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영 약사의 『약』이야기-⑮

장하영 세선약국 약사
장하영 세선약국 약사

학부 시절 병리학(pathology)이라는 전공 기초과목이 있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 각종 질병에 관하여 배우는 과목이다. 교재 두께가 1500페이지에 달하고 근본적으로 암기과목이라 그 중압감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강의가 진행됨에 따라 내 암기력은 질식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밥 먹을 때마다 책을 펴놓았던 습관이 생겼던 거 같다.

오기가 생겼다. 어려운 과목은 즐기며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다. 신체의 장기마다 별명을 붙여주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쏠쏠하였다. 예컨대 위장은 엄살쟁이라고 하였다. 조금만 속 쓰리거나 아파도 과할 정도로 고통이 컸으니까. 소장이나 대장은 꾀병쟁이라고 하였다. 장 내용물이 조금만 움직여도 경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조퇴를 위한 핑계로 꾀병을 부렸다면 십중팔구는 아랫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심장질환은 예민이라고 하였다. 잠시만 두근거리거나 박동이 빨라져도 행여 몸에 이상은 있지 않은지, 생명엔 지장이 없는지 예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막염 같은 귀 질환은 멍멍이라고 하였다. 귀가 멍해졌기 때문이다. 관절염은 번개라고 하였다. 관절끼리 부딪힐 때마다 번개 치듯 시렸기 때문이다. 두통은 근심이라고 하였다. 머리가 아픈 사람 치고 웃는 사람 없다.

그렇다면 미련퉁이(미련곰탱이)’란 어떤 장기의 별명이었을까? 유치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길 바란다. 바로 간()이다. 그도 그럴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간이 우리 몸에서 하는 일은 규명된 것만 하더라도 5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관련 전문가라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간을 화학공장이라고 칭했는데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간이 많은 기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인체에서 꽤 큰 장기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효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엄살 부리지도 않고 꿋꿋하게 일하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기특하면서도 둔한 장기이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일 간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많이 아파서일 것이다. 다시 말해 간이 상당히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실 위장관이나 심장 같은 기관들은 조금만 아파도 금방 신호를 보내 초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장기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간질환 초기는 간에 지방이 쌓이면서 시작된다. 신체에 지방이 지나치게 많거나 간이 지방질을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 지방이 끼게 된다. 이를 지방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간에 염증이 생겨 간염으로 진행된다. 그래도 이 상태까지는 괜찮다. 적절한 치료가 수반되면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진행된다면 간 조직이 썩어버리게 된다. 소위 간이 굳고 위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간경화라고 하는데 손상된 간 조직은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는다. 더 진행된다면 간암까지 이르게 된다. 모든 간질환이 이런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것은 아니나 술(알코올)로 인한 간질환일 경우 대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임상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간질환의 상태는 보통 간염 이후이다. 간염의 초기 증상은 식욕부진, 소화불량, 피로감 등 비특이적인 증상이 대부분이다. 이때에는 다른 질환과 증상이 비슷하여 스스로 간염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으나 정기검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만일 간 손상이 계속된다면 황달, 복수 등 간질환만의 특이적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지체 없이 병원에 방문하여 적절한 진료를 받아야 한다.

간질환의 치료는 어떻게 할까? 일반의약품으로서 치료제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루사와 실리마린(밀크씨슬) 계열이다. 우루사는 빌리루빈 수치를 낮추는 목적으로 쓰이고 실리마린은 간염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어떠한 약을 선택하더라도 두 가지만은 꼭 기억하도록 하자.

첫째, 간장약은 단시간의 복용만으로 간질환에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복용하여야 그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둘째, 최고의 치료제는 충분한 휴식과 금주라는 점이다. 휴식은 충분한 수면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금주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금주는 못 해도 절주하는 습관은 갖도록 하자.

한 가지만 더 부연한다면 단백질 섭취도 간질환에 많은 도움을 주므로 식단관리에 참고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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