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 소년이 훗날 세계적 화가가 되다!

힘든 예술가를 돕기 위한 NGO 단체 ‘(사)아트세이버아시아’를 설립하는게 목표

세계에서 사랑받는 화가 해인미술관 박수복 관장
세계에서 사랑받는 화가 해인미술관 박수복 관장

인터뷰를 시작하며

전날 잠을 설치고 아침나절에 서산시 지곡면 해인미술관으로 갔다. 봄빛 가득한 날은 언제나 눈부셨지만 그날만은 가슴부터 설렜다. 얼마 전 이베이에서 그림 두 점이 무려 8억7천만 원에 선정된 박수복 관장을 만나러 가는 길.

입구에 도착하자 마치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처럼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시원한 풍경의 해인미술관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트랙터로 논을 가는 농부들의 모습과 물 받아오는 소리가 어울려 또 다른 장관을 선물할 이곳.

서산시대는 그동안 화첩기행으로 잘 알려진 박수복 관장의 작품 세계와 삶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세계에서 열광했던 박 관장의 예술에서도 어머니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말해달라.

내가 미술을 하게 된 계기는 우리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가이아는 내 삶의 지표를 가르쳐 주신 우리 어머니의 ‘크고 위대한 사랑’을 부엌문에 표현한 작품이다.

예술가 집안에서 한학을 하신 우리 어머니는 마흔 중반에 12남매 중 막내로 나를 낳으셨다. 당시 삶이 얼마나 곤고한 때였던가. 그런데도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기품을 잃지 않으셨는데, 일례로 당신은 그림에 빠진 자식을 보더라도 혼내기는커녕 은근한 미소로 응원을 보내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 아버지는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며 막내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날 아버지에게 혼이나 벌을 서고 있는 와중에도 바닥에 적신 눈물를 발가락으로 찍어 그림을 그리고 있더란다. 이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아 저 아이는 그림을 그려야 되는구나!’란 걸 느껴 그날 밤 아버지에게 “이 아이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을 하셨다.

7살 어린 아들에게 당시에는 귀한 물감을 선물해 주신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 때문에 나는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중간에 잠시 광고회사에 취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기획실에서 그림만 그렸으니, 이날 이때까지 화가란 외길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끼는 작품 ‘가이와’와 함께
아끼는 작품 ‘가이와’와 함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와 만물의 어머니이자, 헌신적이고 애틋한 모친의 기억을 담아낸 작품 ‘가이아’에 대해 궁금하다. 굳이 오래된 부엌문에 ‘가이아’를 그려 넣은 독창적 작품 세계를 창작한 이유는?

우리 어머니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학을 배우신 분이다. 식사 때가 되면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밥 자시라”고 늘 어린 내게 존대하셨고. 자식과 가족을 챙기는 어머니 손에는 물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부엌에서 사시다시피 했다.

어느날 그리스신화 대지와 만물의 어머니 ‘가이아’를 만나는 순간 고2 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발견했다. 너무 놀랐다. 젊은 시절 우리 어머니의 모습 내지는 겨울철 차갑고 딱딱한 대지를 뚫고 나타나는 모든 생명의 복원들이 어머니 모습으로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그때부터 나는 헌신적이고 애틋한 가이아를 부엌문에 담아내기로 했다.

차가웠던 캔버스 대신 따뜻한 나무에 화각을 하는 한편 문틀과 그 너머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원초적 근원에 대한 희구를 그려나갔다. 작품을 해나가는 내내 나는 우리 어머니를 떠올리며 ‘부엌 아궁이 앞에서의 희로애락이 우주의 공기와 같은 온기’로 이어져 감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나는 두고두고 내 어머니를 기억하고 싶었다.

해인미술관 전경(충남 서산시 지곡면 한새지1길 498-2)
해인미술관 전경(서산시 지곡면 한새지1길 498-2)

서산에 내려온 지 올해로 19년이 되었다. 문화 혜택도 서울과는 비교도 안 되고 더군다나 교통편도 상당히 열악한데 어떤 연유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나?

고요하면서 마음 편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예술 활동은 뭐니 뭐니해도 작품 세계에 완전히 매료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중요하다. 더군다나 이곳 터가 나와 궁합이 잘 맞다(웃음).

처음에는 서울을 벗어나면 당장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미련없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넓게 펼쳐진 자연의 편안함과 고요함 때문이었다. 이들과 어우러져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바로 나 같다. 한층 여유로워 예술창작하기에는 제격이다.

진정한 삶의 깨달음과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사랑과 화합, 생명과 우주의 섭리, 하늘의 영감들을 ‘일필휘지기법’으로 담아내고 있는 작가라고 들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내가 처음 작품 활동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해외에서는 상당한 환호를 보내더라. 그것은 바로 내 작품에는 지금껏 서양화에서 볼 수 없었던 구도와 여백의 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양에서는 색을 채우고, 쌓고, 긁어내는 기법 등을 활용했다. 그러나 나는 동양적인 기법을 첨가하여 조화로운 매력을 창조해 내도록 노력했다. 이것은 우리가 봐왔던 그림들(서양화와 전형적인 동양화)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나는 일필로 서양화와 동양화의 매력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는 화가다. 이것은 그 어떤 분도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법이다. 사람들이 한 번씩 “새로운 기법이 불안하지 않았냐”고 묻는데 사실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냥 담대하게 이 기법으로 다양한 작품을 창작했다.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은 넓은 자연의 품이 나를 다독여 줬기 때문이다.

국회미술초대전에서 퍼해밍액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국회미술초대전에서 퍼해밍액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의원회관에서 3.1절 100주년 기념식 ‘퍼포먼스’를 성대하게 진행했다. 이밖에도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호응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퍼해밍액션퍼포먼스’는 무엇이며, 배경 음악은 주로 어떤 것을 사용하나?

사실 내가 하는 것은 퍼포먼스와 해프닝을 결합해 만든 ‘퍼해밍액션퍼포먼스’다. 그동안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을 하나하나 허물어 결국 진정(眞情)을 오롯이 담은 예술로 승화한 작품 세계다.

지난해 ‘3.1절 100주년 행사’에서는 자체 개발한 전통 먹으로 생동감 있는 인간들의 행복한 모습을 독특한 터치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특히 광활한 우주의 무한 에너지를 가득 담아내어 지구촌의 모든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도록 했는데 그때 참석하신 분들이 많은 관심과 외국 기자들의 취재가 있었다.

배경 음악을 물었나? 나는 유독 베토벤 음악을 좋아한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시력과 청력을 잃어가면서도 곡을 쓰고자 했던 그의 절절한 감정이 전해지는 듯해서 몸살이 날 정도다. 특히 음률에 숨어있는 몸짓과 행위를 화가로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만 한 매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음악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다.

아시지 않나. 귀천의 주인공 천상병 시인은 ‘우리 인생은 소풍’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동안 자연이 선사하는 희로애락을 어떻게 포착하여 그것에 맞게 ‘소통의 매개체’로 전해줄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예술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서대 ‘예술‧인문 노블레스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맡으며
한서대 ‘예술‧인문 노블레스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맡으며

얼마 전 작품 두 점이 8억 7천만 원에 선정된 소식과 국내 4번째로 이베이에 작품이 등록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 너머에는 아직도 그림 한 점이 고작 몇만 원인데도 팔리지 않아 배고파하는 작가들이 있다. 여기에 대한 화백님의 생각은 어떤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나 또한 한 때는 ‘그림을 멈춰야 하나!’란 고민 속에 도시를 떠난 적도 있었고, 캔버스와 물감 살 돈이 부족해 버려진 신문지를 모아 묵과 먹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이 훗날 운필법의 시초가 되어 한 번의 수정 없이 일필휘지로 작품을 완성하는 모티브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나처럼 의외로 사각지대에 놓인 배고픈 예술가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을 도울 NGO 단체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내가 하기로 했다. 예술가들을 도울 수 있는 NGO 단체 ‘사단법인 아트세이버아시아’를 설립 중에 있다.

여기 들어오면서 혹시 봤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해인미술관의 당호는 ‘상락촌’이다. ‘나를 찾아오는 모든 예술가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상락촌. 벌써 20년째 우리 집에 붙여져 있는 글귀다.

결국 이 상락촌이 바로 NGO 단체와 같은 뜻이다. 이게 올해 나의 목표가 됐다. 작가들은 도움을 받고 도움을 받은 작가들이 또 작품을 만들어 도와주는 분들에게 선물로 도움을 주고…. 이런 사회 순환적인 것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구상 중이다.

1등이야 어차피 배불리 먹고 마시며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2등은 다르다. 늘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2등을 도울 수 있는 NGO 단체를 만들어 힘들어하는 예술가들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우리 2등들이 서로 등을 기대며 함께 일어설 수 있도록 말이다.

고미술품이 가득한 박수복 화백의 집무실
고미술품이 가득한 박수복 화백의 집무실

인터뷰를 마치며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지금보다는 좀 더 예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박수복 관장. 그는 SBS 대전방송 화첩기행 진행자로 지난 8년 동안 열심히 활동하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두텁게 쌓아왔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입체감이 느껴지는 빠른 스케치로 일반 시청자에게 더 많이 알려진 종합예술가 박수복 관장.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스쳐 지나가 버린 것들, 때론 잊혀져간 이야기들을 다시 우리 곁으로 소환해 준 그는 “다시 태어나도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며 “때로는 자연으로, 때로는 삶과 인생으로 그렇게 시대와 호흡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서산시대는 오늘도 여전히 변화를 꿈꾸며 노력하는 예술가 박수복 관장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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