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렬공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장 문철주

서산 지명유래비 건립은 문화적 업적과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현창하여 교육적 메시지를 후세에 전하는 상징물로 활용하고자 건립하게 되었다. 본 서산 지명유래비는 양렬공 정인경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서산시민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2013년 8월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충남도와 서산시에 건의하여 비 건립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비문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가 글을 짓고, 향토사학자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자문을 의뢰하여 비문을 확정, 각자하고 건립하였던 사항이다.

건립 후 서산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신 향토사학자님들께서 비문 일부 문맥에 대하여 말씀해주신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된 사료에 의거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인집권기 농민항쟁은 오늘날의 평안도 일대인 당시 서북지역과 개경 이남의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났다. 1176년의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의 봉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1182년 관성현과 부성현민의 봉기 사건도 이와 같은 농민항쟁의 흐름 속에 보이는 양상이다. 당시 농민항쟁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폭압적인 토지탈점과 부세수취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에는 부성현의 고을 사람들이 지방관인 영위(令尉)를 가두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시 곳곳에서 벌어진 농민항쟁의 배경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인해 고을명인 관호가 삭제된 것은 당시 최 씨 정권이 부성현의 항쟁을 고려왕조를 부정하는 움직임으로 파악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 명종대의 농민항쟁은 고려조정에서는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강력한 통제가 이어졌다. 부성현이 없어지면서 무려 102年동안 부성(서산)의 역사는 기록에서 찾기 어려워졌던 것을 보면, 무신정권이 부성현의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사료 몇 가지를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고려사(高麗史) 명종12년에 이 현 사람들이 영위를 협박하고 가두었으므로 관에서 아뢰어 관호를 삭제하였다는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명종 12년 관성과 부성 두 고을을 폐하였다고 하였고 1485년(성종 16년)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고려 명종 임인년(1182) 봄 정월 관성현과 부성현 두 고을을 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691년(광해군 11년) 한여현이 편찬한 호산록(湖山錄) 건치연혁에는 명종 12년 고을 아전이 영위를 유폐시키자 유사가 아뢰어 고을이름을 제적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명유래비의 ‘무신정권은 부성현을 반역향이라 하여 고을을 없애고 관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라는 내용은 문맥상 고려 무신정권이 부성현을 반역향으로 파악하였다는 의미이며, 금석문의 특성상 긴 이야기를 짧게 표현하기 위해 고려 명종대의 사회상과 무신정권의 지방민에 대한 인식, 그리고 당시 읍호 치폐의 관행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비문의 뒤에 이어지는 ‘서산’이라는 지명의 등장을 위한 역사적 배경으로 활용되는 문장인 것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고을 치폐의 배경에 대한 장황한 설명(고려는 고을에 역모사건이 벌어지면 군현을 폐함)을 생략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용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명종 12년(1182)이면 지금으로부터 833년 전의 일이다. 그 누구도 그때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축약된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 볼 뿐이다.

굳이 고려사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가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풀어 무고한 양민을 수없이 학살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그 후 그 민중봉기가 오늘날 민주화운동으로 승화되어 국가의 지원과 보살핌을 받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비문의 저자를 두둔하는 말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반역향’이라는 표현도 아마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탄곡 이은우 선생께서 지적하신 내용이 시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 문구라 생각되어 우리 기념사업회에서도 그 대안으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의 고견을 들어 다음 내용의 보조 비석을 세울 것을 서산시에 건의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백성을 괴롭히는 위정자에게

반역향도 불사(不辭) 했던 의인(義人)의 땅이여!

백년 쌓인 폐현(廢縣)의 고통을

학행(學行)으로 씻어 냈던 선비의 고장이여!』

그러나 시의 검토 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어휘의 숨은 맥락은 이런 뜻이라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탄곡 이은우 선생을 존경한다. 공직에 있을 때는 나의 직접 상관으로 모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내 공직발전에 디딤돌을 놓아 준 분이다.

공직에서 퇴직 후 내가 양렬공 정인경 선생 기념사업회장직을 맡았다고 하니까 사회단체의 어느 책임보다도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면서 격려 해 주셨던 분이다.

나는 당초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를 알지 못했다. 탄곡 이은우 선생께서 최영성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최고가는 역사학자라고 소개 해 주어 최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비문의 저작도 그 분께 의뢰하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서산지명유래비문 저작과 관련하여 우리 세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금이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학자는 학문을 연구하고 집필함에 있어 각자의 연구방법, 자료인용, 문구사용, 표현 등등에 있어 각자 고유의 식견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글을 쓰고 연구결과를 발표 한다고 생각한다.

최영성 교수의 비문도 정통성 있는 학문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으로 믿고 있고, 탄곡 이은우 선생의 지적도 향토사학자로서 좋은 의견을 내 주신 것으로 믿는다.

다만 어떤 작품이나 연구결과에 대하여 주변인의 주장과 논리가 주된 저작자의 학문의 경계를 추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비문내용 저작 당시 당사자 간 협의되었다는 내용은 또 다른 분쟁을 일으킬 것 같아 생략하고자 한다.

지금 이 상황에 와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제일 먼저 이 비문의 문제점을 지적한 김종옥 님은 우리 기념사업회의 초대 회장이시고, 많은 연구내용을 제시하신 탄곡 이은우 선생은 고문이시다. 회장직을 맡고 있는 본인이 이 일을 추진하면서 원로, 선배님들을 깍듯이 모시지 못해 이런 어려움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어 자책감과 함께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길 없다.

사실 이 일이 처음 붉어졌을 때 나는 임원 한분과 함께 탄곡 이은우 선생 댁을 찾아갔었다. 깊은 말씀을 나누고자 방문했으나 문을 두드려도, 전화를 드려도 연결되지 않아 가지고간 과일만 문 앞에 두고 되돌아 온 일이 있었다. 좀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을 걸 하고 아쉬움이 든다.

나는 최근 서산시청 문화관광과 직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 있다. 서산을 위해 보람 있는 일로 추진 된 ‘서산 지명유래비 건립 사업’이 일부 견해차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 빨리 논쟁을 종식하고 공무원들이 본연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두 하나 되는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우리 고장 서산 사람들은 지금도 옥녀봉의 전설을 믿으며 새롭게 웅비할 서산시의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 이러한 시민의 정서를 생각하여 양렬공 정인경 선생 기념사업회와 서산시가 협의해서 일부 문구를 수정·보완하여 비를 다시 세웠다. 상서로운 땅 서산은 현재 서해안 시대의 국제적인 해안 도시로 발돋움 하는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다. 이럴 때 일수록 분열보다는 화합과 단결의 힘을 발휘하여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서산시가 더욱 더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면서 둥글게 차오른 보름달을 보며 민족최대의 명절인 추석에 시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명절을 맞이하고 화합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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