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은 선생과 부모가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소극적인 아이가 어느날 문득 당당하게 말을 붙여올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꿈꾸는 화가마을’ 원장 이은미 화백
‘꿈꾸는 화가마을’ 원장 이은미 화백

인터뷰를 시작하며

어느날 화촌전에서 만난 강현자 화백은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기 능청스런 뚱냥이는 이은미 원장님이 필 받아서 스케치도 없이 그냥 쓱쓱 잠시 그린 작품이에요. 삽화 같은 것을 하시면 아주 잘할 것 같아요.”라며 그녀의 그림 앞에 서서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벌써 20년째 초등학생 대상 미술만 가르치는데도 졸업을 하고 나간 중··대학생 심지어는 성인들도 찾아오고 그래요.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니까, 엄마나 애들도 느껴지는 거죠. 정말 멋진 분입니다. 마음이 이쁜 게 얼굴에 나타납니다.

특히 이은미 화백은 실제 생활에서 응용하여 아이들의 심리적 부분으로 접근하는 선생님, 아이들의 성격에 문제점이 보였을 때는 학부모와 상담을 하며 함께 고민하고 챙겨나가는 미술심리상담 등 복합적인 미술을 이끄는 전문가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너무 많아 예약이 밀려있을 정도로 아이와 학부모들에게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곳.

서산시대는 소문으로만 듣던 꿈꾸는 화가마을원장 이은미 화백을 만나 그녀의 교육관과 끊임없는 배움 속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술과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인터뷰에 담았다.

이은미 화백의 작품 '능청맞은 뚱냥이'
이은미 화백의 작품 '능청맞은 뚱냥이'

41회 화촌전 출품작은 능청맞은 뚱냥이란 주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다. 먼저 축하드린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혹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굉장히 좋아한 걸 보면 약간은 타고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나의 재능을 보았는지 자주 대회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 사업 때문에 우리 가족은 자주 이사를 해야 했다. 어떤 곳은 1년 반 만에 옮기고 어떤 곳은 6개월 만에도 이사를 하고……. 그렇게 나는 서서히 선생님들로부터 잊혀 가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잊힌 그것은 선생님들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내 꿈을 잊어가고 있었다. 바쁜 부모님 때문에 우리 3남매는 할머니 댁에서 2년여를 살기도 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땅바닥이 캠퍼스가 되어 엄마 얼굴을 나무로 그리며 울기도 했다. 내가 그린 그림 위에는 늘 엄마도 울고 있었다.

그렇게 이별의 아픔은 내 그림 속 소재가 되어 그리움을 만들어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은미 화백
그림을 그릴때가 세상가장 행복한 이은미 화백

그림에 대한 꿈이 잊혀 갔다고 했는데 다시 꿈을 꾸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

언제부터라기보다 그냥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림은 이미 내게 호흡 같은 존재로 내 옆에 있었던 걸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여름방학 과제로 풍경수채화를 그려 제출했다. 시골 비닐하우스 주변에 여러 가지 채소넝쿨과 가지꽃이 피어있는 풍경인데 선생님은 내 작품을 보자마자 너 왜이렇게 잘 그렸냐!”며 칭찬했다.

이때부터 어렴풋이 미대로 진학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우리 집은 졸지에 경매로 넘어가야 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나는 감히 미대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절망도 사치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소녀 가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며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야 했고, 집도 구해줘야 했다. 슬픈 겨를도 없었다. 나를 대신하여 동생이 캠퍼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 다시 당시로 돌아가야 한대도 여전히 나는 같은 생각을 하며 또 그때처럼 그렇게 했을 것이다.

2019년 10월 서산 내포 아트패스티벌 전
2019년 10월 서산 내포 아트패스티벌 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길을 가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시켰을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화백님의 단련은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내 경우는 나를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좀 더 밝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다.

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나이치고 고생을 좀 많이 했다. 힘들거나 아플 때 그림을 그리면 내 속의 번뇌가 눈 녹듯이 모두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러다 보니 그냥 습관처럼 그림을 그렸다.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림은 나의 반쪽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뜻밖에도 학원에서 내게 강사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것이 물꼬가 되어 여기저기서 내 이름을 불러주고.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다른 집 아이들을 돌봐주는 시간에 한창 클 나이의 내 아이들이 어릴 적 내가 엄마를 그리워하던 것처럼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과감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엄마들 사이에 내 소식을 듣고 아이들 몇 명만이라도 가르쳐달라며 부탁을 해왔다. 나를 믿고 그러시는데 책임감이 들었다. 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미술치료를 공부하기 위해 한서대로 첫발을 내디뎠고, 그 후 부모와 아이들의 정서에 눈길을 돌리며 다시 아동미술학과로 들어가 나이 어린 학생들과 늦은 시간까지 연구와 연구를 거듭하며 작업에 매진했다.

내 세 번째 졸업은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였다. 공부를 하다 보니 자꾸 심리치료도 좋지만 내면을 잡아주는 미술을 같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래서 배움을 이어나갔다.

그사이에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 곁으로 가 미술학원도 개원한 나는 세상 제일 바쁜 엄마, 아내, 며느리, 학부모 그리고 선생이 되어있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정말 미술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나 필요한 친구들에게는 교사가 바로 전문가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미술계의 전문가로서 언제까지 현업에 종사할 생각인가?

평소에도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묻는 동료 작가들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60까지는 해야겠지요라고 아주 조금은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하곤 했다.

적어도 나는 정말 미술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나 필요한 친구들에게는 교사가 바로 전문가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 길게는 아닌 딱 그 나이까지만 아이들 곁에서 보듬고 치유해주고 싶다. 그때까지는 내 머리가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웃음).

마음의 건강이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기에 함부로 다뤄서도 안 된다. 100명 중의 90명이 치유받았더라도 나머지 10명의 아이들과 아직 그대로라면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꿈꾸는 화가마을미술학원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서와 마음을 읽게 된다. ‘아 이 아이는 지금 이런 상태구나!’ 처방하고, 치유를 해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어느 순간 변화되고 발전하고 밝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가장 보람 있을 때는 평소 말수가 적고 소극적인 아이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당당해질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말을 붙여오고 밝아진 경우를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일에 상당한 희열을 느낀다.

나는 천상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바보선생이다. 봐도 봐도 보고 싶은 선생 말이다.

아이들이 직접 만든 가면
아이들이 직접 만든 가면

지금은 교사로서가 아닌 화백으로서 묻고 싶다. 그림의 모티브가 된 것은 무엇인가?

나의 그림 원천과 모티브는 지금·여기·오늘의 일상에서 충전되는 행복이다.

지금에 집중하고 여기에 의미를 두어 오늘을 소중히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행복이 빚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순수한 동심과도 같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욕구에 바로 반응하며 계획하거나 계산하거나 기다려서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거침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마냥 행복해하고 만족해한다.

이것이 바로 어른들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한다. 심지어 부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어른들과는 다르게 아이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보다.

매번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느끼는 것은 천진함이다.

가끔 선생님들이 혼을 내도 뒤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선생님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사랑의 군것질을 선물하거나 선생님의 자화상을 더 이쁘게 업그레이드하여 그려, 작은 고사리손으로 부끄럽게 건네주곤 하는 모습.

이처럼 아이들의 순수와 동심은 지금·여기·오늘이고 힐링이며 행복이고 사랑이다. 결국, 이 의미들은 하나의 힘과 에너지로 형성되어 서로 포용되어지고 유연해지게 한다.

이렇듯 나의 그림 작업은 빡빡한 어른들의 현실 세계에서 무뎌지고 질겨지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로움, 어김없이 흐르는 시간과 세월 앞에서도 절대 변질하거나 잊고 싶지 않은 행복한 나만의 순수한 동심의 한 조각, 어른들을 위한 동화 뭐 이런 것들이다.

만약 내 작품을 보고 1%의 누군가가 미소지으며 행복을 느꼈다면, 나는 또 한 번의 행복을 선물 받은 것이다. 이것이 계속 보너스가 되어 지금·여기·오늘속에서 나의 행복을 이야기로 소꿉놀이하듯 계속 기쁘게 그려나갈 예정이다.

'꿈꾸는 화가마을' 전경
'꿈꾸는 화가마을' 전경

마지막으로 꿈이 있다면?

내년에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 나는 지금껏 길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하다 보니 그 길을 가게 되더라. 설계하고 계획하기보다 내 마음 가는 데로 하다 보면 그곳에는 물질적인 것 또한 따라오고 받쳐주더라.

나는 신앙인이다. 미술학원을 시작하면서 3가지를 약속했다. 첫째, 수입이 많아지면 버는 만큼 후원할 것과 둘째는 우리 아이들에게 계산적이지 않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까지나 초심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공백 기간을 좀 주셔서 나를 바로 세워달라고.

지금도 나는 순수한 동심, 정직, 진실한 마음 등 이런 것들이 왜곡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때론 나 또한 사람인지라 환경에 따라 달라지려고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는 그 싸움에서 내가 이긴다. 제발 이런 마음이 노년기가 되더라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다. 나 또한 앞으로도 힘이 닿는 한 아이들의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려고 한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은 선생과 부모가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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