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 훔친 아이가 경찰서장이 되기까지의 인생 60년 풀스토리

“제복을 벗은 지금 내가 할 일은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는 것”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

글을 열며

우리나라 역사상 신생아가 가장 많이 태어난 해인 1960년 어느 봄날, 서산시 고북면 신상리 한 농가에서도 우렁찬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이 집안에서의 첫 아이 탄생은 기다림의 축복이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무려 1년 동안 1006,018명이 세상에 발을 디뎠고 그 속에 오늘의 주인공 전 서산시경찰서 김택준 서장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분들은 훗날 대한민국을 일으킬 수 있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주셨다.

격변의 시간을 건너온 60년생 김택준 전 서산경찰서장의 60년 인생을 들어보았다.

하늘나라로 간 남동생을 그리워하며...

김택준 전 서장의 부모님은 허리 펼 날 없는 전형적인 농부였다. ‘이 힘든 세상에 내 자식만큼은 나보다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열망으로 당신들은 비록 허리가 부서질지언정 자식들에게는 삽 대신 펜을 들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세상에 난 해에는 잊을 수 없는 4·19사건 등 한국 정치의 격변이 일어났고, 학창시절에는 1·2차 석유 파동이 일어 퍽퍽한 삶의 여정을 걸어야 했던 시기였다.

21녀 중 장남인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은 기자와 만나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도 이따금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잇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남동생때문이었다. “그날의 비보만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전기에 데인 듯 찌릿하다.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이 5년 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문득문득 보고 싶을 때면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어린시절 공부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는 그 동생과 함께 당신들을 도와 드리기 위해 무논으로 갔던 일, 일은 커녕 옷만 잔뜩 버리고 모질게 혼났던 사건, 때로 동생과 만나 이런저런 추억담을 얘기하며 한 번씩 웃곤 했던 기억들 등,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는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

흐릿한 추억들 한편에 느릿한 속도로 기억의 페이지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반복할 때마다 등장하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지금은 고인이 된 남동생, 그리고 두 딸을 키우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열 살 터울의 여동생.

그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며 먼저 간 동생을 그리워했다.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이 해어졌을 경우 다시 새것을 얻을 수 있으나, 수족이 끊어지면 잇기가 어렵다.”

학창시절 싸움꾼으로 불리다!

격동의 나라 사정이 아슬아슬했던 것처럼 전 서산시경찰서 김택준 서장의 유년시절도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그의 입을 빌자면 일상이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행정구역상 서산군 고북면이었지만 생활권이 해미면이다 보니 해미초등학교와 해미중학교를 다니며 주로 해미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그곳 아이들이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해미를 가기위해 걸어 걸어서 가면 왜 우리 지역에서 얼쩡거려라며 남시끼다리(지금의 해미다리) 앞에서 입구를 건너가지 못하게 다리를 막는 날이 일상화되었다. 텃세가 정말 심했다는 그는 하물며 다른 에서 왔다고 왕따를 시키기도 했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왕따에 대항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허구한 날 싸움질을 했다는 김서장. 지금도 동창이나 선·후배들은 나를 싸움꾼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훔친 호떡값을 지불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 나서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 배가 고팠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늘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날도 기름이 좔좔 흐르면서 달콤하고 고소한 호떡집 앞을 친구들과 함께 지나게 되었다. 인상 좋으신 할머니가 쫄깃쫄깃하고 뜨거운 그놈을 구워 바로 앞에 수북이 올려놓고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 먹고 싶어 주머니에 돈도 없으면서 친구들과 호떡 파는 할머니네 가게로 들어갔다. 연세가 들어 관절이 좋지 않아서인지 늘 앉아서만 호떡을 굽던 할머니는 예의 몇 개 줄까?”라고 물었고, 그와 친구들은 사는 척하면서 눈앞에 있는 호떡을 들고 냅다 도망쳐 나왔다. 할머니가 쫓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며 골목에서 친구들과 맛있게 나눠 먹던 호떡. 하지만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호떡이 이날까지도 가슴에 맺혀있을 줄이야.

그는 장발장은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5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호떡을 훔친 죄로 몇십 년을 늘 할머니께 죄스러운 맘으로 살았다. 아마도 내 직업이 그래도 명색이 도둑을 잡는 경찰인데……. 핑계 같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아 찾지 못하다가 서산경찰서장으로 부임해오면서 제일 먼저 호떡값을 지불하기 위해 예전 그곳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찾을 길이 없었다. 망설이다 때를 놓친 것인데 지금도 마음이 불편하다며 죄스러운 맘을 표현했다.

당진경찰서장 재임시 교황방문 대비 현장점검
당진경찰서장 재임시 교황방문 대비 현장점검

 

당시 경찰은 상당히 인기직종이었다

20년 전 큰 울음소리와 함께 파란만장한 학창시절을 마치고 드디어 나라의 부름을 받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일 그때 그는 건장한 청년이 되어 전투경찰에 들어갔다.

기자가 왜 경찰에 지원했냐?”고 묻자 그는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지 않냐고 웃으며 떠보자 솔직히 말하자면 주위에서 현역은 군기도 세고 사고도 많다고 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경에 원서를 넣었고, 사실 또 전경으로 가기 위한 체력도 자신이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경이 당시 사회분위기로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웃음)”고 말했다.

제대가 다가올 무렵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던 차, 그의 부친 친구분이 간부후보생에 합격하여 서울 경찰청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희망을 얻었다. ‘그럼 나도 간부후보생이 되자!’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여 1984년 간부후보생에 합격하여 경찰생활 35년을 무사히 복무했다.

45일 만에 결혼에 골인

직업도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겠다, 이제 슬슬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가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1986216, 추운 겨울에 만나 사랑을 싹틔운 정명화 씨와 첫 만남 이후 45일 만에 결혼에 성공했다.

원래 결혼은 경감 승진 후 서른 살 정도에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옆구리가 시리기도 했지만 이사람 정도면 서로 마음 맞춰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유난히 마음이 가기도 했고. 어쩌면 그게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쌍둥이를 두었다는 그는 현재 두 딸은 사랑을 찾아 날아갔고 아들은 아직 미혼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초록맞이 서산경찰서장과 함께 서산소통 오찬 Day
초록맞이 서산경찰서장과 함께 서산소통 오찬 Day

 

여론조사로 탄생한 친절도우미경찰탄생

기자가 경찰 재임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뭐냐?”고 묻자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론조사라고 말했다.

서산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전, 서산시민의 여론을 조사해봤다. 서산시민 80% 이상이 단속보다는 계도와 홍보를, 또 친절한 경찰을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경찰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는 친절하고 따뜻한 가족 같은 도우미로 국민 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나는 여론을 토대로 부임 즉시 친절도우미 경찰관을 현관에 배치하여 안내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자 경찰서를 찾는 민원인들 대부분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경찰에 대한 막연한 불친절과 경직 등을 예상하고 왔는데 친철도우미 경찰관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기분좋은 하루는 물론 경찰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말씀 하시더라. 정말 뿌듯했다.”

그는 그날의 모습들이 떠오르는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있었던 당시 에피소드들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시민을 보면 내 조상같이, 내 부모같이, 내 형제같이 친절하게 대하라!’

친절도우미경찰탄생과 동시에 시민들이 원하는 단속보다는 계도와 홍보를 하라는 것을 접하고 그 즉시 교육이 이뤄졌다. 골자는 주로 교통단속과 노래방단속, 음주운전단속 등을 계도와 홍보 위주로 바꾸는 내용이었다. 또한 상대적빈곤층과 택시기사, 물차 및 봉고차기사, 영세노래방, 외지에서 우리 지역인 서산을 방문하는 자가용, 영세음식점, 담뱃가게, 농사짓는 어르신들 등에게는 절대 단속을 하지 못하게 했다.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음주단속을 하지 않았더니 대리운전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당시에는 그를 욕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욕을 하던 그 친구가 지금은 너 서장 할 때(20177~2019117)가 사건사고가 더 적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더라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설마 그렇게 해서 줄어들었을까마는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 시민들의 법규준수의식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사고도 줄어들고 대리운전도 스스로 해나가서 그렇게 된 거라고.”

당시 그는 직원들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직원들은 업무처리 시 민원인들을 조상같이, 내 부모같이, 내 형제같이 친절하게 대해달라!’ 김택준은 직원 여러분이 일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아주고, 여러분이 일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의해주는 카운슬러 역할을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풍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다.

그 결과 서산경찰서 역사이래 처음으로 성과평가에서 충남1위를 했다. 개인적으로 평가해봐도 재임기간 중 서민시민의 경찰에 대한 이미지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복은 벗고 일상으로 돌아온 김택준 전 서장
제복은 벗고 일상으로 돌아온 김택준 전 서장

 

말을 마치며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은 지난해 20191231, 35년의 경찰직을 수행하고 제복을 벗었다. 아주 호탕하고 재미있게 인터뷰를 마친 그에게 기자는 앞으로의 마음가짐에 대해 묻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간이 널널하다. 시민들이 부르시면 언제 언제서든 한달음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작금의 상황들이 워낙 좋지 않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고, 인구 정체와 소상공인들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오늘도 자영업자를 만났는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라.

어떤 일이든 거뜬히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작은 힘이지만 그분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가장 뜨거웠던 40대에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의 허리 역할을 담당했고, 50대에는 또 격변의 상황을 아우르는 리더이자 버팀목 역할을 다한 지금의 60년생들 속 전 서산경찰서 김택준 서장, 근현대 60년을 알차게 살아온 그에게 기자는 서산시민을 대표하여 고생했다는 말을 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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