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맨날 일만 해? 밥도 서서 먹고?” 그 말에 대화를 시작하다

대화는 사춘기도 뛰어넘는 기적을 선물한다

애들은 부모 하기 나름...2남 3녀를 보면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싶어

가난을 극복하고 5남매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홍미자 씨
가난을 극복하고 5남매를 훌륭하게 성장시킨 홍미자 씨

부모인 우리는 빚 갚기에 전전긍긍했고, 그 사이 23녀 아이들은 스스로 의지하며 너무 잘 커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초등학생 형제가 치킨집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평소 형제를 알고 있던 분이 엄마가 시켰냐?”고 물었고, 뜻밖에도 스스로 한다며 엄마가 장사하러 나오시기 전에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놓으려 한다는 말을 했다.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했던 그분은 몇 년 후, 이제는 중학생이 된 그때의 그 형제를 만났다. 이번에는 눈이 오는 겨울날, 교복을 입고 치킨을 배달하는 모습이 너무 짠해서 마침 치킨값을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을 두 형제에게 주려고 했단다.

그때 뒷걸음질을 치며 안 받습니다. 저희는 어머니께 이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공짜인 돈은 절대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라며 공손히 거절했고, 돌아서 갈 때는 감사의 인사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감탄했다.

기자는 두 형제의 어머니 홍미자 씨를 찾아 인터뷰를 요청하며, 당시 자녀들의 일화를 소개하자 눈시울을 붉히며 너무 일찍 철이 들어 그게 더 가슴아프다빚 갚기에 전전긍긍했던 부모 대신 우리 아이들 23녀는 고맙게도 너무 잘 자라줬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내가 헛살진 않았구나!’ 싶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슴에 맺힌 것은, 부부가 고생한 건 괜찮지만 우리 애들까지 찢어지게 고생을 시킨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는 홍미자 씨.

지난 아픔들이 이제는 기억 너머 저편에 있기에 담담히 말할 수 있다는 그녀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여러 번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돈은 한 푼도 없는데 애들만 많은 우리 집, 망한 사람에게는 돈을 안 빌려준다지만 나에게는 순간순간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거지처럼 살았다. 어느 날 사회 동생이 언니는 왜 땅만 맨날 쳐다봐?’라고 묻더라. 정말 나는 그때까지도 먹고 살려고 한 게 아니라 빚을 갚으려고 하다 보니 단 한 번도 옆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하루아침에 사업실패와 보증으로 빚더미에 앉았던 우리 일곱 식구.

어느 날 집 주인이 수리를 해야 한다며 나가라고 하더라. 그 소리를 듣고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그냥 살게 해달라고. 그 외침은 우리 모든 식구가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간절함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죽을 만큼 힘들 때마다 우리 집 사정을 알고 남편 몰래 대출을 해주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후배가 적금 통장을 내밀며 언제든 쓰고 돈 되면 넣어라는 말을 해서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렇듯 힘든 일상 속에서도 천사 같은 따뜻한 분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살아낼 용기가 있었다.”

홍미자 씨는 인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에게는 너무 많은 인덕이 있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홍미자 씨의 자녀 5남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홍미자 씨의 자녀 5남매

급식비가 없어 밥을 굶어야 했고 60만 원이 없어 졸업까지 늦어졌던 우리 큰딸

홍미자 씨는 가난의 최대 피해자는 큰아이였다며, 급식비가 없어 급식실에서 돌아 나왔던 일과 늦은 졸업을 했던 사연을 나중에서야 큰아이에게 들었다며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급식카드를 가지고 다녔다. 큰딸은 그날도 밥을 먹기 위해 카드를 긁었는데 그만 잔액이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딸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그대로 돌아 나와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급식비 60만 원이 밀려 고등학교 졸업이 늦어졌던 우리 아이. 결국 횟집에서 2개월간 일을 하고서야 급식비를 정산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아이가 취직하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제 동생들 급식비를 자신의 계좌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엄마 내가 내주고 싶어서.’라는데 어린 마음에 그때의 일이 얼마나 큰 아픔이었으면 저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는 홍미자 씨는 분주한 손길을 자주자주 멈추며 눈물을 닦았다.

대학에 입학했어도 학기 중에는 강의실 허드렛일을 하고, 방학에는 빵 공장을 다니며 장학금 전액을 받았던 큰딸. 하지만 딱 한 번은 그만 1등을 놓치고 2등을 하는 바람에 장학금이 반 토막 난 사건이 있었다.

기숙사비를 내지 못한 아이가 마지막 날 전화를 해 왔다. 공장 사장님이 월급 주면 그때 갚을 테니 기숙사비 좀 빌려달라고.

물건값을 부쳐주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돈을 다 긁어모았더니 어느 정도는 되더라. 서둘러 은행으로 가 돈을 부치려는데 그사이 미납요금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기숙사비 일부가 모자라 이체가 되질 않았다.

그날 부치지 못하면 우리 딸은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다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은행에서 막 울었다. 그때 아이 셋을 키우시는, 안면 있는 아주머니가 뛰어와 자초지종을 듣곤 나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더니 통장을 건네주는 게 아닌가. ‘찾을 만큼 찾아서 쓰라는 말에 또 눈물을 바가지로 쏟아냈다.

나중에 딸아이가 경찰관이 되어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아주머니댁을 찾아 인사를 했다. 물론 그 돈은 다 갚았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당이 많은 하우스 일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여 당당히 합격한 둘째 딸

홍미자 씨가 자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은 늘 난 널 믿어. 넌 성실하니까라는 문구다. 처음 그녀는 자다가도 잠꼬대처럼 널 믿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정말로 자식을 믿게 되더라는 그녀.

내가 엄마라고 해서 내 맘대로 자식의 진로를 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둘째 딸이 좋은 곳에 취직했는데도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공무원 공부를 해야겠다는 거였다. 그때는 차마 앞날이 캄캄해서 엄마는 너 믿어란 소리가 안 나오더라.

그 아이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고 그때부터 공무원 시험을 치기 위해 일당이 많은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 역시 원망 한번 하지 않았던 우리 딸.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침에는 빵집에서, 저녁에는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학비를 벌었던 딸아이가 단기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 아빠 엄마 마음 다 안다며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혹자들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그렇게 혹사 시키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6개월 이상은 밥을 먹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홍미자 씨는 일단 대학에 들어가면 기숙사비 외엔 돈을 대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고, 아이들 자신도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23녀는 건강한 정신력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주었다며 잘 커 준 아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딸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
딸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

그동안 아이들 만날 사이도 없이 살았던 우리, 되돌아보니 아이들이 등 뒤에 있다는 걸 알았다.

많은 사람이 홍미자 씨의 자녀들을 보며 그녀에게 어떻게 키웠는지?”를 묻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넷째 아들이 4, 막내가 2살일 때 우리는 2층집에 살았는데 당시 우리 집 바로 밑에는 어린이집이었다. 하지만 나는 원비가 없어 아이들을 그곳에 보내질 못했다.

오전 11시에 맞춰 내가 닭을 받으러 집을 나서면 우리 두 아들은 자기들끼리 집에 있으면서 작은 창문 사이로 멀어져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곤했다. 의자를 끌어다 놓고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모자는 그렇게 몇 번이고 손을 흔들며 작게나마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당시 큰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4명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야 했다. 밥을 챙겨 먹이고 청소를 하고 씻기고... 아이들은 긴 시간동안 그렇게 부모없이 있다가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우리를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다른 날과 달리 막내아들이 끙끙 앓고 있었다. 알고 보니 누나가 동생을 침대 위로 올리기 위해 잡아당긴 팔이 그만 빠져버린 것이었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빚에 쪼들려 정신없이 쫓기고 있는 부모에 대한 걱정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때서야 아이들이 내 등 뒤에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왜 맨날 일만 해? 밥도 서서 먹고그때 정신이 들었다. 아 대화를 하자!

둘째가 엄마는 왜 맨날 일만 해? 밥도 서서 먹고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더라는 홍미자 씨. ‘아 돈 없다고 이렇게 키우면 안 되구나!’.

그때부터 소통의 공간으로 5개의 편지함을 만들어 그 위에 아이들의 이름을 붙이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나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면, 또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편지에 쓰도록 했다.

그때부터 가족들 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홍미자 씨는 아마도 아이들 스스로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우리끼리라도 싸우면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며 서로 양보하고 의지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밤 1시에 퇴근을 해서 겨우 눈을 붙이고 새벽 6시에 일어나 회사 다니는 남편을 출근시켰다. 그 이후 시간부터 가게로 출근하기 전까지는 학교 다니는 시간대가 모두 달라 기상 시간도 제각각인 자녀들을 위해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했다.

아이들이 깨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좋아할 음식을 준비하다가, 한 아이가 밥을 먹기 위해 식탁으로 나오면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주면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고개를 박고 밥만 먹던 아이가 차츰차츰 엄마랑 눈도 마주치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했던 5남매들.

그때 알았다. 커나가는 아이들에게는 돈보다도 대화가 더 필요하단 것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밥통에 넣어 둔 밥 대신 늘 새 밥과 국을 끓여 아이들에게 대접하듯 차려줬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사실 아이들과의 대화는 말을 할 줄 아는 나이부터는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집의 경우, 막내가 겨우 4살 때부터 대화를 시작했으니까.

대화를 시작한 이후의 효과는 상당했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도 저 집은 가난하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듣지 않았다. 대화는 사춘기도 뛰어넘는 기적을 선물한다.

자녀의 생일 상차림
자녀의 생일 상차림

빚이 많아 삶이 퍽퍽한 가운데서도 대화는 아이들에게 보약 그 자체였다

우리 집에는 규칙이 있었다. 1주일에 한 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품격있게 식탁을 장식해 놓고 한나절은 무조건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이 그 시간이었는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마도 보약이었던 듯싶다.

당시 우리 집에는 식구마다 각각 1개씩의 소원함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나 생일날 먹고 싶은 것을 10만 원 한도 내에서 적어 넣는 함이었다. 생일 당일에는 음식을 먹고 난 후 반일은 무조건 가족간에 얘기 꽃을 피웠다.

사실 돈이 없어 생일선물은 근사하게 사지 못했지만, 5남매끼리 서로 연필 한 자루나 사과 한쪽이라도 덕담을 하며 선물해 주는 걸 보면서 내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홍미자 씨에게 당시 엄마의 소원은 뭐였냐?”고 묻자 그녀는 기자를 건너다보며 내 소원은 우습게도 봉지 쌀을 살 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었다. 나는 늘 쌀 가게에서 봉지 쌀만 샀다. 그것도 한집에서 사면 왜 맨날 조금씩 사냐고 흉볼까 봐 쌀가게를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샀다. 애들은 쌀과 김치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다 소원함 덕분에 농협하나로마트에 가면 봉지 쌀을 눈치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부끄럽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해준 게 없다. 단지 대화가 최고란 것만 가르쳐 줬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해준 게 없다. 단지 대화가 최고란 것만 가르쳐 줬다며 쑥스러워하는 홍미자 씨. 그녀는 요즘 젊은이들이 간혹 심신이 너무 나약해서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한번은 우리 가게에 손님으로 온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하더라. ‘여자친구가 있는데 결혼을 하게 됐다. 나는 직업이 없지만 대신 우리 부모님들이 돈을 버니까 그곳에서 살면 된다. 너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이게 요즘의 현실이다.

아이들도 어려운 일을 해 봐야 나중에 힘든 일에 부딪쳤을 때 극복할 힘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내 새끼가 귀하니까 안 시킨다고 한다. 이것은 아이들을 잘못 키우는 것이다.”

돈이 쌓일 틈도 없이 빚쟁이들이 챙겨가 버렸다는 홍미자 씨는 살 궁리를 하다 보니 파산신청을 하려고도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남편이 그렇게는 하지 말자고 말하는 통에 몇 년 전까지도 빚을 갚았다며 마지막 빚을 청산하는 날, 식구들과 함께 파티를 했다며 활짝 웃었다.

 

지금은 빚 한 푼 없이 아파트에 입주했고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그녀 홍미자 씨.

힘든 와중에도 일곱 식구가 거친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부부가 열심히 산 덕분이기도 하지만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이 토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이면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끊임없는 대화가 한몫을 차지했다.

서산시대는 부디 지금의 행복한 일상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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