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때가 생애 최고의 행복 “나는 지금 가장 최선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을 향해 당당히 걷는 반신불수 이현구 씨 이야기
삶을 사랑하는 이현구 씨

 

인터뷰에 앞서

앞에 앉은 기자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을 보였는데도 이현구(41) 씨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카페 주인이 멀리서 이런 모습을 보고 달려와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면 기자는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젊은 분이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 모습이 정말 고마워서 그래요.” 하지만 우리의 대화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손님이 없었고 주인은 뭔가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신불수 임에도 불구하고 현구 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분신인 리어카에 폐지 등을 싣고 해미에서 고북방향 29번 국도를 걷는다. 때로는 힘겨워 보일때도 있었지만 그는 주위의 시선을 묻어두고 당당히 길위에 섰다.

사람들이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는데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폐지, 헌옷, 고철 등을 가득 싣고 걸을 때가 생애 최고의 행복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Q 거리에서 자주 뵈었다. 사람들 말로는 사고가 나서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 얘기를 물어봐도 되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2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까운 신성전문대학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새내기 공학도의 캠퍼스 생활이 얼마나 좋았겠나. 꿈에 부풀어 3개월 동안 미친 듯이 다녔던 것 같다.

그해 6,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깨어나지 못했고, 막내의 사고 소식에 온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그런 상황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나는 보름만에 거짓말처럼 깨어나는 기적을 일으켰다.

천운으로 다시 태어나 1년 동안 병원생활을 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적극적인 재활치료가 가속도를 일으켰는지 내 몸은 점점 차도가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팔과 다리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꼬집고 비틀어도 감각이 없었다. 그때가 겨우 내 나이 20살인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미치고 환장하겠더라.

그러던 중 어느날, 마비된 팔과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 막상 그런다고 생각하니 마비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 왼쪽은 그대로 살아있고. 자르지만 않는다면 나는 뭐라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현구 씨의 물품 집하장
이현구 씨의 물품 집하장

 

Q 폐지를 줍게 된 계기가 무엇이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1년 만에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와 집에만 있었다. 이런 나를 안타깝게 생각한 동네 장로님께서 집에 있다보면 몸이 더 안 좋아지니 근력도 기를 겸 폐지를 주워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하다보면 당신이 대신 팔아주겠다며. 솔깃하더라.

당시만 해도 폐지나 고철, 헌옷 등이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평소 부모님의 걱정스런 얼굴도 보기 미안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기 시작한 것이. 집 옆에 모아놓으면 장로님이 그것을 실어다 2년 동안이나 팔아주셨다.

이런 나를 두고 주위사람들은 수근대기 시작했다.

불구가 되더니 저짓을 하고 있네 차마 듣고싶지 않았다. 그 말을 의식하며 박스를 줍다보니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특히 친구들이 이런 나를 보면 어쩌나챙피하기도 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매장 밖에 내놓은 박스를 줍고 있는데 학창시절부터 안면이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가리키며 혀를 차시더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울고싶었지만 울지않고 끝까지 하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부모님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때 두분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다.

 

Q 이십대 초반에 하기에는 힘든 직업이었을텐데 ?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야되나 말아야되나망설이는 나를 위해 엄마는 아침을 먹고 난 나에게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채워주며 무조건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돌아서 대문을 잠궈 버리셨다.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의 재활을 위해 운동하라는 것이었다. 막상 나와도 갈 곳이 없었다. 특히 추울 때는 더 그랬다. 무조건 열을 낼수 있도록 리어카를 끌며 돌아다녀야 했다.

겨우 점심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가면 대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고, 엄마의 밥상이 따뜻하게 차려져 있었다. 점심을 먹고나면 아침처럼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나갈려고 실강이를 했지만 엄마는 그런 나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집 대문은 그렇게 나를 위해 늘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어느때 부턴가 내 몸이 서서히 건강을 되찾아갔다. 그제서야 부모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안아픈 막내 자식이 평생 집안에서만 살까봐 엄마는 그렇게 내 등을 밀었던 것이다.

지금도 눈 내리는 날과 천둥번개가 치는 날을 제외하곤 나는 리어카를 끌고 길 위를 선다. 심지어 명절때도 예외는 아니다. 그때는 고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날이기 때문에 내겐 가장 횡재맞는 날이기도 하다.

분신같은 애마 리어카
분신같은 애마 리어카

 

Q 일을 하다보면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만났을 것 같은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침 8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나면 리어카를 끌고 서산시 해미면 바닥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돈 될 만한 물건을 찾아 리어카에 싣는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분들은 무거운 공병을 모았다가 직접 자신의 차에 싣고 집 옆 집하장에 가져다 주기도 하고, 빌라 부녀회에서는 폐지나 공병, 헌옷을 모았다가 전화를 주시기도 한다.

겨울에는 춥다고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는 분들도 있고, 무거운 짐을 싣고 오르막길을 가면 차를 타고 가시다가도 도로 옆에 세워놓고 리어카를 밀어주는 분들도 더러 있다.

지난번에는 리어카를 밀어주시고 수고한다며 돈 만 원을 손에 쥐어주더라. 목마를 때 음료수라도 사 먹어라 라면서. 정말 눈물날 정도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좀 전에는 모교인 해미중학교 은사님께서 제자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단 걸 아시곤 서산고등학교 교사들에게까지 부탁하여 헌옷과 신문 등을 모았다며 연락을 해 오셨다. 이럴 때는 정말 힘이 난다. 요즘은 헌옷들이 그나마도 돈이 된다.

Q 황당했던 일도 있었을 것 같다. 혹시 이 일을 하면서 그랬던 적이 있었나?

 

물론 있었다. 예전에는 고철값이 좀 나갔다. 그 시절 한번은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모 한의원 앞에 평소처럼 버리는 박스가 있었다. 박스를 접으려고 보니 안에 냄비가 있더라. 리어카에 주섬주섬 실었다. 그런데 잠시후 이런 나를 본 직원이 버리는 냄비가 아니라며 나를 도둑으로 몰았다. 너무 억울해서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도 먹히지 않더라.

그때 평소 나를 눈여겨 보시던 아주머니들이 그 상황을 보고는 이 분은 그런사람이 아니다고 도와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요즘도 그때 아주머니들이 좋은 인연이 되어 물건을 모아놨다고 연락을 해주신다. 세상에는 이렇게 좋은 분들도 도처에 계시더라.

Q 요즘은 모두 어렵다. 이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혹시 수입을 물어봐도 되나?

아 물론이다. 예전에 정말 많이 벌때는 한달에 70만 원도 벌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10만 원도 벌지 못한다. 돈을 벌면 은행에 저축을 하는데 요즘은 은행갈 일도 별로 없다. 지금은 돈도 안되는데 몸만 엄청 고되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입에서 단내가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성한 사람이었다면 더 열심히 해서 수입을 올릴텐데 나는 오른쪽을 쓰지못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튼 고정된 수입이 없다보니 힘들다. 그래도 일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 직업을 하잖게 여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벌써 20년째 이일을 하면서 나는 그래도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위 사례처럼 억울한 일을 당할때는 너무 속상해서 회의가 느껴질때도 있다.

집 앞 수선화 옆에서
집 앞 수선화 옆에서

 

Q 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인가?

나는 사고를 당했다. 정말 살고 싶었다. 뇌 수술을 했고, 팔다리를 자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더더욱 삶에 애착을 느꼈다. 결국 나는 살았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지금도 악착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한번씩 자식같은 아이들이 병신이라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아직도 면역이 되어있지 못한 것 같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버려야하는데 그런 사소한 것들이 가장 힘들다.

처음에는 같이 붙어 싸우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하지만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그때마다 그냥 눈앞이 아득해진다.

속상해서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는 그러신다. “참아라. 꿋꿋하게 견뎌라

어떠한 얘기를 듣더라도 더는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의 근육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인터뷰를 마치며

현구 씨는 인터뷰 말미에 걷다보면 마비된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씩 돌아오는지 아프다. 호전반응이라고 믿고싶다고 말했다.

이런 말도 남겼다.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느날 문득,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내 몸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부끄럽고 창피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회의 구성원 중 한사람으로 산다는게 너무 좋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부디 여러분들의 친구이며 이웃이 될수 있도록 소중한 존재로 봐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는 아일랜드 켈트족의 기도문이 생각났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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