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가 진보정치 활동 하겠다’는 약속 지키겠다

젊은 정치인의 이야기조정상 정의당 서산태안위원장

 

조정상 정의당 서산태안위원장
조정상 정의당 서산태안위원장

딸한테 전화가 왔다. 평소 영어 과외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복싱 체육관에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은 굳이 오전에 체육관을 다녀오겠다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평소 복싱 체육관에 있을 시간에, PC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면 안 되겠냐고 한다. 딸의 픽업 요청에 바쁜 오전 시간을 쪼개려 발을 동동 굴렀던 나 자신에게 한숨이 나왔지만 어쩌겠나. 얘가 누구를 닮아서 이러나 생각하며 결국 허락했다. 지금도 컴맹이고 아주 가까운 몇몇 외에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는 아내를 닮지는 않았으니, 나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었지? -프롤로그

 

구슬치기, 개구리 동동 어릴적 추억

전교 1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민가 몇 채와 온통 논밭이었던 석림리, 그곳에서 보냈던 나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또래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과 줄기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 펼쳐진 마당에서 십자가 배열의 구멍을 파놓고 구슬을 굴려대던 기억이며, 개구리 동동으로 개구리를 낚아서 뒷집 담장 안으로 개구리를 날려 보내던 기억이며, 딱지 다 잃었다고 징징대자 삼촌들이 출격하던 기억이 정겹다.

공부도 그럭저럭 잘하긴 하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던 초등학교 5학년, 우연히 가입한 산수반에서 어 이거 재미있네라며 숨겨졌던 재능을 발견하고, 산수경시대회에서 느닷없이 1등을 하여 특별 관리를 받던 그 시절부터 아마도 내 특별한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 그 시절 짝사랑했던 공부 잘하던 어느 여학생에게 말이라도 한번 건네 보겠다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에 신경을 더 썼던 기억과 그래서인지 매학기 성적이 향상해서 전교 1등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기억. 중학 졸업식에서 전교 1등 졸업생에 수여되는 충청남도 교육감상 부상으로 받은 벽시계가 가보가 되어 아직도 어머니, 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 한 쪽 벽에 걸려있는 모습. 어머니가 중학교 때 내가 받은 상장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는데, 메리아스 네모난 박스에 가득 차 있는 모습도 지금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숫기 없었던 학창 시절

대전으로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잘하게 되면 말이라도 건네 보겠다던 그 여학생에게는 결국 작업 한 번 걸어보지 못할 정도로 나는 숫기가 없다. 지금도 숫기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는데, 그 당시 대전의 내 또래 학생들은 이미 충청도 사투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수업 시간에 고향 서산에서 하던 것과 같이 내 입에서 사투리가 튀어 나왔고, 친구들이 까무라치게 웃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 거의 2달 동안 학교에서 나는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놀란 것이, 서산에서는 중학 졸업 후 고등학교 공부, 예컨대 정석, 성문, 맨투맨 따위의 공부를 미리 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는데 반해, 내 성적 정도의 대전 친구들은 이미 정석을 몇 번 뗐네, 성문을 몇 번 뗐네라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역시나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국어, 수학은 그럭저럭 상위권 성적이 나왔는데, 영어가 40점이 나왔더랬다. 눈앞이 노래졌다. 목돈을 써가며 대전으로 학교를 보내주신 부모님을 뵐 면목도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그 해 10월 정도까지가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 시기였던 것 같다. 성문 기본 영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파고 또 팠다. 독하게 공부한 덕분인지 2학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내 성적은 다시 상위권에 가게 된 것 같다.

2학년 때 사춘기를 맞았던 것 같다. 그 전까지의 내 삶에 대해 돌아봤다. 2006년 서산에 복귀해서 만났던 중학교 동창들에게 듣기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당시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의 추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보기에는 정상이가 왜 저러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려고 노력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용돈이 많았던 나는 친구들에게 인심이 후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성적은 1학년 2학기 이후로 조금씩 떨어졌지만, 그래도 상위권은 유지했다. 아마 고등학교가 6학년까지 있었다면 그다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서울대 생물학과 도전 실패

재수 끝에 서울대 입학

중학 1학년 때, 어렴풋하게 나의 목표를 서울대로 정했던 탓에 서울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었다. 입학 원서를 제출할 시기가 다가왔을 때, 가까스로 서울대에 입학할 점수는 나오는 바람에 대학 지원에 더 애를 먹었다. 담임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농과대를 추천하셨고, 나는 분자생물, 미생물 따위의 전공을 지원하고 싶어 했다. 많은 충돌 끝에 선생님과 나는 절충해서 서울대 생물학과에 지원을 했다. 가채점 결과 고득점 했고, 경쟁률도 1.2:1 이었으나 낙방했다. 3백점을 넘고도 떨어지다니....... 충격이었다.

부모님과 상의 후 후기 시험은 포기를 하고, 재수에 돌입했다. 마지막 학력고사, 첫 번째 수학능력평가 시험에 도전하는 비운의 수험생이 되었다. 그 유명한 종로학원에 입학하였다. 수업료도 수업료지만, 서울역 근처 하숙집은 고등학교 때 하숙비의 2배에 육박할 정도로 고액이었다. 그야말로 나는 우리 부모님 등골 브레이커였던 것이다. 그나마 내 성격이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약간 나대는 성격으로 바뀌어서 그런지,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서울역 근방을 휘젓고 다녔었다. 재수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재수, 삼수생들은 공부 많이 안 해도 성적은 꽤 잘 나온다. 당시 서울역 앞에서 맛본 KFC 치킨의 환상적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KFC 치킨을 먹어도 옛날 맛이 안 난다.)

수학능력평가 시험 도입 첫 해는 수능을 두 번 칠 수 있게 했었는데, 1차가 너무 쉽게 나와 수험생 대부분은 1차 시험 후, 2차 시험을 건너뛰고 본고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1차 시험에서 망한 나는 남들 본고사 공부할 때 2차 수능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2차 시험은 엄청 어렵게 출제되었다. 결국 나는 겨우 0.6점을 더 얻으려고 남들 본고사 공부하는 4개월 동안 수능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상황을 보면 영락없는 재수 실패였다. 그런데 다행히 본고사에서 아는 문제들이 다수 출제되었고,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능 점수를 커버할 정도로 본고사 고득점을 했었던 것 같다.

본고사 이후 나는 서산으로 돌아와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량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합격자 발표 날도 긴장된 기분을 풀 겸 술 한잔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동부 시장 옆 입구 쪽에 있던 공중전화에서 합격했다는 ARS 음성을 확인했을 때는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친구들도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고 다녔던 기억이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만난 데모대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충정로 입구에 학원이 있었는데, 모의고사를 치고 하숙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일군의 대학생 데모대를 만났다.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한다는 데모였는데, 이들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대변화의 신호탄이 될 줄은 그 당시 몰랐었다. 당시 초중고 학습과정이 그러하듯이 자유주의, 자유무역에 대한 옹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 등이 내 12, 아니 13년 학습의 핵심이었던 것에 반해 데모대가 주장하는 것은 그 반대였다. 충격이었다.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합격하면 내가 공부했던 것과 다른 내용들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2월 정도였던 것 같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주도했던 학생회 선배들을 찾아가 운동권 동아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선배들은 그런 나를 신기해했고, 한 선배가 다른 선배들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내 손을 끌고 간 곳이 학생회관 3.5층에 있던 과학철학연구회였다. 우리 과 선배들이 많은 동아리라서 그런지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 전에 가입한 특이한 신입생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나의 대학생활은 남들보다 한 달 먼저 시작되었다.

대체로 학과 성적이 바닥인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내 학과 성적도 바닥이었다. 수업과 시험은 빼먹어도 무슨 무슨 출범식, 결의대회 따위의 행사에는 개근을 하였다.

 

사랑은 피폐된 대학생활의 안식처

서울대 21세기진보학생연합 가입

199547일 금요일, 2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기, 역시나 데모에 심취해있던 나는 그날도 종로 어디에선지 어느 대학에선지 데모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동창 친구가 재수하면서 알게 된 여학생이라며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하여, 듣는 둥 마는 둥 별 관심이 없었지만 알겠노라며 억지로 떠밀려 약속을 잡은 날이기도 했다. 버스가 밀려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약속 장소인 신촌의 독다방으로 갔지만 너무 늦은 탓으로 친구와 여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호출기가 울린다. 호출기에 찍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니, 그 당시 막 생기기 시작한 배스킨라빈스이다. 가서 보니 얼굴이 하얗고 선이 또렷한 예쁜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맛은 환상적이었지만, 나는 운동을 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순진 무식한 학생이었다. 건성건성 만나고 여학생과 헤어졌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나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나중에 같이 영화 한 편 보자고 졸랐고, 나는 그러마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나는 다시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1995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피폐해졌다. 일반적으로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학교생활을 한 탓이었다. ‘, MT’ 한 탕을 하고, 신림동에 와서 씻고 다시 , MT’를 가야하는 상황. 지겨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 때 영화를 보자고 했던 그 여학생이 떠올랐다. 삐삐를 쳤고, 덕성여대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 시간에 또 늦게 도착한 나는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았다. 책을 보고 있었던 그 모습은 4월에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냥 평범한 여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나는 모습.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내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기억이다. 그녀와 마주보며 이야기하면서 말을 더듬었고, 그녀는 무슨 운동권이 말을 그렇게 못하냐?”라고 했다. 호감도가 급상승했지만 여전히 나는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우리는 헤어졌고 다음에 영화 한 편 같이 보자는 말을 이번에는 내가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건강에 이상이 왔다. 아픈 나를 선배들이 잘 챙겨주지도 않고, 1년 반 동안의 대학생활에 회의도 밀려올 시기였다.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의대 편입 시험 준비를 하던 그녀는 계획대로 9시까지 공부를 하고 종로5가에서 만나자고 했다. 10시쯤 종로5가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무렵이라 우리는 매일 만났다. 농활을 안가는 대신 도서관을 매일 나갔고, 처음으로 대학 학과 공부라는 것도 했다.

여자 친구도 생기고 생활이 안정이 돼서 그런지, 나는 다시 운동권 무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만 활동 무대를 동아리에서 학과로 바꿨다. 당시 학생운동은 NL, PD 양대 진영이 양분하고 있었는데, 서울대는 양 쪽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와 연합한 21세기진보학생연합이라는 정치조직이 막 출범한 상태였다. 21세기는 시민사회 각각의 이슈, 예컨대 환경, 인권, 여성 등에 해당하는 전문화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과 공개, 합법, 대중,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던 조직이었다. 나는 21세기의 주장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학생들 특유의 과격함과 선명함의 정도가 덜한 21세기는 출범 이후 줄곧 내리막길이었다. 학생운동에서의 21세기의 영향력이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조직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여자 친구에게는 한 학기만 더, 한 학기만 더 허락을 구하다가 결국 5학년 활동까지도 하게 된다. 그 사이 여자 친구는 4학년 졸업과 동시에 결국 편입 시험에 합격을 하여 그토록 원하던 의대 본과에 편입학하게 된다.

 

해군 학사장교로 군 입대

1, 2차 연평해전 발생 시기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미 군대 적령기를 놓친 나는 해군 학사장교 시험에 응시, 합격을 한다. 1999년 입대, 2002년 전역. 장교훈련대에 입영하자마자 훈련관이 푸쉬업을 시켰는데, 1개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4개월 간 훈련을 거쳐 71일 임관하던 시기에는 푸쉬업을 100개까지는 단숨에 했던 기억을 돌이켜 보면, 군대의 인간 개조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던 것 같다.

병과별 교육을 이수하고 함정으로 발령을 받은 것은 199910월 정도였던 기억이다. 함정에 처음 발령을 받고 나면 아무리 장교로 하더라도 꼼짝없이 배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데, PQS라는 시험에 합격해야 영외에서 생활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3월에 임관해서 부임한 소위들보다 내가 먼저 PQS에 합격해서 영외로 나가게 되자, 선임 소위들이 시기 질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부임한 배는 20007월 정도에 퇴역을 했다. 2차 대전에도 참전했던 배라고 하니, 당시 우리 해군 전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가 군에 있을 시기에 광개토대왕함 등 KDX 함정들이 막 나오기 시작했고, 구형 구축함들이 퇴역하던 때였으므로, 해군 전력이 급성장하는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우리 배의 장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꽤 나중까지 퇴역함 관리 장교로 남아 있다가 2000년 중반 정도에 해군본부로 발령이 났다. 그곳에서 진급관리와 장교인사 업무를 보다가 2002년에 전역을 하게 되었다. 나름 해군의 핵심 부서에 있다 보니 다양한 경험을 했다.

내 군생활의 특이한 것은 1999년 훈련 받던 도중에 1차 연평해전이 발발했었고, 전역 신고를 하던 20026292차 연평해전이 발발했었다는 사실. 특히 2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날은 교전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전역이 늦어질까 노심초사했었는데, 전역 후 사회에서 접한 소식에서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그깟 전역이 늦어질까 걱정한 내 자신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민노당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

고향에서의 정치 활동은 내 숙명

전역 후,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던 막내 여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나는 변리사시험 공부를 막 시작했고, 의사고시를 준비 중이던 여자 친구도 그곳에서 같이 공부를 했었다. 그 해 말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나는 권영길 후보 대전 선대본에 자원봉사 형식으로 참여했다. 직전에 엉덩이 종기 수술을 해서 다 아물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그 추운 날, 용달차 짐칸 맨바닥에 앉아 이리저리 이동하며 선거 운동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권영길은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득표를 했고, 민주노동당을 만들었던 당원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2003년 변리사시험 1차 시험에서 나는 합격을 했고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여자 친구는 의사가 되었고, 성모병원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여자 친구를 만난 1995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단 한 차례도 헤어진 적이 없었는데, 2003년 어느 날에 드디어 이별이라는 것을 하게 된 적이 있다. 친구들을 불러 아픔을 경험해보자는 식으로 술을 마셔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양가 부모님들의 설득으로 우리는 그 다음 날 화해했다. 재회 역시 뜨거운 눈물과 함께.......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었고, 나는 이제 좋은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즈음 나는 고향에서의 정치 활동을 결심했었던 학창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고향 생활이 불가능한 변리사 직업을 갖지 않기고 하고 2차 시험을 포기한다.

2005, 더 늦기 전에 나도 취업을 해야 했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한시적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가능하면 결혼도 하고 싶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99년부터 나는 여자 친구에게 결혼 하자고 졸라대곤 했었다. 회사 생활은 나름 적성에 맞았다. 개발부서에 배치된 나는 동료들과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도모하는 것이 즐거웠고, 현장에 있는 생산직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거웠다. 회사가 있던 여수는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지금도 만약 나에게 혼자 하루 푹 쉬고 오라고 한다면 여수로 차를 몰 것 같을 정도로 여수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 해 10, 드디어 그녀와 결혼을 했다. 10년 연애의 끝은 해피엔딩이었다. 주민등록등본에 그녀의 이름과 함께 오른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신혼집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레지던트였던 그녀는 성모병원 순환 근무로 서울, 경기를 오가며 퇴근 자체가 불가능한 날이 많았고, 나는 평일에는 여수에 있어야 하는 처지여서 신혼집은 주말에만 가동이 되어야 하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마냥 행복했다. 신혼여행을 다녀 온 2주 후, 아내는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에이 우리 처지에 무슨 소고기냐. 그냥 삼겹살이나 먹자라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임신이었다. 나는 임신한 아내가 소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데, 소고기도 못 먹인 못난 신랑이 된 것이다.

2006년 제헌절, 딸이 태어났다.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됐다. 아내는 서울에, 나는 여수에, 딸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서산에 있어야 하는 상황. 결국 내가 회사에 사표를 냈다.

1990년 중학교 졸업 후에 떠난 서산. 그 동안 대전, 서울, 동해, 진해, 계룡, 여수 등지를 떠돌다가 드디어 서산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대학 때 학생운동 물을 먹으면서, 지방 권력의 변화 없이는 중앙 권력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서산으로 돌아오는 것은 시기의 문제였을 뿐 고향에서의 정치 활동은 내 숙명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서산으로 드디어 돌아왔다. 다만 이렇게 빨리 딸이 우리 곁으로 올지 몰랐고, 다소 무계획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흠이다.

 

진보정당 변화의 물결에 몸을 싣다

나의 정치활동=진보정당 활동

대학에서 만난 선배와 그 선배의 친구와 학원 창업을 했다. 학원생이 급격하게 늘었다. 그 상태로 계속 성장했다면 아마 꽤 큰 학원으로 성장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20085~6월경에 선배의 친구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그 선배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학원은 기울기 시작했고, 선배와의 협의를 통해 학원을 접기로 했다.

그 와중에 나는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권영길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 아니 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미미한 역할이라 도왔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민주노동당 당원 번호가 충남 전체에서 내가 제일 빨랐기 때문에 당시 서산태안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당원들도 내가 누군지 궁금해 했었다고 한다. 이 때 서산에서 2004년 이후로 우리 지역에서 민주노동당을 일구어 오고 있었던 신현웅 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그러나 2008년 초, 20대의 피와 땀이 녹아 있던 민주노동당이 분당되었다. 탈당계를 제출한 날 나는 하루 종일 꺼이꺼이 울었다.

그 후 나는 진보신당에 참여했다. 진보신당은 광우병 시위를 현장에서 생중계하는, ‘칼라TV’라는 신선한 시도를 했고, ‘칼라TV’의 성공으로 진보신당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상승하였다. 일반 시민으로 불리던 시민들이 진보신당으로 몰려 들어왔고, 나는 민주노동당은 실패했으나, 진보신당은 성공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었다.

20086~7월경, 진보신당 서산태안당원협의회 당원 모임이 있었다. 동문동 먹거리골 어딘가였던 기억인데,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진다. 소위 말하는 일반 시민들이 참석했던 그 모임에서, 활동가 당원들이 일반 시민들을 훈계하듯이 늘어놓던 과거 자신들의 운동권 경험담과 생경한 이념과 말의 대잔치는 내가 일반 시민이더라도 아이고 역시 정치는 일반인들이 하는 게 아니구나.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였다. 그 날의 그 경험은 사람들을 만날 때 늘 반추하는 경험이다. 어쨌든 진보신당은 초반의 기세와는 다르게 점점 대중들로부터 멀어졌고, 2012년 통합진보당 창당에 노회찬, 심상정 등 대표 정치인이 참여하게 되어 분당되었다.

2009년 나는 결국 학원을 정리했다. 비교적 프리해진 상황에서 2010년 열린 지방선거에서 태안군의원 선거 운동에 뛰어 들었다. 당시 진보신당 서산태안당협위원장이었던 김기두 후보. 그는 일반적인 우리 당 활동가들과는 사뭇 다른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해왔고, 우리 당 활동가들답지 않게 온화한 외모와 온화한 말씨를 가졌다. 그로부터 8년 후 서산시의원 후보에 출마했던 조정상은 어찌 보면 김기두 선배의 벤치마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김기두 후보는 그 당시 진보신당의 일반적인 당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높은 득표를 올렸지만, 본인의 인지도와 호감도에 비해서는 미미한 득표를 하였다. 결국 진보정당 후보로 당선되려면 그와 비슷한 모든 것에 플러스 알파가 더 필요하다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20111월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백호띠 아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성과다. 큰 아이를 낳을 때 자연분만을 시도하여 고생하다가 결국 제왕절개로 출산한 경험이 있어 둘째는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아 계획 출산을 시도했다. 아침 9~11시 사이에 출산해야 하는데, 의사가 9시 이전에 꺼낸 것 같아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말이다.

20122, 학원을 동업했던 선배와 나는 또 다시 동업으로 식당을 창업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는데, 창업 초기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됐었다. 하지만 2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는 사업이 급속도로 기울었는데, 결국 2016년 말에 식당 사업도 정리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을 운영하면서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당 주인의 실력에 비해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지고 있는 높은 인지도 덕분에 주변 외식업 생태계를 교란한다. 프랜차이즈 식당이 들어오면 주변에 있던 동종 식당은 영업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둘째, 본사의 재료비나 로열티 등으로 인해 점주 또한 영업 실적에 비해 많은 수익을 가져가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은 음식에 대한 노하우가 없는 점주들이 창업하기 용이한 장점은 있으나, 외식업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에 비해 점주 또한 그 반대급부만큼의 수익을 가져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국 프랜차이즈 본점 좋은 일만 한다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전통시장 및 도소매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지역의 부가 대형마트 본사로 흘러 들어가는 현상과 비슷하다.

20119월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에서 통합합의안이 부결된 이후 노회찬, 심상정은 탈당하여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였다. 나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진보신당의 대중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대로는 어렵겠다는 판단에 통합안에 찬성하였으나 결국 부결되었고, 노회찬, 심상정 마저 탈당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진보신당이 대중정당으로 존립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에 탈당하였다. 다만 심상정, 노회찬 등 당의 지도급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대의원대회 결정이 있자마자 탈당하는 것에는 동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었고, 2012년 통합진보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월에 식당을 창업한 이후라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4월에 열린 총선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관전자 역할을 하는 내 모습도 나름 신선했었다.

총선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통합진보당에 참여했지만, 통합진보당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진보정의당을 거쳐 지금은 정의당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나의 정치활동=진보정당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정당에 참여하느니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이다. 남들이 볼 품 없는 정당이라고 정의당을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 정의당만이 유일하게 나의 정치적 지향과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나의 당이다.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반대 투쟁

정의당 서산태안지역위원장으로 정치일선에 나서

2006년부터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싸움이 지역사회를 강타했다. 어민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이 연대하여 벌인 조력발전소 반대 운동은 결국 2012년 환경영향평가 반려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2013, 가로림만에 또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사업자가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제출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1년 전에 김종현 선생님이 심전호, 임화수 등과 함께 서산풀뿌리시민연대를 재건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던 상황이라 그분들께 부랴부랴 서산풀뿌리시민연대 시즌2’ 제안을 정식으로 했다. 8월 재창립총회를 하고, 10월인가에 가로림만 투쟁에 개입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제안을 한 사람이 총대를 메는 것. 내가 사무국장을 맡아 서산풀뿌리시민연대 시즌2 활동을 시작했다. 가로림만 투쟁에 참전 선언을 한 터라, 내친 김에 서산풀뿌리시민연대 이름으로 제2차 가로림만조력댐백지화를위한서산태안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제안하는 공문을 30개가 넘는 단체에 발송하고, 연대회의를 재결성했다. 이후 연대회의는 201410월 환경영향평가 최종 반려 때까지 가로림만 조력발전 반대 투쟁의 구심 역할을 했다. 나는 연대회의의 사무국장 역할도 맡아 수행했다. 20138월부터 201410월까지, 서산에서 내려온 이후 가장 바쁘게 보냈던 시기다.

2004년 이후 신현웅 위원장은 민주노동당부터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정의당으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계속 지역위원장을 해왔다. 그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2015년 당직선거 직전, “이번에는 내가 위원장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신 위원장한테 말을 건넸고, 신 위원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했다. 20158월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서산태안위원장 역할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당원들은 신현웅 위원장께 역할을 부탁드리고, 나는 시민단체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 영역의 활동에 중점을 둔 활동을 하고 있다. 조합원의 거의 100%가 정의당원인 전설의 노동조합의 김남희 태안분회장님을 만난 것은 식당 운영을 하다 만난 최대의 행운이었다. 김남희 분회장님은 이후 정의당 활동의 가장 큰 역할을 맡고 계신다.

 

20186월 지방선거 출마 낙선

2022돌아오겠다는 약속 지킬 것

20173,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 당했다. 국민들은 대통령마저도 파면시킬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권재민의 실재함을 증명했다. 그 후 열린 20175월 대통령선거, 2018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했다. 나는 20186월 지방선거에서 서산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사람들은 내게 민주당이 싹쓸이하는 선거에서 나는 나름 선전했다는 말씀들을 해주시나, 낙선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립서비스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선거 이후 나는 몇 가지 단체에 가입을 하고, 몇 가지 모임을 새로 결성하고, 몇몇 시민들과 함께 지역사회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사업적으로도 새로 어떤 것을 벌여볼까 고민하고 있다.

내년 총선도 있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2022년 지방선거다. 동문1, 동문2, 수석동 유권자들에게 “4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다만 2022년에는 낙선자 조정상이 아닌 당선자 조정상으로 호명되길 기대할 뿐.

이십대 때 세운 내 스스로에 대한 약속, ‘고향으로 돌아가 진보정치 활동을 하겠다는 약속을 사십대 중반에 있는 나는 현재 잘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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