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미 시인의 이야기가 있는 詩」
배추밭
찢어진 배추가 거적으로 깔린 밭
파헤친 땅속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정오
공짜로 뽑혀가는 배추포기
차곡차곡 포개지는 배추의 동맥
짓눌리는 혈관을 잘라내자
입 벌린 트렁크가 무시로 집어삼켰다
풀의 이슬로 흐느적거리는 걸음
거저라니 쇠도 집어삼킬 것만 같아
배추벌레가 꼬물거리는 이슬 고인 밭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의 이슬은 땅 위에서 말라 갔다
허기진 시간을 씹는다
<시작 노트>
김장철이다. 엄마의 호출에 빈 통을 들고 모두 모인다. 식구들이 모이기 전 엄마는 밤새 배추를 다듬어 절이고, 속에 넣을 재료를 준비해 놓으시느라 잠도 못 주무신다. 시끌벅적 한바탕 김장담그기가 끝나고 먹는 수육의 맛은 잊을 수 없다. 막걸리 한잔 있으면 더욱 훈훈하다. 해마다 이쯤이면 ‘배추 파동’ 이 생각난다. 배추 한 포기 값이 폭락하여 농부들은 저마다 트랙터로 밀어버리는 게 낫다며 배추 수확을 포기했다. 밭을 갈아엎던 모습을 보며 함께 아파했었는데... 어느 배추밭 주인은 지인들에게 직접 와서 공짜로 뽑아가라 했는데, 그 배추밭엔 자동차 바퀴 자국으로 아우성이었다. 농부의 눈물, 김장배추를 보면 자꾸만 그 생각이 나서 가슴이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