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출생에 담긴 기록을 말하다①

이름 없는 서산지역 백성들이 꿈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남섬부주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결연문

대저 듣건데 여러 불보살님들이 큰 서원을 발원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함이라. 비록 너와 내가 없이 평등심으로 그들을 보고자 하나 부처님께서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힘들다 말하시니 이 부처님이 설하신 바에 의지하여 제자 등이 함께 대원을 발해 관세음보살 한 분을 조성하고 부석사에 봉안하여 길이 정성껏 봉양케 함이라...중략...선왕과 부모 앞에 엎드려 비노라. 보권도인 계진, 함께 발원하는 심혜, 혜청, 법청, 도청, 환청, 달청, 소화이, 담회, 현일, 김동, 유석, 전보, 김성, 국응달, 난보, 만대, 반이삼, 도자, 반이삼, 국사, 국락삼, 석이, 인철, 서환, 방동, 내화팔, 수단, 국한, 악삼, 시수, 김용』 - 결연문중에서


일본 대마도에서 도난당해 국내로 반입된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소유권을 가리는 재판이 4월 28일 재개됐다. 1심 이후 3년 4개월간 만이다.

대전고법 제1민사부(재판장 권혁중)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법원은 앞으로 불상의 진위 여부, 불상 재질을 위한 성분 검사, 결연문에 대한 감정 등 세 가지를 쟁점 사안으로 꼽았다.

결연문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재판부가 제시한 세 가지 쟁점 사안중 결연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결연문은 1330년경 서주(고려시대 충남 서산의 명칭)에서 불상을 제작 봉안할 시 넣은 복장물중 하나다. 복장물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의 내부에 오장육부를 상징하는 오색의 직물을 비롯하여, 실, 보석, 곡물과 함께 경전을 넣은 종교적 관행이다. 복장물에 의해 불상은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부처로 숭배되었고, 불상의 몸은 심오한 우주의 진리와 천지간의 보물로 상징되었던 것이다.

이 복장물 속에 불상의 조성 내력과 봉안자들의 기원을 적은 ‘발원문’, 즉 결연문이 발견된 것이다.


부석사 불상의 결연물에 담긴 내용은?

 

1951년 5월 일본 간논지 주지 안도 료순(925~2005) 주지가 먼지를 털려고 불상을 들어올리던 중 불상 밑창의 나무판자가 열리면서 복장물이 쏟아져 나왔다.

‘남섬부주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결연문’이란 제목으로 복장물 속에는 불상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문서가 나왔다.

안도 주지는 승려이면서 민속학자로 대마도 문화재위원을 오래 역임했던 학자이기도 하다.

결연문은 우선 천력(天歷) 3년 2월, 불상을 고려국 서주 부석사에 봉안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천력은 원나라 문종 때의 연호로 천력3년은 1330년으로 고려 충숙왕 17년, 또는 충혜왕 원년에 해당한다.

‘남섬부주’는 불교용어로 수미산 남쪽에 있는 인간세계를 뜻한다. 서주는 당시 서산을 칭한다.

결연문에 따르면 봉안자들은 대표자인 승려 보권도인 계진을 비롯하여 시주자 32명을 기록하고 있다. 심혜(心惠), 혜청(惠淸), 법청(法淸), 도청(道淸), 환청(幻淸), 달청(達淸) 등 승려들의 법명으로 보이는 이름을 제외하고 김동(金同), 김성(金成), 김용(金龍)은 형제지간이나 한 집안 출신으로 보이며, 백제의 큰 성씨 중 하나인 국(國)씨 성을 가진 국사(國沙), 국락삼(國樂三), 국한(國閑) 3명도 한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왕실과 귀족, 고승들의 이름으로 행해진 불사와 달리 결연문에는 석이(石伊), 악삼(惡三), 시수(豕守)와 같은 성이 없는 천민으로 보이는 이름이 여럿 섞여 있다. 또 보통 발원문에는 봉안자들 개인의 구복을 빌고 있는 것에 반해 부석사 결연문에는 오로지 중생의 구제와 후세에 함께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빌면서 인연이 없는 중생들까지 제도하기 위해 불상을 봉헌한다고 밝히고 있다.


700년 전, 1330년 2월 서주를 가다

 

결연문에 따르면 불상의 봉안 날짜는 1330년 2월이다. 고려 충숙왕 17년이자 충혜왕 원년에 해당한다. 원나라 황제는 1330년 2월 1일 원 황실의 권력자 엘테무르가 총애하는 16살의 고려 왕세자를 고려왕(28대 충혜왕)에 책봉했다.

충혜왕은 고려왕으로서는 네 번쨰 원나라 황실의 부마이다. 충(忠)이 들어간 고려왕에는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한 충렬왕에 이어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으로 이어진다.

원나라의 부마인 고려왕들은 어려서부터 몽고에 들어가 생활했던 관계로 유목 민족의 풍속에 길들여져 오랜 기간 불교와 유교의 영향 아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던 문화에는 이질적이었다.

이 당시는 고려왕들은 원나라 황실 내에서 자신들 세력의 부침에 따라 왕위를 뺏고 빼앗기는 암투의 시대였고, 고려왕들은 수백 명의 신하를 이끌고 연경에 장기 체류하면서 매년 고려로부터 금은보화와 막대한 미곡을 실어 갔다. 원나라의 속국으로 나라를 제대로 지키려는 고려의 상층부는 와해되었고, 나라 잃은 고통은 오로지 백성의 몫이었다. 더구나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대몽항쟁의 패배의 상처는 깊고 길었다. 30년간의 몽고와의 전쟁에서 백성 10명중 7~8할이 죽었고, 막대한 조공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두 차례 일본 정벌 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고려 군인만 1만 명에 달했다.

왕권이 무너지니 권문세가의 수탈은 가중되고, 권력과 결탁한 불교도 또 다른 착취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같이 타락해 가는 귀족불교의 본거지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불교에서 불교개혁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신앙결사의 형태를 띠며 민중불교를 표방했다. 그 뿌리에는 무신집권의 혼란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이끌던 정혜결사와 원묘국사 요세가 이끌던 백련결사가 있었다.

1330년 서산 백성들이 부석사에 관음보살상을 봉안하면서, 천민들이 함께하고, 개인의 구복이 아닌 오로지 중생의 구제와 인연이 없는 중생들까지 제도하기 위해 불상을 봉헌한다고 밝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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