받은 김홍집 내각은 9월 22일(양 10월 20일)에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임명하고 순무영(巡撫營)을 창설하고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하여 동학군 토벌에 돌입하였다. 한편 각 고을에는 민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초멸하도록 부추기었다.

내포 일대의 군현 수령들과 유생들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고무되어 동학군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서산군수 박정기(朴錠基)와 태안군수 신백희(申伯禧), 그리고 태안 방어사 김경제(金景濟)는 동학군들을 강제로 귀화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동학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고자 지도급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여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서산과 태안, 해미지역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접주와 간부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에 서산관아에서 모두 처형하기로 하였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예포와 덕포 관내 동학지도자들은 비상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덕포와 예포 대접주는 9월 15일경에 보은 대도소로 달려가 하루 빨리 기포하여 이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동학군이 기포하여 악질 관헌을 처단하지 않으면 동학도들은 모두 죽게되었다고 아뢴 것이다. 조석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본 군수는 신백희(申伯禧, 百熙)요, 태안 방어사는 김경제(金景濟, 慶濟)라 위명(爲名)인인데 본시 태안인으로 부(付) 정부하여 태안 방어사를 자원 하라하여 9월 0일에 태안 군수 신백희 등으로 일심 합력하고 해·서·태(海 瑞 泰) 동학교도를 일체로 귀화할 적정(的定)이러라. 약 불연인즉 두목을 다수 참살하면 어찌 진압하지 못하랴 주의(主意)하고 병정과 관군을 처처로 분분이 발송하여 기 중의 대두목으로 만 30여 인을 차 등지 괴수라고 착래(捉來), 엄형 옥수(獄囚)하니라. 기 시에 유독 해서태(海·瑞·泰) 포중이 여시 흉흉 망조하므로 교도 6∼7인이 주야로 역주 예산군 본포에 내도하여 3읍 관내에 전후 사실이며 접중 위난이 만만 시급이라고 일일 고달하니라. 기 시에 차(且) 홍주군수 이승우(李勝宇)도 방금 토포사(討捕使)로 (부임하여) 유회를 만방으로 모집하며 병정과 관군을 다수 합세가 되어 오교를 금명간 공격지책으로 일심 단결을 하와 적세가 거대 여운이라.』

당시 충청도 동학지도자들은 똑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동학지도부는 승패를 떠나 항일전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때 전라도에서는 동학군의 병력을 보강하고 군량미를 모아 북상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9월 18일(양 10월 16일) 신사는 드디어 왜놈을 물리치기 위해 기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황해도 해주 접주들과 같이 보은에 왔던 팔봉접주 백범(白凡 金九)은 "호랑이가 물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워야지" 하며 신사가 결연한 자세로 기포령을 내렸다고 증언 하였다. 덕산 대접주와 예산 대접주도 관내로 돌아와 접주들을 불러 모아 여러 가지 조치를 지시하였다. 즉 법소에서 정식 통문이 당도할 것이니 접으로 돌아가 기다렸다가 철성(징)을 울리면 즉시 응성(應聲)하고 도인들은 각 포에 모이도록 하여 체수(體囚)되어 있는 접주들을 구출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하였다.

드디어 9월 28일 늦게 법소(法所)로부터 훈시문이 당도하였다. "팔로의 우리 도인들은 죄가 없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일이 잘못되면 모두 살해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글이 당도하면 재빨리 기포하여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예포와 덕포는 29일에 철성(鐵聲)을 울리게 되었고 각 접에서는 일변 응성하고 일변 기포하여 서산관아를 향해 모여들었다.

서산관아 공격사건은 1894년 10월 1일 벌어진 동학교도들이 충청남도 서산관아를 습격한 사건으로, 농민군이 군수와 아전을 직접 살해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19세기 민란과는 그 성격이 구분된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살해된 박정기 서산군수의 비.
서산관아 공격사건은 1894년 10월 1일 벌어진 동학교도들이 충청남도 서산관아를 습격한 사건으로, 농민군이 군수와 아전을 직접 살해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19세기 민란과는 그 성격이 구분된다. 사진은 당시 서산군수의 비.

10월 1일 아침 동이 틀 무렵, 서산관아를 에워싼 수천 동학군들은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관아로 쳐들어갔다. 우선 수감된 접주들을 전원 구출하고 군수들을 잡아 결박하고 타살하는 한편 악질 관리들을 색출하여 엄히 다스렸다.

홍종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히 서산읍으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모이되 농기와 농악을 가지고, 총이 있으면 총을 가지고, 칼 있으면 칼을 가지고, 총칼이 없으면 죽창이라도 깎아들고, 바랑에는 사흘 먹을 음식을 해 지고 의복은 튼튼히 입고 오라 하였습니다. … 군수는 목을 베어 쑥국대에 매어 달고 관아와 관속들의 집들은 불을 놓아 온 거리가 쓸쓸한 연기 속에 잠겼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서산관아를 점령 후 며칠 뒤에는 해미성(海美城)으로 달려가 무기를 빼앗았다. 이 때 다른 지역의 여러 군현에서도 동학군들이 기포하여 군현의 관아를 장악하고 무기를 손에 넣었다.

10월 25일자 김윤식이 일본공사에게 보낸 글에 보면 내포 일대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공격하여 달라고 하였다. 즉 "내포의 적 이창구(李昌九)는 많은 적도들을 옹호하고 숭학산(崇鶴山)의 민보를 탈취하였으므로 내포의 열읍들이 모두 그 해독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포로 말하면 곡물을 생산하는 곳이며 겨울과 봄 사이에 경성으로 식량을 공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적도들이 이 곳에 주재하자 조운(漕運)이 불통되고 있습니다. 숭학보(崇鶴堡)는 비록 수원에 속하지만 한 여울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므로 만일 경병으로 공격하면 단번에 섬멸되어 남은 사람들도 다 해산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학군 측에서도 내포를 장악하는 것은 곧 식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 일대를 장악하는 데 우선하였다. 사실상 동학군은 초장에 이 일대를 장악한 것이다. 10월 7∼8일 경에는 중요한 지점에 거의 동학도소를 설치하고 준행정권과 준사법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민중들은 앞다투어 동학에 몰려들었고 포의 조직은 점점 강화되었다.


승전곡서 일본군 격퇴

 

충청도 서부지역을 동학도에게 장악 당하자 정부와 일본군은 동학토벌작전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군대를 파견하여 10월 10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토벌에 들어갔다.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각 군 현의 병력을 집결시키는 한편 유회군을 조직케 하고 일본군을 출동시켰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예포의 거점인 목시에 있는 도소를 습격하였다. 목시는 예산 삽교읍에서 북쪽에 있는 들판 작은 마을이다.

일본군과 경군이 출동하여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덕포와 예포 및 아산의 안교선 대접주는 태안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게 되었다. 이 때에 전라도의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비롯하여 북접의 손의암 성사도 출동하여 공주와 청주성 공략에 나서기로 하고 북상하고 있었다. 충청 서부지역 동학군들도 이에 발맞추어 움직이기로 하고 일단 서산 운천면 여미벌(餘美坪)에 전 동학군을 집결시키기로 하였다. 신창 아산을 위시하여 내포 일대의 동학군은 이 곳으로 집결하였다.

10월 18일경부터 여미벌 일대에는 동학군의 대규모 초막이 세워졌고 태안과 서산 동학군들도 23일에 출동하여 24일에 여미 현지에 당도하였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23일에 해미군 귀밀리(貴密里)에서 유진 숙소한 후 익일 24일에 행군하여 대진이 하오 신시량(申時量)에 해미를 지나 여미벌에 당도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 모인 접주급 이상의 두목들은 다음과 같다.

△ 新昌: 金敬三 郭玩 丁泰榮 李信敎, △ 德山: 朴寅浩 李君子, △ 德山 東面: 金蓂培 李鍾皐 崔秉憲 崔東信 李鎭海 高雲鶴 高壽仁, △ 唐津: 朴瑢台 金顯玖, △ 瑞山: 張世憲 張世源 崔兢淳 張世華 崔東彬 安載衡 安載德 安載鳳 朴麟和 洪七鳳 崔英植 洪鍾植 金聖德 朴東鉉 張熙, △ 泰安: 金秉斗, △ 洪州: 金周烈 韓圭夏 韓圭復 黃雲瑞 金陽和 崔俊模, △ 禮山: 朴熙寅, △ 沔川: 李昌九 韓明淳, △ 安眠島: 朱炳道 金聖根 金相集 賈榮魯, △ 海美: 朴聖章 金義亨 李龍儀 李鍾甫, △ 朴允一 玉出崑 文學俊 李炳浩 金樂蓮 △ 沔川: 李化三, △ 洪城: 金永弼, △ 結城: 千大哲, △ 牙山: 安敎善,

동학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10월 23일(양 11월 20일)에 "여미의 부근 고지와 해미성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사력을 다해 방어 중이라"는 관군의 연락을 받고 아까마쯔(赤松國封) 소위 휘하 1개 소대와 1개 분대를 출동시켰다.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학군은 만전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지형이 유리한 승전곡(勝戰谷)으로 이동하였다.

승전곡은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 동쪽과 면천면 사기소리(沙器所里) 서쪽에 걸쳐 약 3km 정도의 좁은 계곡을 이룬 곳이다.

24일 면천읍에서 아침에 출발한 일본군은 오전 10시경에 나무고개를 넘어 사기소로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곳을 지키던 동학군 일부는 일본군이 사격하자 후퇴하여 낮은 능선에 배치된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일본군은 계곡에 당도하자 1개 분대를 이 능선으로 올라가게 하고 주력부대는 계속 골짜기를 따라 전진해 왔다.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쪽으로 오다보면 왼편에 길고 낮은 능선이 가로 놓여 있다. 여기에 동학군 일부가 배치되어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발포하였다. 일본군은 이 곳을 접령하면 길이 열릴 것으로 보고 공격하여 왔다. 동학군과 일본군은 이 곳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얼마 후 동학군은 후퇴하여 좌측에 있는 웅산으로 올라가 다른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일본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산상에서 수천 명 적군이 사격하는 동시에 서풍을 이용하여 산에 불을 지르니 그 연기와 불길로 퇴각했다. 오후 4시 전군을 후퇴시키자 적의 반격은 맹렬했다. 본대는 오른쪽 시내를 따라 후퇴하며 승전곡의 좁은 곳을 일퇴일지(一退一止) 하며 빠져 나와 면천까지 퇴각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퇴각을 속행하여 오후 10시 덕산으로 들어왔다. 22일에는 홍주로 퇴각했다. 퇴각할 때 유실한 물품은 78명분의 배랑, 상하 겨울 내의, 밥통, 구두, 그리고 쌀자루와 휴대식량 312식 분이었다. 적도 전사자 3명, 부상자 미상이며 소비탄약은 612발이었다.』

일본군의 전투상황 보고에서 보듯이 이 전투는 동학군이 지략에 의해 내포에서 일본군을 처음 제압했던 전투였다. 일본군은 집중 공격을 받고 개인 장비를 버린채 면천읍으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이 맹렬하게 추격하자 다시 합덕으로 갔다가 26일(양 22일)에 홍주성으로 후퇴하였다.

동학군은 25일에 기세 당당하게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구만리(九萬里, 구만포)까지 진출하였다. 이 날 저녁에는 신례원(新禮院)으로 진출하여 뒤에 있는 들판에 포진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볏짚으로 초막을 만들어 잠자리로 삼았는데 약 5리에 걸쳐 동학군 초막이 세워졌었다. 11월 5일 이 곳을 지나던 이두황(李斗璜)은 "수리에 걸쳐 볏짚이 깔려 있고 곳곳에 불탄 자국이 널려 있어 행적이 낭자했다. 토민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 달 26일에 비류 수만 명이 이 곳에 와 주둔했다"고 하였다.

천도교회사 초고에 의하면 신례원에 모인 동학군은 약 5만명이라 했으나 3만 명은 되었다고 본다.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각지 동학군들은 앞다투어 신례원으로 달려와 이렇게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26일 아침이 되자 홍주목사 이승우는 홍주의 민병을 주축으로 하여 3천여 명을 출동시켜 동학군을 선제 공격하게 하였다. 동학군이 신례원에 진출하자 예산·대흥·홍주 세 고을 의려(義旅)들과 토병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동학군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여 도주하고 말았다.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동학군은 예산으로 진입,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삽다리)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하였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27일 오후에 발진하여 동군(德山) 역촌 뒷들에서 유숙하고 익일은 즉 28일 대신사주 탄신기도일이라 역촌 후현에서 기도하고 즉발 홍주군"이라 하였다. 연전연승한 동학군은 27일 저녁에 덕산에 진출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홍주성 공격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동학군측에서 홍주성 공격을 서두르는 것은 첫째로 연전연승으로 동학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있고, 3만에 이르는 대군을 갖추었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홍주성만 점령하면 충청서부지역에 대한 준행정권과 준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기와 식량 조달이 쉬워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홍주성을 점령하면 동학혁명운동의 대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보면 만일 홍주성을 동학군에게 빼앗기면 공주와 청주를 공격하는 동학군에게 사기를 진작시킴은 물론,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해야 하는 한편 그만큼 동학군의 전투력을 길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일본군과 관군도 이런 점을 생각하여 홍주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28일 즉 이 날은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의 탄신 70주년 기념일이라 탄신기도식을 마친 후 점심을 먹고 서서히 홍주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삽교에서 홍주성까지는 10km 정도로 오후 1시에 출발한 동학군은 오후 4시경에 성 외각에 당도하였다. 포위전에 돌입하여 산과 들을 메우고 대공세를 준비하였다.

밀려오는 동학군을 지켜보던 일본군과 관군은 서문 밖에 포진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엄청난 기세에 눌려 몇 차례 교전해 보다가 모두 성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주력하였다. 동학군은 저녁 때가 되자 성 밖에 짚단을 쌓아 기어오르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양문 밖에는 대포를 설치하고 공격준비를 마쳤다.

홍주성의 공방전은 일차로 성 밖에서 시작하였다. 동학군은 먼저 홍주성 서쪽에 있는 빙고 능선에 배치되어 있는 일본군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몇 명이 쓰러졌으나 계속 공격하자 일본군은 이곳을 내주고 성안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홍주성 북쪽 일대의 능선도 동학군이 공격하여 완전히 장악하였다. 초전에 일본군을 압박하는 데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고 있는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하기 위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학군은 향교 유생 7명을 처단하고 여기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성을 공격할 대책을 협의하였다. 동학군의 화력은 유효 거리가 30m 정도였으므로 포위작전으로 적을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희생자가 나더라도 공격전을 펴는 길밖에 없었다. 창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북문 밖 향교촌 후현(後峴) 등지에 유진하고 욕파(欲罷) 홍주성문하고 요지 처에다 대포 수천 개수와 단총 수만 개를 일시로 발격 공지하되 요지부동이라"고 하였다. 대포가 수천 수라 했으나 과장이고 2∼3십 문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 대포로 맹렬히 공격해 보았으나 성문을 부수지는 못하였다.

차상찬(車相瓚)은 잡지 개벽에 "부득이 수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박덕칠은 동문을 파하기로 하고, 일반 결사대는 인가에서 누만속(累萬束)의 고초를 가져다 성외에 적치하고 성을 월하여 격(擊)하려고 결의했다"하였다. 결사대는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동문을 공격하고, 한 부대는 성을 넘기로 하였다. 저녁 7시경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일제히 성을 향해 돌진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성 밑에 쌓아올린 볏짚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기어오르던 동학군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불빛이 환해져 조준하기가 쉬워지자 일본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많은 동학군이 쓰러졌다.

조양문을 공격해 들어가던 결사대도 40m 지점까지 접근하여 대포로 공격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성문이 견고하여 포탄을 맞았으나 까딱없었다. 얼마 후 일본군은 민가에 불을 질러 대낮 같이 밝히고 노출된 동학군 수 백 명을 쓰러뜨렸다. 제아무리 용감한 동학군이라도 수 백 명이 전사하자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10월 28일(양 11월 25일)의 홍주성 공격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군의 희생자는 결사대에 참가했던 주동 인물들이었다. 일본기록에는 "여기서 적을 격퇴, 적 수천 명을 살상하고 그 거괴 이창구(서산 사람), 이군자(李君子, 예산 면천의 거괴) 2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창구가 전사 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쟁쟁한 접주들과 젊고 날랜 동학군들이 수백 명 몰살당했으니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29일(양 11월 26일)에는 날씨마저 흐렸으며 동학군은 사정거리를 벗어나 원거리에서 포위하고 대포만 쏘아 댔다. 일본군과 관군은 유인작전인 줄 알고 성문을 한발도 나서지 않은 채 동학군의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이 때 동학군 쪽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잠자리가 없어 추위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얇은 의복으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수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이 확보되지 않았으며 식사공급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굶는 인원이 많았다. 한편 많은 사상자를 처리할 대책도 없었다.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으며 공격할 의욕마저 상실한 형편이었다. 결국 동학군은 스스로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홍종식은 "실상은 홍주서 관군과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닙니다. 관군들은 홍주성을 튼튼히 닫고 지구전을 하기로 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래 대항하기가 어려워 자퇴하야써 헤어진 것입니다" 고 하였다. 29일 오후부터 일부 동학군은 소리 없이 흩어지기 시작하다가 오후에는 모두 떠나버렸다.

흩어진 동학군은 해미성 쪽과 면천 쪽으로 나뉘어 갔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관망하던 보수세력들은 앞다투어 일어나 유회소를 만들고 동학군 소탕에 나섰다. 예산 대접주 박희인도 많은 동학군과 같이 덕산 쪽으로 가다가 유회소에서 방포하자 모두 흩어져 산길에 접어들어 2일간이나 숨었다가 11월 2일에야 덕산 막동(幕洞) 김원형(金元亨)의 집에 당도하였다. 철수한 동학군 중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천명 정도였으며 귀밀성(貴密城)과 도루성(猪樓城)에 집결한 인원은 약 4백 명 정도였다.


관군의 해미성과 서산 기습

 

동학군들이 해미성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두황은 병력을 서쪽으로 돌려 지금의 덕산면 옥계리(玉溪里)와 상가리(上加里) 일대인 가야동(伽倻洞)에 들어가 유진하였다.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은 일락산(日落山)을 넘어 7일 새벽에 해미성을 기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밤중에 영관과 병졸 60명을 인솔하고 일락산 정상인 석문봉(石門峰, 600m)으로 올라가 4km 떨어져 있는 해미성의 지형을 살피었다. 삼경이 되자 전군을 깨워 산정으로 끌고 올라와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11월 7일 먼동이 트이기 시작하자 전군에 명령하기를  "해미성으로 달려가 성의 북쪽 능선 향교부근에 집합하라"고 하였다. 이 때 동학군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식사하기를 기다리던 이두황은 이윽고 동학군들이 아침을 들기 시작하자 전군에 공격령을 내렸다. 북쪽 성채를 넘어 벌떼처럼 처들어가니 밥을 먹다 기습을 받은 동학군은 좌왕우왕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대오를 정돈하고 대항하려 했으나 이미 관군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2시간 남짓 동학군과 관군은 혈투를 벌였다. 훈련받지 못한 농촌 출신인 동학군은 40여 명이 전사하고 백여 명이 부상하고 말았다. 나머지는 서산·당진·면천 쪽으로 후퇴하였고 일부는 인근에 있는 귀밀성과 도루성에 합류하였다. 오후에 이르러 관군 1개 소대는 귀밀성을, 2개 소대는 도루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도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동학군이 패하고 말았다. 해미성 전투에서 동학군은 대패하였고 불랑기(佛郞器) 11좌, 대포 4좌. 자포총 22자루, 천포총 10자루, 조총 43자루, 창 85자루, 환도 9자루, 대정 3좌, 포환 130발, 연환 6궤, 염초화약 500근 등을 관군에 빠앗겼다.

동학군 일부는 서산읍 매현에 집결하게 되니 천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무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으며 규율도 있었다. 이튿날인 8일에 이두황은 서산의 동학군을 추격하라고 1개 중대(참령관 元世祿)를 파견하였다.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튿날 ... 참령관 원세록이 ... 1개 중대 병력을 인솔하고 서산지방을 순초하려 나갔다가 적의 큰 소굴을 발견했다. 즉 서산 매현이란 곳인데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다. 원조경으로 살펴보니 주변에는 깃발을 꽂고 적들은 가운데 모여 밥을 짓고 있었다. 황혼 때에 몰래 서산읍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겨우 황혼이 지자 적들은 밥을 먹으라 부르고 있었다. 눈치챌까 염려되어 밥 먹기를 기다렸다가 불의에 나타나 함성을 지르며 포를 사격했다. 적도 저항하니 총알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대포도 연발했다. 잠간 쉬다가 또 공격하기를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어찌된 일인지 적이 갖고 있던 화약에 불이 붙어 굉음이 하늘을 뒤집고 땅을 꺼지는 것 같았다. 적의 무리 수천이 일시에 쏟아져 내리면서 산산이 흩어져 달아났다. 우리 병사들도 잠시 놀랐다가 정신을 차려 수백이 날쌔게 달려들어 물리쳤다. 흩어진 무기를 거두어 읍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매현에 주둔했던 동학군은 황혼 때 저녁을 먹다 기습을 받았다. 관군에 비해 월등한 병력을 가진 동학군은 재빨리 대오를 정돈하고 응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약더미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군진이 흩어져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아마도 관군이 포격으로 화약더미가 폭발한 줄 알고 당황했던 것이다. 관군도 놀라 일시 후퇴하였다가 동학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다시 공격하였다.

여기서 서산 매현은 부춘산 마사라는 설과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북편이라는 설, 채길순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인지면 화수리 매봉재라는 설이 있다. 채 교수는 매봉재 전투에 대한 관한 기록(해미에서 패한 동학군 수 백 명이 노지면 수현리에 집결했으나 패했다. 저녁 먹을 때 쯤 싸움이 시작되어 초저녁에 동학군이 완전 패했다)을 근거로 인지면 화수리 매봉재라는 주장을, 이영하 향토사학자는 옛지명에 따라 매현의 능선 서쪽은 서산시 수석동 산93-3번지, 능선 동쪽은 음암면 신장리 산 68번지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서산에서 후퇴한 동학군은 태안 백화산으로 퇴각했다.


태안 토성산성에서 최종의 참극(慘劇)

태안에 모인 동학군은 태안읍 북쪽에 있는 백화산(白華山, 284m)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은 "도주와 잠복에 능한 동학도라도 지금 추위가 혹심한 때에 산중에는 잠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기회를 맞아 각 병참지 수비병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두 토벌에 종사하고 토벌대와 잘 협력해서 여러 갈래로 진압하여 그들을 습격하면 일거에 초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11월 14일(양 12월 10일)에 일본군 산촌(山村) 대위는 동학군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현장에서 타살해 버리는 잔악한 토벌작전을 펼치기 위해 해미를 거쳐 바로 태안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서산으로 들렸다 가면 태안 동학군들이 기미를 차리고 도주할 염려가 있다하여 별도로 소탕조를 만들어 서산에 파견하였다.

태안으로 직행한 일본군은 5명 내지 10명씩 여러 조를 짜서 마을 마다 출동시켜 민병을 앞잡이로 하여 수색하게 하였다. 100여 명의 동학군을 체포하였는데 이 중에는 접주 및 지도자가 30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그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튿날 태안에 군중을 불러 모아 공개적으로 동학군을 총개머리로 잔인하게 때려죽이는 야만적인 처형을 집행하였다.

할 수 없이 동학농민군들은 태안 백화산(白華山)에서 항전하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성(吐城山城)으로 숨어들었다.

이에 때를 놓칠세라 하고, 관군과 일본군들은 동학농민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자를 철저히 색출하는데 주력했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토성산성은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이 토성산성에서 유회군과 관군의 첩자가 된 자의 밀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들이 거의 체포되어 11월 16일 살을 에는 혹한 속에 화순리(和順里) 김철제․김환제를 비롯하여 김용근․김용정 형제와 마금동(磨金洞) 박성천․박성묵 형제 등이 토성산성의 형장으로 끌려가 작두(斫刀)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여섯 사람 모두가 ‘동짓달 보름날’에 제삿날이고, 김양권은 구사일생으로 가의도(賈誼島)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같은 날 아침에 일본군이 토성산성에서 근흥면 안기리(雲洞) 박봉래(朴奉來) 5형제를 함께 묶어 산채로 이엉으로 둘러 싸매고 불태워 화형(火刑)에 처하고 한구덩이에 매장했다. 오후에는 이곳에서 근흥면 안기리 김한길(金漢吉) 3형제를 한데 묵어 산채로 생매장했다.

토성산성에서 죽은 수많은 시체는 머리와 몸이 각각 분리되어 누구의 시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체가 썩어 악취가 나서 이 산 부근을 지나지 못했다 하며 해마다 봄이 되면 이 시체 덤이 사이에서 나오는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고 전한다. 토성산성은 태안군 근흥면 수룡리(和順)에 있고, 군사 요충지로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산성에서 신화 같은 전설을 지닌 비극적인 옛 이야기들이 지금도 구전되어 동네사람들이 실화처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태안 동학혁명군 추모탑
태안 동학혁명군 추모탑

글을 마치며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전쟁에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고루 참여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농민군의 중심 대오가 결성되고, 또한 그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은 해미와 서산이었다. 이는 내포 농민군의 주력이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패전 이후 농민 전쟁에 참여했던 서산 지역의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뱃길로 인천이나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고향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천도교도로서 동학 정신을 계승하고 지역 사회 운동의 발전에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농민군 후손들은 선조들의 의로운 투쟁을 선양하기 위하여 1964년 동학정신선양회를 조직하고, 1978년 10월 2일 백화산 산록에 추모탑을 건립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여왔다. 1998년 많은 유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결성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2003년 4월 국회에서 「동학 농민 혁명 참가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관련 기념사업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동학 농민 혁명 참가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하여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유족 등록 사업의 결과 서산 지역 64명, 태안 지역 133명이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참여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참여 사실이 인정된 건수는, 고부 봉기와 황토현 전투가 치러진 정읍 지역이 45명, 1차 농민 봉기 기포지인 고창 지역이 4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후에도 서산·태안 지역 유족들은 매년 위령제를 치름과 동시에 후손들의 회고들을 모아 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각종 선양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參考文獻

1. 서산태안문화유적(上) (충북대학교고고미술학과편집)

2. 曺錫憲歷史(曺錫憲.著)

3. 東學革命과泰安(朴春錫.編著)

4. 甲午東學革命殉道者名單(天道敎泰安敎區.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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