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우 / 서산 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서산(瑞山)지명 유래비(비문 전면)

서산시는 본디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다. 통일 신라 시기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엽에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이 부성군 태수를 역임하였다. 고려 인종 때 부터는 현(縣)이 되었다.
명종 12년(1182) 부성현의 현령(縣令)과 그 보좌관인 현위(縣尉)가 대립 갈등함으로써 현민(縣民)들이 봉기하여, 아문(衙門)을 폐쇄하고 현령과 현위를 감금했다. 무신정권은 부성현을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고을을(삭제 부분) 없애고 관호(官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 10년(1284)에 부성현 출신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瑞山鄭氏始祖)이 국가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시켰다. 102년 만의 복군(復郡)이었다. 정인경은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귀화한 성리학자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다. 문무를 겸전했던 정인경은 누란(累卵)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고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관호가 없이 내려오던 부성현을 독립시키고 군으로 승격시킨 일이다. 충렬왕은 복군을 단행할 당시 ‘상서롭다’는 의미를 넣어 ‘서산군(瑞山郡)’이라 명명하였고 충렬왕 34년(1308)에는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서령(瑞寧)으로 바뀐 적은 있지만 조선태종13년(1413)에 다시 서산군이 된 이후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여 왔다.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 뒤 서산 백성들은 정인경의 공을 기려 해마다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조에는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셨다. 서산의 향리(鄕吏)들은 매년 성황제 때 정인경의 관복을 관아 앞에 걸어 놓고 황소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그날은 군수도 공무를 쉬면서 정인경을 추념하였다.
그 세월이 3백여 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성황제는 단절되었다. 향화(香火)가 끊긴지 4백년이 훨씬 넘은 2012년 제11회 해미읍성 역사체험 축제장에서 정인경에게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전통을 오늘에 되살렸다. 서산이란 이름을 얻게 한 정인경의 성덕(盛德)은 꺼지지 않고 서산시만의 마음속에 영원히 전할 것이다.
※「이면」
서산지명유래비는 서산시민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과 양렬공 정인경선생의 공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서기2015년 2월 1일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최영성 글을 짓고
 양렬공 정인경기념사업회장    문철주 추진하여
 서    산     시   장         이완섭 세우다


서산 지명유래비란 이름으로 서산이 ‘반역향’이었다는 거비를 세워 서산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킨 이완섭 서산시장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무모한 일을 했는지 그 상황을 전 시민에게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그리고 “서산 유래비”는 기어코 빼 철거해야 한다. -이은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조사위원

1. 측문(仄聞) 확인 된 바에 의하면 2015. 2. 1일에 서산시청 앞에 이완섭서산시장이 세운 서산유래비의 비문 내용 중 논란의 주 내용이 된 4행과 5행을 2015. 8. 21(토요일)14:00시경 서산시청에서는 끌로 쪼아 파내고 파낸 자리에 “감금했다. 무신정권은 부성현을 없애고 관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는 글을 새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이 비문 내용은 역사 기록의 어느 곳에도 없는 반역향(叛逆鄕=반역이란 국가에 대하여 군사반란이 전제되는 용어로 세조때 함경도에 일어났던 이시애의 난, 그리고 선조 때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정여립의 난 순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 란 등에서 유래 된 것임)이란 사항을 창작해서 비를 세운 것으로 즉시 뽑아내라는 요청의 말을 전화로 시작 한 것이 2015. 6. 10이니 2개월 11일만이요 부당하다는 것을 글로 구체적으로 1차로 낸 것이 2015. 7. 13이요 이에 최영성교수의 막말 대응의 글이 있었고 다시 필자가 2015. 8. 17에 그 글이 너무 억지로 일관된 막말 글임을 낸지 4일 만에 쪼아 파냈다.
그런데 아무런 역사적 근거 없이 엉터리로 우리 서산지역을 비하하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이곳에 사는 17만 서산 시민뿐만 아니라 수십만에 달하는 출향인사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다는 주장을 한데서 오는 첫 조치라면 이완섭 서산시장은 개인이 아닌 공인일뿐더러 17만 서산시민을 대표하는 직위에 있으며 서산시민을 이끌고 가는 선장과 같은 직위에 있는 시장이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전 시민에 대해서 정중한 해명이 있었어야 할 것이요 이로 인해 마음고생이 컸던 서산시민들에게 공개사과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찌 한마디 이에 대한 일언반구 해명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려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이 ‘지명유래비’를 잘못 세운데 대해 공개사과 하라.  
2. 그리고 이 ‘서산지명 유래비’ 비문(碑文)중 쪼아 파내지 않은 비문내용이 너무도 오류로 엉망일 뿐더러 비문 내용을 끌로 쪼아 파냈다 하더라도 우리고장이 ‘반역향’이었다는 잔영(殘影)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쇄물로 나간 량이 엄청날 것임으로 하루속히 비를 뽑아 철거하여야 한다.
3. 징으로 쪼아 파내 갈아 끼우지 않고 애초 그대로 둔 비문(두번째 문단) 중 6행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러다가 충렬왕10년(1284)부성현 출신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瑞山鄭氏始祖)이 국가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시켰다.〗정말 무식하다고 해야 할까 알고도 고의로 이렇게 기록 했는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서산에 대한 모든 기록은 이렇다.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치 연혁이다.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인종(仁宗)때에는 현령을 두었으며 명종(明宗)때에는 영위(令尉)를 협박하고 가두었으므로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號)를 제거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10년에 읍사람 정인경(鄭仁卿)이 공로가 있었던 까닭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34년에는 다시 서주목(瑞州牧)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2년 예에 의하여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고 뒤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강등 한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한 것이다 〗한문으로 표기하면 이렇다. 建置沿革/本百濟基郡新羅改富城高麗仁宗 置縣令明宗十二年縣人逼令尉幽之有司奏除官號忠烈王十年以邑人 鄭仁卿有功改今名陞爲知郡事三十四年 陞瑞州牧忠宣王二年 例降爲瑞寧府後又降 知瑞州事本朝 太宗十三年復今名爲郡官員郡守
서산에 대한 건치연혁은 세종실록지리지 호산록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1872년간 서산군지(瑞山舊郡誌) 그리고 1926년간 서산군지 등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1284년(충렬왕10년)에 관호가 없이 청주목과 공주목 임내(任內)인 부곡(部曲)으로 있다가 지군사(知郡事)로 승(陞) 관호를 얻은 것뿐인데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되었다는 말은 무슨 이야기인가? 그리고 서산군(瑞山郡)이란 관호는 1284년(충렬왕12)에서 129년이 지난 1413년(태종13)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듭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역사기록에 1896년 서재필이 청나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독립을 위한 운동으로 독립협회를 구성하기 이전에는 독립(獨立)이란 용어를 사용한 적  없는데 1284년(고려충렬왕10)에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했었다니 양렬공 정인경이 우리지역에 나라라도 세웠다는 말인가?
이 글을 읽을 때 마다 글을 쓴 사람이나 서산시장이 이태리 중심에 위치해 있는 작은 나라 산마리노(San marino) 공화국(인구227000명 면적61㎢) 또는 스위스에 있는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인구3,7000명 면적 160㎢) 공화국을 연상하고 이런 글을 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야기 해야겠다. 역사기록의 년도(年度)를 기록 할 때는 기원이 먼저고 왕의 재위 년도(年度)는 기원 다음에 괄호내서 하는 것이 예(例)이다. ‘1284년(충렬왕10)’ 같이 말이다.
4. 비문 15행에는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 뒤에 백성들은 정인경의 공을 기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정인경은 관직이 최고위직인 중찬(中贊)으로 높은 분이셨지만 왕이나 이 고을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守令)의 직위에 있던 분이 아니었으니 백성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은 단어이다. 말하자면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고을 사람들은’이라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5. 비문 9행에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지성으로 받들었다’는 것은 기록에 전연  없는 것을 창작해낸 부적절한 이야기다.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정인경이 근접에서 충렬왕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있다. 이 비문대로 라면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정인경의 수행원이었다는 말인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양렬공 정인경이 충렬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기록은 있다.
6. 그리고 비문을 징으로 쪼아 오려 내고 다시 삽입 했다는 내용 중 ‘무신정권은 부성현을 없애고 관호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썼는데 ‘무신정권이 부성현(富城縣)을 없앴다거나  관호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는 역사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말해보라. 역사기록은 상상으로 쓰는 게 아니다. 기록에는 ‘나라에서 관호를 제거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관호(官號)가 제거되면 나라에서 보내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守令)인 외관(外官=수령인 목사 군수 현감 등)을 보내지 않으므로 당연히 외관(外官)이 파견되는 다른 고을에 복속되게 되는 불행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7. 따라서 우리지방의 반(半)은 수백리 떨어진 청주목(淸州牧직선거리 93㎞=236리)에 반(半)은 공주목(公州牧직선거리70㎞=176리)에 복속되는 임내(任內)의 천민(賤民) 집단인 부곡(部曲)으로 전락(顚落)되어 102년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정구역을 형태적으로 설명할 때는 비지월경처(飛地越境處)라 부르는데 이는 다른 여러 개의 행정구역을 뛰어 넘어 존재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영성 교수가 쓴 ‘입비 취지문’ 11행과 ‘역사속의 서산’ 11행에는 ‘배반의 땅인 부성현을 없애고 이웃 고을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라고 쓰여 있다. 부곡과 속현이 무엇인지 구분 할 줄 모르고 쓴 글이다
8. 비 이면에는 ‘서산 지명 유래 비는 서산시민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과’ 운운했는데 누가 썼던 간에 한 교수가 쓴 한편의 글이 수천 년 동안 이 땅에 면면히 살아온 서산시민의 정체성이 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정체성이란 우리서산의 ‘참모습’이란 이야기이다.
① 어느 나라나 어느 지방을 방문하더라도 그곳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알리는 것은 그곳에서 모아져 온 유물들이 보관 관리되고 있는 시립박물관이나 국립박물관이다. 그리고 그 외에 역사기록물 그리고 그 지역의 방언, 음식물의 전통들이다. 서산사람들은 겨울이면 타지방에 없는 게국지를 먹는다. 그리고 말이 느리고 언제나 경어에는 이랬슈 저랬슈 등 유자가 붙는다. 그러나 배반이 아니라 굳은 신의가 있고 충효사상이 남다른 곳이다.
② 그리고 서산에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도 있지만 서울국립박물관에 가보면 미국과 서구에 가서 ‘한국문화 5천 년 전’을 소개 할 때 가장 인기 있었다는 보원사지에서 올라간 2.57m의 철불(鐵佛)과 1.5m의 철불(鐵佛)이 있고 그뿐만 아니라 서산지방은 철을 생산하던 야철지(冶鐵址)가 약 15군데나 있다 이것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들어오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힘은 철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유적지가 있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예가 없는 것이다.
③ 그뿐만 아니라 최근 음암면 부장리에서 발굴된 금동관(金銅冠)과 백제한성시대에 해당되는 많은 철제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운산면 여미리, 해미기지리, 성연면 왕정리 선사유적지 와 예천동 등에서도 수많은 선사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곳이다. 그리고 임란 후 국가 재정을 담당했던 자염생산지의 기능도 있었던 자랑스러운 곳이다(예를 들면 대산읍 오지리 벌말(筏村浦)이란 이런 것을 담당했던 유적지다).
우리서산은 내포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고대 유물들이 쏟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서산은 박물관은 고사하고 작은 유물관도 없다. 작은 유물관도 없는 곳은 충남도내 15개 시군중 계룡시와 서산시 두 곳뿐이다.
④ 서산의 자랑으로 전국에서는 10번째이고 충청남북도에서는 최고로 오래된 고읍지 호산록(湖山錄)도 서산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⑤ 그뿐만 아니라 886년(신라진성여왕1)부터 893년(진성여왕7)까지 7년간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신라학사(新羅學士) 고운 최치원이 부성산상 치소(治所)에서 부성태수(富城太守=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에서 벼슬한기간이 가장 김)로 재임했던 영향은 무엇보다도 크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시대에는 조존세(趙存世)라는 시인이 지곡에 살면서 금쪽같은 지역사랑의 시를 남겼고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開闢)잡지의 사장과 조선독립신문사장 그리고 최초의 단편 소설과 많은 소설을 썼고 수많은 시를 남긴 황산(凰山) 이종린(李鍾隣)이 지곡출신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외에 크고 작은 문인들이 수없이 많이 계속되어온 곳이 지곡이다.
⑥ 서산전체로 보면 소설가이자 언론이었던 ‘청춘예찬’이란 글을 써 유명한 우보 민태원(牛步閔泰瑗)도 서산사람이고 아동문학가로 유명한 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도 서산사람이다.
⑦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린 안견(安堅)도 지곡사람이다. 따라서 서산은 이름 있는 문향(文鄕)이자 예향(藝鄕)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진정한 서산의 정체성 아닌가?
⑧ 임진왜란에도 큰 공을 세웠고 문무를 겸하여 많은 역사적 저서를 남겼을 뿐더러  이괄의 반란을 진압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장군을 모신 진충사(振忠祠)도 지곡에 위치해 있다.
9. 그리고 최영성 교수가 쓴 서산지명 유래비 입비취지문 10행에는〖명종 12년(1182) 부성현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무신정권은 ‘민란을 진압’ 한 뒤 ‘배반의 땅 부성현’을 없애고 이웃 고을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역사기록에 부성현에 ‘민란’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이 있어야 하고 진압했다면 어떤 군사가 동원되어 어떻게 진압했다는 역사기록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내용은 철저히 창작된 글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고 이웃고을에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창작된 내용이다. 청주목(淸州牧)과 공주목(公州牧)에 복속된 것이 얼마나 이곳에서 먼 곳인데 이웃 고을인가. 속현(屬縣)이란 주읍(主邑)내에서도 직촌(直村)에 비해 크게 우대받던 지역이었다. 고려조와 조선조의 지방행정사(地方行政史)에 대한 것을 공부 안한 것을 들어내는 것이다.
10. 입비취지문 16행과 역사속의 서산 16행에는 정인경의 ‘벼슬이 수상(首相)’에 이르렀다고 되어있는데 우리나라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구한말 기록에도 우리나라에는 ‘수상(首相)’이란 벼슬은 없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도 수상(首相)이란 벼슬 이름은 쓴 일이 없다. 단 8.15 광복 후 북한에서 최고위직의 실권자 직위명이 ‘수상(首相)’이라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일 있다.
11. ① 1989.1.1 서산군(瑞山郡)이 3개 시군으로 나뉠 때 기록은 이렇다. ‘법률제4050호(1989.1.1)서산읍이 시로 승격(6개동)’으로 되어 있고 태안군은 ‘법률제4050호(1989.1.1)서산군에서 태안읍, 안면읍, 남면, 근흥면, 소원면, 원북면, 이원면을 태안군 설치’로 되어있다.
② 광복 후 서울특별시를 비롯한 도(道)산하에 있던 시(市)들이 직할시(直割市)가 될 때에도 하나같이 승격(昇格)되다로 되어있다. 그리고 자치단체가 된 구(區)는 설치하다로 되었다. 이것을 보면 예나 이제나 용어사용에 큰 차이가 없다.
③ 세종특별자치시 경우는 이렇다.

2005.,7.18  신행정수도수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공포
2006.12.21  행복 도시 명칭「세종시확정」
2910.,12.27   세종시설치등에 관한 특별법,법률제1,0419호 공포
2012.6.30    연기군 폐지
2012.7.1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세종특별자치시는 군(郡)에서 2단계나 뛰어 넘는 높은 행정구역이 되었지만 평범한 ‘출범’   으로 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2. 거듭 말 하지만 역사 용어를 함부로 지어 내서는 안 된다. 지방사는 철두철미 과거의 전거와 중요매장문화재의 발굴이 있을 때 철저한 고증으로 바뀌는 것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완곡(婉曲)하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긍지를 갖게끔 기록해야 한다. 철학처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옛 전거와 유적유물에 의하여 확실히 확인된 것만 기속(羈束)되어 쓰여지는 것이다.
13. 이완섭 시장에게 질문한다. 2015.8.3일자 서산시대 제23호 신문에 기고된 최영성 교수의 글에는〖 ‘서산유래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입장의 글 Ⅲ, 15행부터 시작 되는 호암(湖巖)문일평(文一平:1888-1939년부터《조선일보에》‘역사상의 반역아’란 글을 연재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의 적지 않은 반역적인 거사(擧事=큰 일을 일으킴=필자주)들은 역사의 동력이자 발랄함’이라 했다. 그는 사회발전의 계기를 역사상의 반역사건을 통해서 찾으려 했다. 중략  ‘이 논리에 비추어 보면 힘없는 민초(民草)들의 항쟁으로 초래된 ‘반역향’이란 명칭은 부끄럽거나 모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후세 서산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문제다.〗라고 썼는데 이완섭 시장의 평소 사상과 철학과 신념이 이 최영성 교수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것인지 확실한 답변이 있기 바란다. 답변이 없다면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理解)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17만 서산시민을 이끌어 가고 있는 시장이 항상 반역을 꿈꾸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시민의 앞날이 어떻게 되겠는가?
13. ‘서산지명 유래비 입비취지문’의 맨 끝단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미래의 주역인 젊은 세대에게 서산의 역사를 알리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유래비를 세우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쉬운 글로 써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우는 것이 좋다. 뿌리를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서산유래비의 건립이 서산시민이 대동단결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14, 3월 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崔英成’〗
마치 어느 시대에  엄중한 대통령이 내린 유시문(諭示文)을 읽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지만 비문 찬자가 비문을 짓고 난 뒤  ‘입비취지문’으로 후손들이나 지역사람들에게 앞으로 지향(志向)해 나아갈 일까지 써논 예는 아직 보지 못했다. 최 교수의 생각으로는 서산에는 철부지 어린애들만 사는 곳 쯤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14. 서산 유래비의 건립의 모든 책임은 이완섭 시장에게 있는 것이다. 비문찬자 추진자 등은 보조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비문찬자나 추진자가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도 비를 건립하는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는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완섭 시장이 만일 이 비문내용에 이상과 같은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무지의 극치로 볼 수도 있고, 알면서 했다면 2015. ,8. 3일자 서산시대 신문에 기고된 최영성 교수의 글 내용에 있는 막말을 인용해 말한다면 ‘음험하기 짝이 없다’ 할 것이다.(최영성의 글 ‘서산 유래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입장’ Ⅱ항 2호 끝에 위로 둘째 줄 막말 인용)’
15. 서산을 본적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곳에 가서 살거나 이역만리 외국에 가 있더라도 언제나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긍지 속에 내 고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산다. 특히 그것은 충청도는 어느 곳이나  충절의 고장이요, 서산사람들은 말은 느려도 신의(信義) 있고 인심이 순후(醇厚) 넉넉한 마음 속에 나라에 충성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사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사는 고장에 느닷없이 반역향(叛逆鄕)이란 낙인(烙印=이곳 출신 모든 사람들의 이마에 반역향 출신이란 낙인(烙印)을 하는 것과 같음)을 찍는 주제의 ‘서산 지명유래비’란 거비(巨碑)를 세움으로써 시민들에게 깊은 마음에 상처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 이 비는 하루 속히 전 시민이 나서서 뽑아 철거시켜야 한다.
다시 한 번 이완섭 시장에게 요청한다. 하루 속히 이비를 세운데 대해 공개 해명과 함께 공개 사과하고 비를 뽑아내어 완전 철거하여야 한다. 끝으로 17만 서산시민들이여 고향을 사랑하는 출향한 명사들이여 우리가 반역향(叛逆鄕)사람들이란 오명(汚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서산 지명유래비’를 뽑아 철거 하는데 분연히 다 같이 참여합시다. 이 글을 쓰는데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 주시고 용어의 사전적 의미까지 확인하여 주신 김종옥 전 교장 선생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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