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남매 소녀가장, 형제가 많다는 건 자랑이니 지금부터는 당당해져라!

막내동생은 제게 ‘언니엄마’라 부르고 남편을 ‘형부아빠’라 불러요~

삼성생명 충남서부지역단 정미란 CA
삼성생명 충남서부지역단 정미란 CA

#프롤로그

가난하면서 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님에도 먹을 것이 없어 빈 도시락과 수저만 들고 등교했다면 과연 당신은 믿을 수 있을까? 가난이란 아이는 부잣집을 질투하기에 앞서 그 부러움을 감추기 위해 씩씩함과 용기로 마음을 대강 덮고 지냈던 건 아닐까.

오늘 서산시대에서 만난 정미란 CA는 가난 때문에 대나무처럼 꼿꼿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혹여 대쪽같은 그 강한 마음이 꺽일까봐 늘 당당한 캔디인 척  마음 다잡은 소유자였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당시 이 노래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기도 했다는 정미란 CA.

어느 글에서는 주머니가 가난해지면 마음도 가난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여유조차도 사치에 불과했으니... 어린 동생들이 비비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에 더 익숙한 정 CA는 인터뷰이로서 시종일관 솔직·담백·명랑함을 보여주었다.

 

#술에 취한 아빠를 피해 걷는 밤길이 차라리 내겐 행복이었다는 정미란 CA

식구들이 많다많다 하지만 제 나이또래에 형제가 11남매라고 하면 다들 입을 딱 벌려요. 그중 제가 중간치죠. 아빠는 뭣이 그리 불만이었는지 그렇게 술에 취해 우리 자식들을 괴롭혔는데 억울하게도 위로 5남매는 전부 외지로 나가고 남은 우리 6남매만 죽어라 당했지 뭐예요.”

그녀는 만나자마자 두르고 온 머플러를 벗어 소파에 걸치며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기자는 어느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 그녀에게 아빠가 주정하시면 엄마가 말려주지 않았냐?”고 묻자 피식 웃으며 당연히 엄마는 어린 자식을 보호하려 했죠. 그런데 일명 술주정뱅이 아빠를 어떻게 말리겠어요. 그럴수록 더 심해지곤 하는데.

맞기도 참 많이 맞았어요. 그나마 행복했던 건 술 받아다 달라는 아빠 말씀이 더 좋았다니까요(웃음). 잠시라도 피신을 할 수 있잖아요. 상상이 가세요? 여자애가 주전자 하나 달랑 들고 종종걸음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거리를 걷는 거. 그런데도 매를 맞는 것 보단 얼른 사다 드리는 게 나았으니 말 다했지요 뭐.”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그녀는 한겨울 지지리도 매섭게 불던 바람을 맞으며 왕복 1시간 20분 거리를 느적느적 걷다가도 어느 순간 남은 동생들이 혹시 맞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면 눈 속에 발이 푹푹 빠져 드는 것도 잊고 뛰어가곤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술을 받아다 드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빠 곁에서 동생들과 함께 아빠가 주무실 때까지 주물러 드렸습니다. 우리 아빠 술 주사는 또 어찌나 말로 푸시는지 우리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다 듣고 있는 척 했다니까요. 밤은 왜 또 그리도 길고 어둠은 또 왜 그렇게 진했던지....”

부모님 모습(아기는 첫째 오빠)
부모님 모습(아기는 첫째 오빠)

#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엄마의 자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빠가 소위 술주정뱅이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엄마가 우리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셨을 때 까지는요. 엄마 나이 49, 저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엄마 배가 불러왔기 때문에 12번째 아기가 태어나는 줄 알았어요. 당연히 병원에서도 임신이라고 말씀해주셨고요. 막내가 겨우 세 살 되던 해, 엄마는 유산을 시키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가 뱃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 아기가 아닌 폴립성 암이였던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겨우 16살 중학교 3학년, 그렇게 엄마는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자리했기 때문이었던 걸 뒤늦게야 깨달았지요. 우리 남매에게는 하루아침에 하늘을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지만 저는 마냥 울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말똥말똥 저만 쳐다보고 있는 어린 동생들 때문이었죠.”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얘기를 했지만 기자는 알았다. 처음과 달리 자꾸만 갈라져가는 음성 속에 엄청난 슬픔이 묻어나는 걸.

히터에서는 소리없는 따뜻함이 흘러내렸지만 우리 좌석에는 헛헛한 바람만 연신 돌아왔다.

 

# “원장님 동생들과 같이 살아야 되니 나 학교 가르쳐라!”

그녀는 흔히 말하는 사춘기였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그저 먹고 사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그런 단어들은 그녀에겐 사치에 불과했다.

정미란 CA는 엄마를 땅에 묻고 울고있는 동생들을 뒤로한 채 엄마를 진료했던 병원으로 달려가 이런 말을 했단다. “원장님 아무것도 묻지 않겠으니 나 학교 가르쳐라. 내 동생들과 같이 살려면 나는 서산에 있어야 된다. 산업고 야간반에 들어 갈려면 동생들은 누가 책임질거냐! 그러니 원장님께 등록금 지원받아 나 학교 다녀야겠다. 내가 여상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만 달라!’고 했고 결국 원장님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지금생각해도 당돌한 계집애가 옹골차게 찾아와 얼굴 똑바로 쳐다보며 말 하는데 원장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뭐 저런게 다 있나싶었겠죠(웃음).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말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느날 깨어나 보니 문득 소녀가장이 되어있었고,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병원 원장과 타협을 본 정미란 CA. 기자는 입만 벌리고 앞에 앉은 정 CA를 멍 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 나는 소녀가장, 그 의미보다 두려운 것은 춥고 배고팠던 현실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녀가장이라고 불렀다. CA는 의미의 두려움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던 사실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도시락을 한 번도 사가질 못했습니다. 동생들 도시락 사주고 나면 제 것이 없었거든요. 빈 도시락 하나와 젓가락 한 모를 가방에 넣고 가서 점심때는 반 친구들에게 한 숟가락씩 음식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그래도 참 당당했어요. 기막히게도 구김살 하나 없었거든요. 참 눈물나는 얘긴데 암튼 그때는 그랬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겨우 저는 고등학생이잖아요. 제 자신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스스로 생각하면 너무 가여웠는데 마음이 녹아버려서인지 덜 아팠던 것 같아요.”

소풍 때가 되고 수학여행 때가 되면 그녀는 병원으로 달려가 돈을 받았고 그때마다 표정없는 얼굴의 원장은 의무적으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며 열심히 하라고 했다. 기자는 웃으며 용돈도 챙겨주더냐?”고 물었으나 딱 학교에 낼 돈만 줬다며 악연이든 어떻든 그분 덕에 졸업을 하고 당당히 이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하지 않냐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미란 CA 친구 김미옥(조한기 후보 고종사촌)
정미란 CA 친구 김미옥(조한기 후보 고종사촌)

# 드디어 고등학교 졸업식,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도 그리웠던 그녀

하지만 그렇게 씩씩하던 그녀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 울음 때문에 그녀는 한 달 동안이나 목이 쉰 채로 살아야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부터 내내 밝던 얼굴이 갑자기 그렇게나 슬픔으로 가득 찰 줄이야.

3년 내내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 많은 운동장 속에 그녀를 축하해주러 온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그녀는 절망했다. 한복은 이웃집에서 빌려 입었다지만 엄마가 서야 할 자리에 엄마가 없다는 현실은 어린 그녀에게도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때 수양딸처럼 챙겨주던 친구 미옥이(조한기 후보 고종사촌) 엄마가 혼자 서서 막막해하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울고 싶은데도 꾹 참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와 꼭 안아주면 그만 엉엉 울어버린다는 말 아시죠? 제가 그랬습니다. 억지로 참고 있는 제게 평소 친딸처럼 챙겨준 미옥이 아줌마의 꽃다발은 제 눈물 샘을 자극하고도 남았으니까요. 그게 더 슬펐습니다. 정말 더 슬펐어요. 하루 종일 울었는데도 어디서 그 많은 눈물이 숨어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흘려도 흘려도 끝없이 흐르더군요라며 또 다시 그때의 일이 생각난 듯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3남매의 엄마가 되고 커리어우먼이 돼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 없는 다음에는 애들 문제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했다고 한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도 내가 엄마없이 컸는데 우리 애들만큼은 절대로 엄마의 빈자리를 보여주면 안 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자리 지켜서 잘 클 수 있도록 끝까지 뒷바라지는 해줘야지라고 각오했다.

생명 충남서부지역단 정미란 CA와 남편
생명 충남서부지역단 정미란 CA와 남편

# 4살 많은 남편을 만나 안정을 찾았다.

그렇게 그녀는 슬픈 졸업식을 했고, 21살 이른 나이에 외숙모 소개로 25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동안 술로 지지리도 그녀를 고생시킨 아버지는 처음으로 딸을 보내며 참 많이 우셨다고 했다. 아마도 소녀가장으로 있었던 딸의 인생이 가여워서, 그게 또 미안해서 그랬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그녀는 당시 아버지의 사진을 갤러리에서 보여주었다.

아빠 손을 잡고 식장 들어갈 때 (아빠)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제가 속삭였습니다. ‘잘 산다고 아빠.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 아빠는 신랑에게 제 손을 건네주고 돌아가면서 또 그렇게 우시더군요.”

정미란 CA는 어렸을 때 너무 슬픈 일을 겪어서 인지 지금은 전혀 어려운 게 없다고 했다. “엄마 돌아가시는 장면도 봤고 돌아가셔서 34일 동안 울기도 했고, 그 다음해 엄마 제삿날까지 목이 쉬었던 적도 있고... 그때 결심했던 것이 나는 결혼하면 절대 우리 애들만큼은 엄마없이 안 키울거야. 나는 애들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며 오래오래 같이 살거야.”

약속대로 그녀는 자녀들에게 하고싶은 모든 것을 밀어주는 엄마로 유명세를 날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정미란 CA가 자녀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서면 무남독녀(無男獨女)? 무매독자(無媒獨子)?”고 물었단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 아팠던 경험 때문에 애지중지 자식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 어린동생과 자식을 위해 사회로 뛰어든 정미란 CA

기자는 애들 뒷바라지하면서 언제 또 직장생활을 했냐고 묻자 그녀는 결혼 3년차에 교통사고를 당한 시아버님이 코마상태(혼수상태)2년을 병상에 계실 때, 그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남편에게는 큰소리 땅땅 치며 백만 원 벌 자신 있다. 나는 어린 동생들도 키워야 되고 우리 애들도 키워야 되니 일 할 거다라고 했단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아득바득 일한 대가로 동생들을 키웠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우리 애들도 같이 커 나갔더라며 그녀는 다시 종전의 밝은 미소를 되찾아 해맑게 웃었다.

기자는 그녀에게 물었다. “다시 어린시절 그때로 돌아가라면 돌아갈 자신이 있냐?”. 그녀는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며 그때는 어려운 걸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면 이제는 절대 못할 거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며 그때는 그게 기쁨이었다고 말한 정미란 CA.

비록 빈 도시락일지라도 힘들다기보다 난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며 그래야 동생들을 챙긴다는 것에 한치의 꿀림도 없었다는 그녀에게 기자는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첫째 오빠 환갑 때 11남매 모습
첫째 오빠 환갑 때 11남매 모습

# 형제가 많다는 건 자랑이지 부끄러움이 절대 아니야!

아무리 동생들을 사랑하는 정미란 CA였지만 형제들 때문에 속상했던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느날 수학 선생님이 제게 니네 형제가 몇 명이야?’라고 묻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부끄러워 그때는 9명일 때인데도 엄청 울었어요.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고 선생님이 미란아, 나도 9명이라 너무 똑같아서 물었던 거야. 나한테는 형제 많은 것이 정말 자랑이란다. 형제가 많다는 건 창피함이 아니야. 지금부터는 너도 당당해 졌으면 좋겠어. 우리처럼 형제가 많은 사람은 드물잖아.”

그날 이후부터 그녀에게는 가장 큰 자랑이 된 11남매. “아버지가 6대 독자예요. 그러다보니 우리에게는 현재 친척이 없어요. 그럼에도 아주 행복하게,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며 환하게 웃는 그녀가 그녀다워서좋았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도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한다. 나는 너무 외로웠다. 부디 너희들 끼리만이라도 잘 살아라였다는 그녀.

비단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지금 11남매로 인해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에필로그

기자는 그녀가 슬픈 얘기를 아주 재밌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우리 막냇동생 나이 겨우 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리고 그 아이 13세 때 아빠마저 돌아가셨죠. 제가 부모님을 대신해 그 아이의 진짜 부모가 되었답니다.

37살 전직 간호사였던 우리 막내는 제게 언니엄마라 부르고 남편을 형부아빠라 불러요(웃음).”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엄마가 자식을 걱정하듯 올해 소원은 임용고시 공부하는 막내가 부디 좋은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말하며 어두운 밤바람을 헤치며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거리에는 바람이 제법 포근했고, 기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 자리를 벗어났다.

7자매 떠난 여행
7자매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7자매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7자매가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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