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산 최초 ‘음암면지’를 발간한 김낙중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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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산 최초 ‘음암면지’를 발간한 김낙중 옹
  • 최미향 기자
  • 승인 2020.03.03 0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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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비록 죽고 죽어도 고향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겠습니다”

“봄 되고 꽃피면 나는 눈물바다가 돼. 저 꽃은 봄이면 피는데 자식놈은 한번 오지 않어”
일편단심 고향사랑, 음암면 율목리 김낙중 옹
일편단심 고향사랑, 음암면 율목리 김낙중 옹

글을 시작하며

높은 담벼락 콘크리트 감옥을 뒤로하고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청년 김낙중이 음암면 율목리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우상이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준 상록수 심훈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온 것이다.

김낙중 옹(89)은 그렇게 90여 년 세월을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고향을 사랑하며 죽어서도 잊지 못할 내 고향. 언제나 언제까지나 영원히 빛나고 번창하리라라고 노래를 불렀다.

음력 2월 초하룻날, 음암면 율목 당산수 서낭제 앞에서 고향사랑을 읊으며 눈물을 흘리던 김낙중 옹의 인터뷰를 전한다.

 

15세 소년, ‘상록수를 읽으며 고향사랑에 미치다

소년 김낙중이 심훈 선생의 상록수책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는 농촌 계몽운동의 내용을 읽으며 지금껏 느끼지 못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또렷이 기억나는 대목들은, 눈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필요하다. 이 땅의 지식 분자들이 농··산촌으로 방방곡곡 파고들어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머리 싸매고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벗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이 한 몸 희생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한다는 대목들이었다.”

김낙중 옹의 말을 빌리자면 “15상록수를 접하면서부터 고향 사랑에 미쳤다고 말했다.

심훈 선생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서산중학교에 다니며 낮에는 학교, 밤에는 동네 사랑방에서 야학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는 단편소설 밤마다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글이 바로 문학제에서 소설부문 1등에 당선된 글이다.

그 뒤로도 학생 김낙중은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심지어 허드렛일도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고향 살리기 운동에 매진했다.

 

# 중학생 감옥에 투옥되다

그러던 중, 김낙중 옹이 서산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날 선생들이 학교에 나오라고 하는거여. 안 나갈 수가 있나. 나가니께 중학교 학생위원장을 뽑더라고. 내가 1~3학년 때까지 줄곧 급장을 하다 보니 전부 나보고 위원장을 하라고 하는거여. 안할 수가 없는 상태였지.

그때가 마침 6·25 동란 때였는데 당시 우리 동네에는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었어. 그들은 중학생인 나를 부역자라는 이유로 감투를 쉬워 마구잡이로 끌고 갔지. 나는 죄없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어. 지금 생각해도 억울한데 당시에는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억울)했겠나.

그때는 법도 없었던 시절이었어. 그냥 막 사람 죽일 때야. 감옥에서 살아나갈 생각도 못 했어. 어두운 감옥에서 울다가 잠이들면 내 고향이 나타났어. 그러다 잠이 깨면 나는 눈물로 베개를 적셨지.

내가 쓴 내 고향이란 시도 당시 감옥에서 눈만 감으면 나타났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어.”

김낙중 옹의 사랑하는 고향에 대한 시제목 ‘내 고향’
김낙중 옹의 사랑하는 고향에 대한 시제목 ‘내 고향’

감옥에서 쓴 율목리 내 고향’ 

 

내 고향

 

태백산 산성기슭

모가을 서낭당느티나무

석가을 고개 밤실배시동

 

밤 낮 자나깨나

왜 그렇게도 못잊었던가

애타게 그리웠던가

 

옛날 슬픈 철창속에서도

사무친 고향 꿈은

밤마다 눈물베개 적셨지

그 맹세 그 다짐

마냥 70여성상 아닌가

 

죽도록 사랑하는 마음

다시 태어나도 살고 싶은

! 영원 잊지 못할 내 고향이여!

 

낙원이 따로 있나

천당이 따로 있나

여기가 낙원이요

여기가 천당일세

 

고향사랑 마을사랑

서로서로 뜨겁게 손잡고

아름다운 우리 고향 빛내소서 

 

지옥은 이런 곳이 아닐까

살아나간다는 희망이 별로 없었던 감옥에서의 생활. 그럼에도 만약에, 만약에 살아만 나간다면 고향을 위해 온 힘을 다 받치겠다고 다짐했다는 김낙중 옹.

당시의 감옥생활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지. 그때는 누가 손짓만 해도 목숨이 그냥 파리목숨이니께. 전기고문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어. 그런데도 때가 되면 배가 고팠지.

작은 보자기에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주먹밥과 반찬이라곤 소금만 겨우 줄 뿐. 어떨 때는 저녁밥도 건너서 안 줄 때가 있었어. 미치고 환장허지. 배가 너무 고파서 밥 담아 먹던 손수건 같은 보자기를 쭉쭉 빨아먹을 때도 있었어.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것은 비극이여.”

김낙중 옹은 이 모든 것들이 인생에 참 교훈이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반찬이 없어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것어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글썽거렸다. 기자는 짠한 가슴을 억누르며 어떻게 풀려날 수 있었냐고 묻자 그것도 참 기맥히지라고 말을 이었다.

아무 죄도 없이 3년을 감옥에서 사는디 처음에는 억울했고, 그다음부터는 죽어 나가겠구나 싶었지. 시간이 갈수록 고향 생각이 더욱더 줄을 잇길래 살아만 나가면 고향을 위해 죽겠다라고 마을을 굳혔어. 파리목숨인 우리가 미래를 생각이야 하겠어 어디.

2년 동안 대전형무소에 있다가 어느 날 김천에 있는 소년형무소로 옮기더라고. 그때가 6.25 난리가 평정되는 시기였어. 그러니께 그때는 주먹밥 대신 좀 나아져서 국밥인가 뭔가를 주는 거여. 음식을 바꿔먹어서 그런가 바로 설사병이 생겼지.

그치지 않으니께 나를 시체방으로 옮기대. 그때 당시는 형무소 안에 병들어 못 고치는 사람이 생기면 며칠 보다가 바로 예비시체방으로 던져두던 시절이었어. 나는 그 방에서 닷새를 자고 나왔지. 5일이 지나니 검사장이 나와서 나를 진찰하더라고. 정말 죽을 것 같으니께 형집행정지를 시켜주두먼. 한마디로 병보석으로 나온 거지.

감옥생활 3년을 한거여. 그러니께 내가 뭐 있겠나. 우리 마을에 1,000만 원 내는 거? 그런거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어. 그저 적게 내놔서 송구할 뿐이지. 나는 그렇게 느껴지더라고. 죽을 목숨 아녀.

지금은 그런 거 다 (감옥)겪고 살아서 그런가 하루하루가 그저 행복혀. 내가 (저승)갈때까지는 우리 마을 잘 지켜나가야지.”

 

마을발전기금으로 1,000만 원을 기증한 김낙중 옹
마을발전기금으로 1,000만 원을 기증한 김낙중 옹

천만 원 내는 것도 내 마음에는 영 부족혀

김낙중 옹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음암면 율곡리 마을을 잊어본 적이 없다.

우리 마을을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 계속 줄기차게 만들어 왔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옛날부터 마을에서 2월 초하룻날이면 선왕제를 지냈던 곳이야.

20대 적부터 여기를 이렇게 저렇게 발품 팔아서 지금은 역사로 만들어놨어. 인근 서산에서는 아마 제일 크게 만들었을 거여. 나는 죽을 때까지 할 예정이여.

이번에 마을 기금으로 천만 원 내는 것도 내 마음에는 영 부족혀. 우리 할매(부인)는 아주 환자인디 내가 미안해서, 이거 내기가 영 뭐해서 말을 잘 못혔어. 그래도 나중에 알고 이해해 주더라고 고맙게도. 우리 딸도 잘한다고 하고.”

기자는 무남독녀 외딸이냐고 김낙중 옹에게 묻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 울먹이며 아들은 죽었어. 기막힌 사람이야 나도. 5년 됐어. 간암으로 죽은지. 3억 빚내서 내 간 떼다 이식까지 했는데 죽었어. 죽으려면 할 수 없두먼. 그 돈도 올해 다 갚았어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저 꽃은 봄이면 피는데 자식놈은 한번 오지 않어

김낙중 옹의 아들은 현재 음암면 율목리 가족납골당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보고 싶을 때는 노다지 자주 가봐. 지금 사는 집도 그 (아들)아이가 자기 손으로 지었어. 집 근처 꽃밭이며 뭐며 다. 특히 집 주변으로 연산홍이 뺑 돌려 서 있어. 봄 되고 꽃피면 나는 눈물바다가 돼. 저 꽃은 봄이면 피는데 자식놈은 한번 오지 않어. 그래도 우리 할매는 나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고 속으로 울어. 나를 자극시키니께. 구십 다 되어가는 늙은이 둘이서 우리 아들 얘기하면 울까 봐 서로 그놈 이야기는 안혀.”

김낙중 옹은 아들이 간 시월 늦가을은 그래서 좋지 않다고 했다. “고생만 하다 자기가 지은 집에도 못 와 보고 장례식장에서 장사지내고 그렇게 갔어. 그래서 그놈만 생각하면 많이 아퍼…….”

바람이 부는 가운데 인터뷰를 하면서 김낙중 옹과 기자는 함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날따라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습한 겨울 내음은 가슴 끝을 쓰리게 했다.

율목리, 내 아들이 잠들어 있고 조만간 나와 우리 할매가 영원히 갈 곳인디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우리 딸이 오매 아배 살라고 한 달에 얼마씩 주는 용돈을 아껴서, 또 아껴서 5년간 모았지. 보니 1,000만 원 조금 빠듯혀. 정말 기맥힌 돈이지. 그걸 마을에 주는데 나는 더 못 해줘서 미안하지 뭐. 이걸 아는 사람은 눈물 안 흘릴 수 없을겨. 그러니 내가 울지. 여북해서.

그렇게 나는 (감옥)죽지 않고 살은 것만도 고맙고, 이런 나를 아껴주는 고향 사람들이 고맙고 감사하고. 내가 편지에는 부끄럽다고 썼어. 제대로 많이 못 해줘서 말여.”

아랫글은 지난달 24일 음암면 율목 당산수 서낭제 앞에서 고향사랑 성금’ 10,000,000원을 율목리 마을 이장에게 맡긴 후 느티나무 앞에서 읽은 김낙중 옹의 편지다.

 

김낙중 옹의 사랑하는 고향에 대한 시, 제목 ‘내 고향’
김낙중 옹의 사랑하는 고향을 위해 쓴 '연서'

 

이 몸은 죽고 죽어도 고향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고향 가족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는 대단히 부끄럽습니다. 저는 고향가족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 덕분에 이제껏 90 평생을 잘 살아왔습니다. 저의 일평생 꿈이고 숙원이었던 간절한 고향 사랑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이제 와 보니 대단히 부끄럽습니다.

저도 모르게 나이 90 황혼길에 접어드니 할 일 다 못한 저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제 인생 마지막 조그마한 고향사랑 성금을 받쳐 올립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억만금 받치고 싶지만 너무나 미약합니다.

고향가족 여러분, 이 몸은 비록 늙고 머지않아 가겠지만 언제나 고맙고 자랑스러운데 고향은 영원히 빛나고 번창하리라 믿으면서, 마지막 내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내 고향의 무궁한 발전을 비는 것입니다. 아울러 내 고향 사랑에 더욱 몸 받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 몸 죽고 죽어도 그 마음 변치 않겠습니다.

 

글을 마치며

매년 봄만 되면 아들이 심은 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김낙중 옹은 이 겨울이 지나고 빨리 봄이 되어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훠이훠이 멀어져 갔다.

오후 들어서부터 음암면 율목리 뿌옇던 하늘에 잿빛 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바람마저 느티나무 둘레를 휘돌기 시작했다. 때때로 마을 주민들의 웃음소리가 아름다운 율목리 하늘을, 하늘 같은 당산수 아래를 가득 채웠다.

해마다 2월 초하룻날이면 느티나무 당산제를 지내는 음암면 율목리 주민들
해마다 2월 초하룻날이면 느티나무 당산제를 지내는 음암면 율목리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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