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칼럼-국내 최고 뇌의학자가 전하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통찰

약 200만 년 전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이후로, 최근 몇 백 년을 제외하면 마음껏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1만 년 전 인류가 농사를 짓기 전에는 사냥이나 채집에 성공한 날만 허기를 달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은 쫄쫄 굵었습니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하고도 비가 제대로 오면 겨우 배를 채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흉년이 들면 여지없이 굶는 날이 많았습니다. 더욱이 기르는 가축을 쉽게 잡아먹기 어려워, 탄수화물을 제외한 나머지 영양소 부족은 더욱 극심한 상태였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세포가 미래를 위해 에너지를 저장해놓는 것은 말 그대로 사치였으며, 에너지 저장 관련 유전인자는 필요성이 높지 않아 몸에서 천대받았을 겁니다. 대신에 당장 굶주림의 스트레스에 대항하기 위해 소비를 지향하는, 즉 저장된 글리코겐glycogen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유전인자가 환영받았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 몸에는 혈중 포도당을 높이는 여러 가지 호르몬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내분비 장기가 신장에 얹힌 모자 같은 모습의 부신입니다. 부신은 수질(속질)과 피질(겉질)로 구성돼 있는데, 각각 단기 및 장기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부신수질은 시상하부에서 시작한 교감신경이 척수를 거친 후 정보를 전달하는 곳으로, 해부학적으로는 교감신경 형태의 신경계 같지만 호르몬을 분비하는 것을 보면 내분비계 같은 둘의 중간 단계 모습을 떱니다.

부신수질에서 분비되는 에피네프란린epinephrine과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은 단기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호르몬으로 탄수화물의 저장 형태인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분해해 혈당치를 높이며, 심장 기능을 촉진시키고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올립니다. 이와 더불어 호흡률과 대사율까지 증가시키는데 이러한 일련의 반응은 사냥감을 잡거나 포식자로부터 도망가는 등 흥분 상태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기여합니다.

여러분은 화를 잘 참는 편인가요? 최근 화를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서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빈발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거나 공격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위협하는 사람은 화를 낼 때는 폭발적으로 격한 감정을 보이다가, 곧 이어 희열에 가까운 만족감을 느끼고, 화가 풀린 이후에는 스멀스멀 찾아오는 후회나 공허함 등으로 힘들어합니다. 화를 낼 때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빨라지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에피네프린과 노르에피네프린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르몬이 그렇듯 이 두 호르몬도 분비된 뒤 효소에 의해 순식간에 분해되어 10~20초 정도면 원래 수준으로 되돌아갑니다. 따라서 화가 나더라도 호르몬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인 10~20초만 참으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참을 인자를 3번 쓰란 옛 어른들의 말은 결국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10~20초 정도 사이에 화는 사라질 테니까요. 조상들의 경험적 지혜가 느껴집니다.

혈당량을 증가시키는 호르몬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는 장기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호르몬으로, 부신수질호르몬보다는 조금 늦게 반응하지만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혈당량을 증가시킵니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글루카곤ghucagon 역시 저장된 글리코겐을 분해해 포도당을 만듦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혈당량을 증가시킵니다.

성장호르몬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아미노산을 단백질로 세포 내에 저장해 개체를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탄수화물 대사를 보면, 스트레스호르몬과 같이 저장된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만들어 혈당량을 증가시킵니다. 갑상선호르몬도 뇌 발육과 올챙이에서 개구리로의 변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성장에 관여하지만, 체온을 올리거나 대사율을 증가시키는 작용과 함께 혈당량을 높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열거한 대로 우리 몸에서는 혈당량을 높이려는 호르몬이 여러 가지 분비됩니다. 혈당량을 높이는데 여러 호르몬이 관여한다는 것은, 어느 호르몬 하나가 잘못되더라도 다른 호르몬이 대신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혈당량이 낮아지는 것을 막겠다는 우리 몸의 속셈입니다.

반면 혈중 포도당을 글리코겐 형태로 세포에 저장해 혈당량을 낮추려는 호르몬은, 우리 몸에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혼자 고군분투하는 인슐린뿐입니다. 인슐린은 포도당과 함께 아미노산과 지방산을 세포 내에 저장해 각각 단백질과 지방을 만들려는 알뜰한 엄마 같은 호르몬입니다. 저축하는 기능은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나갈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을 인슐린이 혼자 다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슐린에 문제가 생기면 혈당량을 낮출 수가 없어서 치명적인 병, 당뇨병에 걸리게 됩니다. 당뇨병은 영어로 ‘diabetes mellitus(디아베이츠 멜리투스)라 하는데 어원을 따져보면 ‘sweet urine(스위트 유린, 단 오줌)을 뜻합니다. 혈당량이 높아서 소변으로 포도당이 나오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인슐린과 같이 혈당랑을 낮추는 호르몬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현재 인류가 내분비질환 중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고 있는 당뇨병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흥식 고려대학교의과대학교 교수
나흥식 고려대학교의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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