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최윤애
보건교사 최윤애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그녀는 시집 와서 딸 둘을 연이어 낳고 세 번 만에 아들을 얻었다. 아들 하나를 더 얻기 위해 아이 둘을 다시 낳았지만 결과는 딸딸.

14녀로 만족하며 살던 불혹의 어느 날 늦둥이가 생겼다. 처음으로 병원에서 분만을 하였는데 아쉽게도 또 딸. 그녀가 핏덩이를 버리고 가겠다는걸 남편이 말리며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것도 성이 안차 그 핏덩이를 넓은 안방의 차가운 윗목에 던져두었다. 우리 친정어머니의 이야기고 바로 나의 이야기다. 그 핏덩이, 15녀의 막둥이가 바로 나, 82년생 최윤애다. ‘둘도 많다라는 표어가 있었던 80년대에 6남매의 형제를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버지가 나무, , 기와 등으로 손수 지으신 한옥에서 살던 나는 5학년이 되어서야 주방과 욕실이 딸린 신식(?) 집에서 살게 되었다. 아궁이에서 군불을 때고, 부엌에서 쪽문으로 음식을 옮기고, 소죽 끓이는 냄새를 맡고, 집에서 5미터쯤은 떨어진 샤워실과 화장실을 이용하고, 30분을 걸어야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경험을 내 또래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겨울에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방에서 목욕하고, 봉고차를 대절해 온 마을 사람들과 목욕탕에 다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사람들은 내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면 손녀냐고 물었다. 반면에 17살 차이인 큰 언니와 다니면 엄마냐고 물었다. 어린 가슴에 그 말이 참 상처였다. 나도 젊은 엄마와 또래의 형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가족관계와 생활실태를 거수로 조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8~17살의 나이차가 나는 언니오빠, 10~25살의 나이차가 나는 조카들 사이에서 나는 박쥐처럼 어디에도 완벽히 끼지 못한 채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다 8년 전 학창시절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매형이 7남매 중에 늦둥이 막내라고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매형이라니 그 친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후에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

반면 잊지 못할 나만의 소중한 추억도 참 많다. 뒤늦게 태어난 아이는 가족과 친척들, 동네 어른들께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매년 가족들은 나의 생일이면 동네 또래들을 초대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생일상을 차리고 파티를 해주었다. 형제간 나이 터울로 인해 거의 외동처럼 자랐던 내게 타지로 나간 언니 오빠들은 집에 올 때마다 선물을 안겨 주었고, 친척들은 시골에서 혼자 크는 나를 위해 과자를 한 보따리씩 사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내 상장 파일을 꺼내 자랑을 하시고, 그걸 말리는 나에게 급기야 상장을 보여줄 때마다 천 원씩 주겠노라 약속하며 지키셨다. 동네 어른들은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 아래에서 성실히 지내며 인사성 밝던 어린 나를 대견해 하시며 볼 때마다 칭찬해 주셨다.

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나는 거의 매일 친구들과 우리 집 너른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였고 때가 되면 산에 가서 오디를 따 먹고 밤을 주웠다. 여름에는 집 앞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며 미꾸라지, 가재를 잡고 겨울에는 아빠가 만들어 주신 썰매를 신나게 탔다. 주변에 널린 여러 가지 들꽃과 잡풀, 흙으로 소꿉놀이도 하고 과수원을 하시는 부모님 덕에 사과와 배, 감을 원 없이 먹었다.

시골에 살며 조금은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성인이 되어서는 내 또래들처럼 살고 싶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감탄이 콤플렉스로 작용하지 않지만 평범한 환경에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오밀조밀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가족들과 적당한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다보니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평범한 것이 좋은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아이들에게는 남다른 이물감을 남겨주지 않아 다행스럽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분주한 현대 생활로 행사 때만 만나는 가족들과 친척들,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웃조차 누구인지 모르고 경계하며 삭막하게 지내는 현실, 수많은 자연물 대신 넘쳐나는 장난감들로 둘러싸인 우리 아이들...

그래서 나는 올해도 도시텃밭에서 아이들과 흙을 만지고 채소가 커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둘째도 제법 컸으니 친인척과 교류하며 지내고, 어릴 적 받았던 사랑을 조금이나마 나누는 삶을 살아 갈 것이다.

그래. 이보다 뭣이 더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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