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24.16;00에   서산시대와 서산타임지에 올린 문철주 양열공 기념사업회 대표라는 사람의 글을 읽고 여러 가지 면에서 경악(驚愕)과 큰 충격을 받았다. 철두철미 나를 모욕하기 위하여 써진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문철주라는 사람은 서산의 역사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지방을 반역향(叛逆鄕)으로  창작(創作) 거비에 새겨 세우게 추진함으로써 17만 서산 시민에게 두고두고 남게 될 크나큰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장본인이 석고대죄(席藁待罪) 한다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일말(一抹)의 반성이나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나에 대한 모욕적 인신공격의 글을 내다니 참으로 기가 막혀 그의 후안무치(厚顔無恥)가 너무 도에 넘친다고 생각된다. 2015,8,3자에 ‘서산 시대’에 최영성교수가 발표한 나에 대한 14개항의 명예훼손적 막말 인신공격과 대동소이하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 글을 세 번 내는 과정에도  ‘문철주’라는 이름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았다. 내가 문철주에게 최영성교수를 한국에서 제일가는 역사학자라 소개 했다고 주장 하고 있는데 나는 이미 2015,8,17자 내 글에서 밝힌바 있지만 그 일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우리지방의 큰 명현(名賢)이며 양렬공정인경선생의 아버지인 원외랑 정신보선생이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전파한 상황을 바르게 알리게 하기위해 우리나라에서 유통사(儒通史)에 가장 밝다고 인정받고 있고 한문(漢文)에 지극히 능하며 정주학(程朱學)에 깊은 연구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철학(韓國哲學)을 전공한  학자 최영성성교수를 천거 하여 내가 이미 먼저 글에서 밝힌바 같이 최영성교수는 ‘서산에 기념비적’인 큰 업적을 남겼다고 밝힌바 있다.’ 그런데 내가 최영성교수를 최고의 역사학자라 소개 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유통사(儒通史)도 그 분야만의 역사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역사분야와는 다를뿐더러 역사도 고대사 다르고 신라사,고구려사,백제사,고려사,조선사로 구분 다를뿐더러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더 세분된 전공분야가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달기똥인지 무릇인지를 구분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듣기엔 문철주라는 사람은 어느 대학에 출강하는 교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일 있는데 이렇게 극히 상식적인 것에도 무식 할 수 있는가 ?.
  이미  세 번의 나간 내 글에서 밝혔지만 ‘반역(叛逆)이란 사전적 의미는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국가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 통치권을 탈취하려는 행위’라 정의하는 것인데 문철주라는 사람은 반역(叛逆)은 좋은 것이라고 이번 글에서 5,18민주화운동까지 예로 들면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나는 5,18민주화운동이 반역(叛逆)의 사전적 의미와 일치 하는 것인지 여부는 잘 알지 못한다.
  문철주라는 사람의 성향을 이번일로 곰곰히 생각해보면 배반(背反(叛))의 원형(原型)이랄까 아주 뛰어난 배반(背叛)의  모델임에 틀림없다. 나는 세 번의 글을 썼지만 내가 양렬공 기념사업회 고문이었다는 말을 한 적 없다. 문철주라는 사람이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하기 오래전부터  전임자들이 나를 양렬공정인경기념사업회 고문(顧問)이라는 이름을 올려 참석은 잘 안했지만 회의 때마다 문서로 통지도 해주고 더러 전화로 간단한 의논의 일도 있었다.
   문철주라는 사람이 대표자가 되어 있을 때 까지도 임원 명단위에는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내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문철주라는 사람이 아마 한 2년 전 부터 내 이름을 무단히 지워 버린 것 같다. 일언반구 말도 없이  그렇게 자기가 내 이름을 무단히 지워 버리고  2년여가 지났는데 왜 느닷없이 내가 현재도 고문인 것처럼 고문이라는 말을  이 글에 꺼냈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기념사업회 대표라는 자리가 있기까지 이권부서는 아니지만 문철주라는 사람이 이 기념사업회에 관계가 된 것은 나와 연비(聯臂)된 것인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지만 이는 전형적인 배반자(背反者)의 한 사례다.
  양렬공기념사업회의 존립목적은 양렬공의 업적을 선양하는 것으로  양렬공은 전국가적으로 보아도 고려조의대표적 인물로 추앙 받을 만큼의  역사적 공적이 너무 크고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된 내용의  공적을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조용히 그냥 선양하기만 하면 될 일을 무슨  서산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느니’ ‘교육적 멧세지를 후세에 전하는 상징물을 만든다느니’ 하면서 기념사업회가 마치서산시민의 모든 것을 대표 하는 양 지나친 행위를 하다 보니 이 어른의 위대한 명예를 크게 훼손 하는 결과를 초래  아닌 말로 기념사업회가 없는 것만도 못하게 되고 있다.
 이번 문철주 대표의  글 중에는 『‘1182년(명종12)년은 지금으로부터 833년 전의 일이니 누구도 그때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으므로 다만 축약된 사료로 유추해 볼뿐이다.’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도 웃기는 이야기다. 문철주라는 사람의 이 주장대로 한다면 우리나라 역사서는 모두 유추해 보는 대상물로 그 역사내용은 마음대로 창작해 보태거나 빼거나 해도 된단 말인가?
 문철주 대표라는 사람의 글 중에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 ‘최영성교수의 비문도 정통성 있는 학문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으로 믿고 있고 탄곡이은우선생의 지적도  향토사학자로서 좋은 의견을 내주신 것으로 믿는다.
 다만 어떤 작품이나 연구결과에 대하여 주변인의 주장과 논리가 주된 저작자의 학문의 경계를 추월 할 수 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비문내용 저작 당시 협의되었다는 내용은 또 다른 분쟁을 일으킬 것 같아 생략 하고자 한다.’』 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철주대표라는 사람이 나와 연령차이가 15년인데 요새는 관에서나 일반에서나 경노(敬老)가 아니라  경노(輕老)경향의  만연으로 늙은 사람들은 무조건 무시되는 때라지만 이럴 수 가 있는가?. 무례하기 짝이 없고 안하무인(眼下無人)적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말이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학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오래전에 퇴직했지만 지금도 국가에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모 노 교수님은 근30년 전 우리지방에 관련된 사항이지만 그 교수님 스스로 내 의견을 물어 아주 중요문장을 결정한일 있다. 또 국립대학교수로 어느 분야의 전국학회장까지 한분이다. 약 29년 전  국립대학교의 정교수로서  서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 내 의견을 많이 들었고 논문에 내 글을 1쪽 정도 인용 한바 있다. 물론 모두 우리지방과 관련된 내용이다. 문철주라는 사람이  뭔데 사람을 이렇게 얕보고 이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최영성교수가 비 문안을 이메일로 내게 보내어 협의를 거쳤다는 이야기를 문철주라는 대표자가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내 명예를 크게 훼손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 이메일로 협의 했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명예훼손 한  법적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 대학교수가 쓴 글은 틀린 것이 있어도 말해서는 안 된단 말이냐? 예를 들면 비문 내용 중 서산을 독립(independence)시켰다는 것은 하나의 국가(a country)가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고  입비취지문을 보면 부곡(部曲)과 속현(屬縣)도 구분 못하는 글로서 엉망진창으로 써진 비문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말해서는 안 되는가? 말이다. 이 비문을 짓고 서산향토사학자와  충남역사문화원에 자문을 구했다 하는데 서산시로 부터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은 이야기다. 서산향토사학자라면 이영하향토연구회장과 먼저 상의가 있었어야 했을 텐데 향토연구회장도 그런 일 없다 하는데 어떤 향토사학자의 자문을 받았는지 밝혀라. 그리고 이런 엉터리 비문이 옳다 자문해준 그 엉터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 누구였는지도 꼭 밝혀 널리 알려 선양하여야한다.
  이렇게 문철주가 말하는 의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권위 있는 향토사가의 자문을 받았는데 감히 네 따위가 무슨 잔말이냐 그런 주장으로 보인다. 나를 존경운운 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다. 비를 세우고 5개월이 지나도록  전화한번 알려 준일 없고 김종옥 교장 선생님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으면 오늘날까지 나는 까맣게 모르고 몸 편안히 잘 지냈을 것이다.
 서산출신 모두의 이마에 ‘반역향’이란 낙인(烙印)찍게 한 장본인 중의 한사람으로 시민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견해차운운하면서 문화관광과 몇몇 직원의 사기만 걱정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그 인간성을 알만 하다. 같이 있었다 말 하니까 말인데 너무 황당하고 저돌적이고 독선적이어서 가다가는 낭패스러운 때가 많았다. 그때 나는 사람이 너무 순진무구해서 그런 줄 알았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뿌리 깊은 반역성(叛逆性)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철주라는 사람은 1년 전인가 2년 전에 서산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 갔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러나 문철주라는 사람은 서산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선영이나 살던 집이나  터(古基址)는 물론 남아 있는 유영(遺影)이 한 점 없는 사람이다. 일시 이곳에서 살았을 뿐이라 할 수 있으니 수 백 년 간 서산에 대대로 살아오고  모든 선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과 같은 애향심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들었던 것으로는 그의 부친의 고향은 경남 합천이라고도 한 것 같은데 가까운 일가친척 대부분은 전북고창지방에  살고 있다 들었었다, 선영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다면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최영성의 교수의 고향인 전북순창과는 이웃 군이니 성향이 잘 맞을 것도 같다.
 우리 집에 과일을사다 놓고 갔다는  말도 했는데 맞는 말이다. 현관 앞에 럭비공처럼 생겼고 크기도 럭비공만한 수박 한통이 현관 앞에 있었는데 신발장 앞에 여러 날 놓여 져서 상 한 것 같아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의도는  나를 모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반역(叛逆)에는 분열과 사회혼란이 필수이고 군사반란이 필히 전제 되어야 하는 무서운 일인데 반역행위를 신봉 그 맥을 우리지역에 꼭 심어야 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추진했고 지금도 그 확고한 신념에 변화 없음을 이번 글에서도 예를 들어 굳게 밝히고 있는  문철주가 『현재 서산시가 서해안시대의 국제적인 해안 도시로 발 돋음 하는 기로에 있는 때에 분열보다는 화합과 단결의 힘을 발휘하여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라  주장하고 있다. 영 앞뒤가 안 맞는 천방지축의 글로 도대체 무어가 무언지 기본도 몰라 초등학생만도 못 한 것 같다. 반역의 맥(脈)을 만들려는 사람이 웬 화합타령인가?. 웃겨도 너무 웃긴다.
 서산유래비문을 쓴 최영성교수. 이비의 수립(竪立)을 추진한 문철주회장. 이 비를 세운 이완섭시장등  세 사람은 모두 반역향(叛逆鄕)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진 메니야(mania)들이고 최영성교수의 도그마(dogma)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서산시에서는 서산 전시민의 명예를 훼손하고 엉망진창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비문 중 일부인 2행을 쪼아 낸 뒤 글자를 새겨다 다시 박기도 하더니 다시 사람들이 통행 않는 이른 아침을 택해 새로운 비를 새겨다 세우는 등  비겁 하게  허둥대고 있는데 그러지 말고 이비는 말끔 하게 당연히 철거  되여야 한다.

 

이 은 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자문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전 서산향토문화연구회회장

현 서산향토문화연구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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