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학파 김한록 ‘위정척사 이념’...이항노 학맥 이은 유학자 유진하 항일사상 고조
3월 16일 서산읍 봉기 이어 해미·팔봉·성연·음암·운산·지곡으로 들불처럼 확산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 만세운동' 모습. 출처=독립기념관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 만세운동' 모습. 출처=독립기념관

 

19193.1만세운동은 일제로부터 식민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구국 항쟁운동이다. 서산지역의 3.1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김용환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을 전개한 운동이다. 이에 3.1절을 맞이하여 1919년 서산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재조명하고자 운산면 출신 김상기(사학자) 교수의 서산지역 3.1운동에 대한 논문을 축약하여 정리하였습니다. - 편집자 주

 

서산지역 3.1운동의 배경

 

서산지역에는 홍성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인 김한록(金漢綠, 1722~1790)을 통하여 남당의 학문이 전수되었다.

김한록의 학문은 위정척사의 이념인바 조선 말기 그의 손자 김상정(金商圢)에 이르기까지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어 애국정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1899년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의 학맥을 이어온 유학자 유진하가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 추계마을로 이주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한바 항일사상이 고조되었다. 그는 김복한, 김상덕 등 인근 유생들과 교우하면서 척사론(斥邪論)을 펼쳤으며 향풍진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진하는 1906년에는 당진 대호지면 의령남씨들이 운영하는 도호의숙(桃湖義塾)에 초빙되어 강학을 하던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유진하가 세상을 뜨자 그의 문인인 이철승이 숙장으로 활동하면서 강학을 통하여 제자들과 주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가 가르친 문하생중, 대호지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남상락, 남상돈, 남상집 등을 배출하였다.

이철승은 원사 이정구의 후손으로 1879년 서산군 음암면 탑곡리 송내마을에서 태어났다. 유진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고 철저한 위정척사론자가 되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학문의 근원이며 사서오경(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 오경-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이 학문의 중심이라 하고 유학의 충효사상을 가르쳤다.

이철승의 문인으로는 서산의 김흥제, 유기철, 이병철, 이재승, 이학수, 정재옥, 최봉환, 한동벽, 이철영, 한원우 등이 있다. 그들 중 이철영은 음암면 문양리 출신으로 음암면 탑곡리에 거주하면서 이철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이 돈독한 우국지사였다.

 

이철영(李喆榮, 1884~1945,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 선생

서산시청 정문 앞 공원에 세워진 이철영 선생 추모비
서산시청 정문 앞 공원에 세워진 이철영 선생 추모비

 

이철영(李喆榮, 1884~1945) 선생
이철영(李喆榮, 1884~1945) 선생

부재(復齋) 이철영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08월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 사실을 알리는 포고문을 찢어버리고 이를 게시한 서산경찰서 게시판을 불사르고 항거하다가 체포 구금돼 공주형무소로 이감 중 왜경 순사부장 재등상웅(齎藤常雄)을 척살하고 피신했다. 그 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구문도(具文途) 집에 숨어 살다가 10여 년 후 동생의 처남인 최숙현의 주선으로 이선영(李宣英)이라 개명하고 살았으며, 당진군 송악면 노공재(盧公在)씨 집에 서당을 열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는 광복의 기쁨을 못 본 채 19456월 음암면 상홍리에서 별세했다. 196011월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기 위하여 서산군민들이 힘을 모아 서산군청 앞에 이철영 의사 추모비를 건립했다.

그 외에도 민태직(閔泰稷), 정재학(鄭在學), 전우(田萭), 김건주(金建周) 등 많은 인사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3.1 독립만세운동 전개

 

서산지역에서 3.1운동은 316일 서산읍에서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319일과 324일에는 해미에서, 331일에는 팔봉면에서, 45일에는 운산면 고산리에서, 48일에는 성연면과 음암면, 운산면 여미리와 용현리에서, 410일에는 수평리와 갈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산시내에서의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인들이 각기 예식과 예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에 다수의 군중들이 호응하면서 크게 시작되었다.

해미면에서는 310일 남상철(南相喆)의 주도로 전개되었으며 324일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은 해미 저축조합 서기인 이계성의 주도로 해미보통학교 졸업생 환송회에서 시작되었다. 해미보통학교 학생들은 밤 11시경 기독교인과 주민들과 함께 읍내리 면사무소와 우시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팔봉면에서는 331일 밤 9시경 산에 올라 횃불을 들고, 해안에서는 등불을 달아놓고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했다.

성연면에서는 48일 김옥제 등 갈현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성암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운산면 여미리에서는 48일 밤 10시경 주민 300여 명이 산에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일본헌병 4명과 보병 2명을 급파하여 시위군중을 진압함에 군중은 투석으로 맞섰다. 또한 410일 수평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를 외쳤고, 갈산리에서도 같은 날 11시경 주민100여 명이 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과정에서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음암면에서는 410일 밤 11시경 부장리 채돈묵(蔡敦黙) 등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자 일본경찰과 보병이 출동하여 발포하므로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지곡면에서는 최정운, 최금순, 최학순 등이 천도교인들과 함께 부성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이와 같이 서산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서산, 당진, 주재 경찰과 헌병, 공주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동원하여 강력 진압하였다.

해미의 이계성과 김관용을 비롯한 200여 명이 검속되었으며 운산면 갈산리와 수평리에서는 사망자까지 발생하였다. 체포된 이계성과 김관용, 허후득, 이봉하, 오인탁, 김옥제 등이 옥고를 치렀으며 유세근 등 많은 사람들이 태형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서산지역의 3.1운동은 유학자와 학생들이 주도한 곳이 많으며 주로 밤에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한 점이 특이하며 일제에 저항하다가 여러 명의 희생자를 낳기도 하였다.

 

한월당 김상정(金商玎, 1875~1954) 선생

서산시청 정문 앞 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 한월당 김상정 선생 추모비
서산시청 정문 앞 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 한월당 김상정 선생 추모비

 

한월당 김상정(金商玎, 1875~1954) 선생
한월당 김상정(金商玎, 1875~1954) 선생

634번 지방도로인 성연면 일람리 사거리에서 팔봉면 덕송2리 까지 구간을 독립운동가 김상정 선생의 호를 딴 한월당로라 부른다.

김상정 선생은 1875년 고종 12년 아버지 김덕재(金德載)와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명옥(明玉), 호는 한월당(寒月堂) 또는 곡천(谷川) 이다. 한월당 김상정 선생의 기록은 그가 저술한 한월당집(寒月堂集)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인물록,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들 김홍제(金洪濟, 1915~2010)씨의 말에 따르면 한월당 김상정은 경주 김씨로 1875년 음력 912일 당시 서산군 음암면 유계리에서 출생하였고(공식 자료에는 부석면 칠전리 출생), 남당 한원진의 학문을 계승(남당학파) 선대 한간(寒澗) 김한록과 월담(月潭) 김일주의 호에서 한자씩 취하여 한월당이라 칭하였다.

호서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한월당 김상정은 남당학파 계열의 유학자로 고조인 한간 김한록과 종증조인 월담 김일주 등을 통해 내려온 호론적(湖論的) 학풍을 가학(家學)으로 계승하였다. 한월당은 삼강과 오상이 인간이 지켜야 할 대륜(大倫)으로 보고 있다.

그는 1919122일 덕수궁(德壽宮)에 유거하던 고종(광무황제)이 갑자기 훙거(薨去)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혼자서 발상하였다. 같은 해 323일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面民大會)를 개최하였을 때 면민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倭王)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朝鮮總督)에게 발송하였다.

912일에는 면서기(面書記)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倭王) 대정(大正)은 한국(韓國)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기도 하였다.

2년 후인 19219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金商玎)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靑陽駐在所)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한월당은 광복 후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의 참수를 주장하는 혈서를 써 그 기개를 떨치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61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臨時政府)에서 그의 혈서인 할체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金九)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김상정 선생은 노환으로 80세에 별세하여 고남1리 선영에 묻혔다. 정부에서는 고인이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여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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