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터가 있다는 것이 그나마도 다행!

구두를 고쳐온 구두수선집 사장 이선호(60) 씨.
구두를 고쳐온 구두수선집 사장 이선호(60) 씨.

인터뷰를 시작하며

서산시 읍내동 89번지, 2평 남짓 작은 공간에는 의족을 찬 채 오늘도 열심히 구두수선을 하고 있는 이선호 씨가 있다. 무뚝뚝한 얼굴로 슬리퍼를 슬쩍 내주며 구두를 받아드는 그의 모습은 1년 전의 밝은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코로나1970%가량 수입이 줄었다. 다들 똑같은 입장이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의족을 차고 여기 와서 앉아는 있지만, 종일 해봐야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는 말로 코로나의 지독한 여파를 알려줬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틈 사이 철로에 떨어졌다. 기차는 출발했고 나는 그만 다리를 잃었다

중학교에 막 입학하면서 기차로 통학을 했다. 어느 날 학교로 가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면서 몸집이 워낙 작아 그만 틈으로 철로에 떨어졌다. 기차는 출발했고 나는 그만 다리를 잃어야 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깨어나 보니 하얀 침대였고 부모님은 나를 내려다보며 꺼이꺼이 울음을 삼켰다. 나는 그렇게 6개월을 병실에서 지냈다. 더는 마음껏 달리지 못했고, 더는 행복하게 웃지 못했다.

엄마는 내 머리를 보며 날마다 호호입김을 불며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다

다시 중학교 1학년에 목발을 짚고 입학을 했다. 친구들이 찐따라고 놀아주지 않았다. 21녀 중 첫째라 나를 대변해줄 형도 누나도 내겐 없었다. 날마다 맞아서 퉁퉁 부은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왜 그렇게 돌멩이만 던지면 머리에 잘 맞던지……. 엄마는 장남의 상처 난 머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고, 날마다 호호입김을 불며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다. 그때 심정은 어땠을까. 나보다 더 아팠을 우리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너무 맞아서일까. 어느날 부터인가 내 손에도 돌이 들려져 있었다. 돌멩이를 들고 늘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을 향해 던졌다. 나는 목발 탓일까? 자꾸 남의 집 유리창을 깨뜨리곤 했다.

물론 나를 챙겨준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들보다도 훨씬 더 아팠던 탓일까 이런 기억만 자리 잡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 미싱 아래 쪼그려 앉아 밤새 쪽가위질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대신 봉제공장에서 미싱 아래 쪼그려 앉아 밤새 쪽가위질을 했다. 당시 월급 15만 원을 받아 집에 가져다주며 나는 세상 처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내가 생각한 것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구나!’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불행했던 학창시절의 고통은 없었다. 목발을 짚고 다녀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좋았고, 내가 목발을 짚어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봐주는 것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장애와 행복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착하게, 그리고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라

그리고 어느날 지인으로부터 평생의 직업인 구두수선을 배워라는 소리를 듣고 구두수선집에서 기술을 배웠다. 이후 2평 남짓한 땅에 구두수선집을 차려 자리를 잡아갈 무렵, 서산시 음암면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보살피기 위해 읍내동 농협 앞에서 구두수선집을 오픈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가만히 보면 지금까지 근근이 먹고는 사는 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내 이름 이선호덕분인 듯싶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착하게,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라라는 깊은 뜻의 내 이름 석 자.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이름처럼 그렇게 세상을 당당히 살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어린 시절 찐따라고 놀리며 돌을 던졌던 그때의 잔혹한 기억 때문에 신발 닦으라는 소리를 하지 못한다

나는 아직 덜 큰 게 분명하다. 당당한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가 신발 닦아라라는 소리를 예순이나 먹도록 하지 못한다. 대신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면 받고 와서 가져다주지만…….

어쩌면 이것은 어린 시절 나를 찐따라고 놀리며 돌을 던졌던 그때의 잔혹한 기억이 잠재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에 한 번 나가보기는 했었다. 가서 신발 닦으라고 겨우 말했는데 하나도 안 주더라. 그러면 다시는 가지질 않는다. 아직도 당시의 열등감이 남아있는 것 같아 스스로도 안타깝다.

사실 몇 번이나 죽으려고 시도도 했었다. 의족은 차야 하는데 찰 때마다 무르팍에 진물은 나오고...그러다보니 스타킹이 살에 붙는 일상이 반복되고.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앞으로도 내 작업장이 힘들고 지친 분들에게 잠시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의족 또한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남은 꿈이 있다면 80대 노모의 건강이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충격으로 어머니의 식사량이 자꾸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고, 고관절로 인해 겨우 50m도 걷지 못하는 현실도 걱정이다.

그나마도 마음 놓고 구두수선집을 운영하는 것은 집으로 찾아와 주시는 요양보호사님 덕분이다.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이 일을 계속하진 못했을 것이다.

계속하지 못한다면 아주 큰 손실이다. 바로 나를 찾는 서민고객들이 그만큼 쉴 자리를 잃게 되는 현상이니까(웃음). 하긴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아예 손님이 끊어졌다시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내 일터가 있고,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도 내 작업장이 힘들고 지친 분들에게 잠시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산시 동문동 89번지 ‘구두수선집’
서산시 읍내동 89번지 이선호 씨가 운영하는 ‘구두수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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