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 2023년 설립목표...문학관 건립을 위한 타당성 연구 용역 최종 보고회 가져

특집서산문학관 설립으로 본 서산문인들

지난 8일 서산시청 중회의실에서 (가칭)서산문학관 건립을 위한 기초조사 및 타당성 연구 용역 최종 보고회가 열렸다.

서산시가 (가칭)서산문학관 건립에 첫 발을 내딛었다.

시는 8일 시청 중회의실에서 지역 문학단체와 전문가, 시의원, 관계 공무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가칭)서산문학관 건립을 위한 기초조사 및 타당성 연구 용역'의 최종 보고회를 개최했다.

보고회는 충남산업경제연구원(이하 연구원)이 서산시의 의뢰를 받아 진행됐다.

연구원은 보고회에서 지난해 11월 시민 4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서산문학관이 매우 필요하다 71(17.8%), 필요하다가 153(38.3%)으로 과반을 넘는 56.1%가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밝혔다.

, 서산문학관이 건립했을 때 259(64.8%)이 방문 의사를, 방문 목적으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가 83(23.3%)로 나타났다. 서산문학관의 건립지로는 폐교된 해미면 반양초, 잠홍야구장이 있는 잠홍동 시유지, 공공시설이 밀집한 읍내동, 석남동 공동묘지 개발지구, 동문동 창업지원센터 인근, 윤병석 시인 고택이 있는 운산면 등 6곳이 후보지로 조사 됐다. 서산문학관의 총 사업비는 757000만 원으로 준공은 2023년 목표다.

한편, 서산시는 역사의 인물 최치원, 정인경, 오청취당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문인은 27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윤곤강과 민태원, 윤석중 등 근·현대 문인이 37명에 달한다.

시 한 관계자는 이번 최종 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서산문학관 후보지로 다양한 의견을 냈다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곳곳에 산재 돼 있는 귀중한 문학자료와 유산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지역 문인들의 창작 활동 활성화를 위한 서산문학관 건립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서산문인에 누가 있나?

최치원 사당_부성사

 

최치원(崔致遠:857~?) =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조차 격황소서(擊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885년 당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으며,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을 편찬하였다.

887(진성여왕 1)에 비로소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부임하여 893년 진성여왕이 하정사로 삼아 당에 파견하기 전까지 7년 동안을 재임하였다. 특히 최치원이 오랜 기간 동안 부성군의 지방관으로 머무른 데에는 신라 왕실에서의 특별한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서산 일대는 서해안에 접경하여 당과 교류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고, 당시 국제적인 인재로 활약했던 최치원의 교량적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이다.

서산에는 아직도 최치원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최치원이 치성(治城) 또는 진성(陳城)으로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는 부성산성(富城山城)과 집무를 보았다고 전해지는 관아 터, 옥터밭[獄地田]이 있다. 또 최치원이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지는 서광사(瑞光寺), 가야산 산중 용현리에 강당을 마련하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강당골 등이 그것이다. 한편 그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부성사(富城祠) 내에는 그의 과선각(過仙閣)’ 현판도 보존되어 있다.

최치원은 문학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후대에 숭앙되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사륙집(四六集)> 등의 시문집은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지만, <계원필경(桂苑筆耕)><동문선(東文選)>에는 그가 쓴 시문(詩文)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등 이른바 사산비문(四山碑文)’<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4·6 변려문(騈儷文)을 즐겨 썼으며, 문장이 평이하면서도 고아(高雅)한 품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의 저술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인경(鄭仁卿:1237~1305) = 정인경은 서산 정씨의 시조 정신보(鄭臣保)의 아들로 고려시대 무신이며 원나라와 외교를 전담한 탁월한 외교관이다. 고려 후기 정인경의 부친 정신보가 중국 송나라에서 서산의 간월도로 망명하여 정착하였고 정인경은 간월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여 무관이 되었으며 고려 고종 말엽에 몽고군 침입시 직산, 신창 등지에 주둔하는 몽고군을 야음을 틈타 습격하여 큰 공을 세워 관직에 나가 제교(諸校)가 되었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치며 본연의 임무를 다하다 상을 당하여 고향 서산으로 되돌아온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 1269년 충렬왕(忠烈王)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충렬왕을 호종하였고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에 이른다. 이에 관직이 금오위정용장군(金吾衛精勇將軍)을 거처 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軍簿判書春宮翊衛判典)에 이르게 된다. 이 때 왕으로부터 서산을 본관으로 하사 받고 서산 정씨가 된다.

학문적으로는 정신보는 고려에 송나라의 학문인 성리학을 전파했고, 고려 충렬왕은 부성현 출신 양렬공 정인경이 국가에 끼친 공로를 인정해 100여년 동안 관호가 없이 내려오던 부성현을 상서롭다는 의미를 넣어 서산군으로 명명,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충렬왕 141288년에는 세자원빈(世子元賓)이 되었으며 또한 원나라로부터도 그의 공을 인정받아 공신(功臣)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그의 타계를 매우 슬퍼하며 왕은 그에게 시호를 추서하는데 그의 시호가 다름 아닌 양열(襄烈)이다. 서산 류()씨와 더불어 서산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고장 서산의 대표적 성씨로 서산 정씨 자손들에 의해 아버지 정신보(鄭臣保)와 함께 매년 제향을 모시고 있다.

오취성당 시비

 

오청취당(吳淸翠堂:1704~1732) = 오청취당(吳淸翠堂·1704~1732)은 경기도 안성의 속현인 양성현, 곧 오늘날의 평택 포승에서 해주오씨 오기태의 딸로 태어났다. 22세 때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경주김씨 김한량(金漢良·1700~1752)과 혼인하여 29세에 요절하기까지 서산의 여성으로 살았다. 청취당의 7년 동안의 혼인생활은 182수의 한시로 남아 청취당집(淸翠堂集)’으로 엮였다. ‘청취당집1803년에 외손 박종규(朴宗圭)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청취당 사후 70여 년 만의 일이다.

오청취당은 두 자녀를 차례로 잃고,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틈틈이 시를 쓰며 달랬는데, 규방에 갇혀 살아가는 여성의 고뇌,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인생의 희로애락, 규중칠우와 문방사우 등을 소재로 자신의 꿈과 현실, 이상 세계를 노래하였다.

오청취당은 182수의 한시를 남겼다. 그중 병중에 회포를 펴 스스로를 위로하며는 자서전이자 강보에 싸인 아들에게 남긴 유서 같은 시다.

1732515. 동국(東國)의 계수나무로 자부하였던 고독한 천재 여성시인 오청취당. 그녀는 외아들 김언주(金彦柱)를 낳고 유통(乳痛)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평소 그토록 동경하였던 신선의 세계로 선인(仙人)이 되어 날아간 것이다.

윤곤강 시비

 

윤곤강(尹崑崗:1911~1950) = 서산시 동문동 77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 윤정학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는 등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였다. 13세 때 이용완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상경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28년 혜화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5개월 만에 자퇴하고 1930년 일본 센슈대학으로 유학하였다. 이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고 시인춘추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33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934년 제2차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관련자로 구속되어 전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1936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첫 시집 대지를 냈다. 이후 시작에 전념하여 많은 작품을 썼다. 1946년 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1948년 중앙대학교로 옮겼다.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작 활동을 병행, 피리, 살어리등 여러 권의 시집과 평론집을 냈다. 1950년 신경쇠약으로 인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곤강의 시 세계는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다 해방 후 민족어의 회복과 민족 정서의 탐구로 문학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1936년에 광풍, 대지등 다수의 시를 발표하였다. 첫 시집 대지를 비롯하여 만가[1938], 동물시집[1939], 빙화[1940], 피리[1948], 살어리[1948] 등의 시집과 평론집 ()와 진실(眞實)[1948]이 있다. 시론으로는 포에지에 대하여[1936], 표현에 관한 단상(斷想)[1936], 이데아를 상실한 현조선(現朝鮮)의 시문학[1937], 시와 현실의 상극(相克)[1937] 등이 있다.

19934월 윤곤강의 생애와 문학을 기리는 윤곤강 시비가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서산시 문화회관 옆에 건립되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제주조각공원과 시인의 모교이자 교사로 재직했던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등학교 교정에도 기념비가 있다.

민태원 시비

 

민태원(閔泰援:1894~1934) = 서산시 음암면 신장리에서 태어난 우리나라의 대표적 언론인이자 문인으로 교과서에 실린 그 유명한 수필 청춘! 이는 듣기만하여도 가슴 설레는 말이다.”로 잘 알려진 청춘예찬의 저자이다. 1894년 부친 민삼형 공의 51녀중 4남으로 태어나 4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호는 우보(牛步), 16세에 상경하여 경성관립고등보통학교(경기고의 전신으로 한성고등학교, 경성고보 등으로 학교명이 변경됨)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매일신보 기자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 정치부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와 중외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그가 중외일보에 쓴 사설 직업화와 추화가 문제되어 발생한 중외일보 필화사건으로 기소되어 3개월의 징역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우보 민태원은 우리나라 근대 언론의 초창기에 활약한 대표적 언론인이지만 그에 대한 연구물이나 후손들에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그의 조부가 산청현감을 지내신 분이라서 주변에서는 그의 집을 민산청댁으로 불렀고 어려서는 제도화된 근대교육을 받지 못하고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등의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하여 경성관립고등보통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후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하고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본격적인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호 우보(牛步) 또한 언론과 연관되어 얻은 것으로 언론의 특성상 민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 걸음처럼 행동이 느려서 붙여진 별명이 우보이고 그가 이를 자신의 필명과 자신의 호로 채택하여 쓰게 됨으로 해서 우보(牛步) 민태원이 된다.

해미에서 서산시내로 들어오는 4차선 길목의 서산시와 음암면의 경계 부근 도로가에 우보 민태원과 청춘예찬을 기념하는 표석이 홀로 서서 말없이 그의 고향임을 알려주고 있다.

윤석중

 

윤석중(尹石重:1911~2003) = 본관은 파평. 호는 석동(石童). 아버지는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윤덕병(1885~1950)이고 어머니는 조덕희다. 부인은 박용실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다. 윤석중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형제들도 일찍 죽어 외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이름도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에서 석중(石重)으로 지었다고 한다. 외로운 환경 탓에 일찍 자아에 눈을 떴고, 유년 시절 풀지 못한 수많은 의문이 훗날 어린이를 위한 시를 짓고 문화 운동을 펼치는 자양분이 되었다. 윤석중은 1921년 열 살에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초등 교과서에 실린 일본 노래 봄이 왔다[]에서 모티프를 얻어 우리말로 된 시 을 썼다. 이 시가 신소년에 실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인정받았다. 1923년 심재영(沈在英)꽃밭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창간하였다. 심재영은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沈熏)의 조카이다.

1925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어린이잡지에 오뚝이가 입선되어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같은 해 8월 동인회 기쁨사를 만들어 등사판 잡지 기쁨1년에 네 차례 출간하고, 굴렁쇠라는 회람 잡지도 만들어 동인들끼리 돌려 보았다. 굴렁쇠는 두꺼운 표지에 회람 잡지 굴렁쇠라 쓰고 회원들이 지은 동요와 글동무들에게 알릴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넣어서 편집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어린이의 부록인 어린이 세상을 맡아 꾸렸다. 그 인연으로 개벽사에 드나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방정환(方定煥) 등과 함께 일을 하였다. 이후 한층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1929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윤석중은 여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졸업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5년 동안 다닌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이듬해 짧게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19327월 첫 창작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을 출간하였다. 193335편의 동시를 실은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발간하고, 방정환을 대신하여 어린이잡지의 주간이 되었다.

1935년에 황해도 사리원에 사는 박용실과 혼인을 하였다. 결혼식 주례는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 여운형(呂運亨)이 섰다.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옮겨 어린이 잡지 소년의 편집을 맡았다. 국내 최초의 그림 잡지 유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가 동경 상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후, 벨기에인 고라르 신부를 도와 우리말 잡지 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인 주간 소학생을 창간하고 어린이날 노래를 지었다. 졸업식에서 불리는 졸업식 노래도 윤석중의 작품이다. 가사 중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부분은 마음의 꽃다발을 생각하며 쓴 것인데, 이후 졸업식장에 그렇게 많은 꽃다발이 등장할 줄 몰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편 윤석중은 6.25 전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부친과 계모가 서산시에서 우익 세력에게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계모의 부친이 북한군 점령 기간 중에 서산에서 요직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윤석중은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이 있는 서산으로 피난오려고 했으나, 부친이 '전쟁 통에는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 산다'며 만류해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또다시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그는 이듬해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차리고 두 차례에 걸쳐 어린이를 대상으로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이란 주제의 글을 모아서 책을 펴냈다. 어린이의 글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54년에는 윤석중 아동연구소의 이름을 새싹회로 바꿔 새로 창립하고 합창단과 합주단, 글짓기 교실 등 어린이를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957년에는 소파상을 제정하고 새싹문학을 창간하였다. 이 책은 2011년 현재 115호까지 발행되었다. 윤석중은 스스로를 노래 나그네라고 부르며 어린이를 위한 삶을 살다가 2003129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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