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을 반역향(叛逆鄕)으로 낙인 찍을 것인가?

「‘서산 지명유래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입장」이란 최영성 교수의 글을 읽고

▲ 이은우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자문위원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전 서산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서산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서산 지명유래비’를 세움에 있어 애당초 방향설정에 문제가 있었던 점에 대하여 말해야겠다. 모든 문제는 ‘서산 지명유래비’라는 비석명(碑石名)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비(碑)는 양렬공 정인경 선생에 대한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려는 목표를 가지고 한 것 같은데 왜 ‘서산지명유래비’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양렬공은 유사 이래 서산이 낳은 최고의 인물이고, 서산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추앙해 받들어야 할 위대한 인물이다. 만일 이 비에 [고려중찬양렬공정인경선생기념비(高麗中贊襄烈公鄭仁卿先生紀念碑)-중찬(中贊)은 고려후기 조선조 영의정에 해당하는 직위, 양렬(襄烈)은 시호(諡號)]라고 쓰였던들 누구나 그의 업적을 칭송하지 않았겠는가. 혹여 비문 중 한 두 글자 잘못된 부분이 있다손 쳐도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양렬공은 고려조(高麗朝) 전체를 통해 역사의 명장 이순신 장군에 비견(比肩)할 수 있는 고려조 최고의 인물이다. 서산지방은 1182년(명종12년)에 관호가 제거된 뒤 천민 집단인 부곡(部曲)으로 전락되면서 부성현 지역의 반(半)은 청주목(淸州牧) 소속이 되고, 반(半)은 공주목(公州牧) 소속의 비지월경처(飛地越境處=남의 관할구역을 뛰어 넘어 있는 영역)가 되었다. 102년간 부곡(部曲) 아전들이 토립(土笠=죄인들이 쓰는 갓)을 쓰고 소속 주읍(主邑)으로 매월 초하루 보름 정령(政令지시사항)을 받으러 3~4백리 길을 오갔는데 남루한 옷차림과 신발 등이 열악하여 폭염이나 혹한에는 오가다 죽는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국가에 바쳐야 하는 공물과 요역(徭役=나라에서 하는 일에 인력을 동원하는 일)에서  주, 읍 몫까지 부곡(部曲)으로 전가시키는 경우가 많아 당시 서산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런 서산지방이 양렬공의 공로로 102년만인 1284년(충렬왕10년)에 지군사(知郡事)가 되면서 충북 옥천지방보다 30년 먼저 부곡민(部曲民)생활의 질곡(桎梏)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이때 양렬공 본인도 높은 벼슬에 오르면서 서(瑞)라는 본관(本貫)과 분정(分定)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서산 정씨(瑞山鄭氏)를 서정(瑞鄭)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1308년(충렬왕34년)에는 서주목(瑞州牧)으로 승(陞)시켰다. 이것은 우리지방의 전무후무한 위상의 격상으로 지금까지 서산사람들이 대외적으로 자랑하는 사항이다. 
양렬공의 최고의 업적은 고려조 광대한 면적의 국토회복이다. 원나라는 1270년(고려원종11년, 원세조7년)~1290년(고려충렬왕16년, 원세조27년)까지 20년간 평양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황해도 자비령 이북에 있는 고려영토를 무단히 점령하고 지배해왔다.
이에 양렬공이 원세조(元世祖)에게 나아가 점령지를 고려에 반환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여 반환 받았다. 그는 이 공로로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됐다. 이 영토는 현 북한 땅 전역에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그의 공로는 고려사(高麗史)의 정인경 열전(鄭仁卿列傳)에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외교력만으로 영토를 회복했으니 외교사(外交史)에 세계적으로 회자(膾炙)될 만하다. 그 외에도 요양(遼陽)과 북경(北京)에 붙잡혀 있는 수많은 고려유민을 외교력을 발휘 추쇄(推刷=찾아오는 일)하는 업적도 작지 않다 하겠다.(한국국사대사전 1218쪽)
이러한 양렬공의 외교력은 초년에 스승 한준(韓浚=개명韓自憙)으로 부터 몽골어를 배웠고, 아버지 원외랑으로 부터는 중국어를 배워 3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 실력에 힘입었다. 한준은 호산록 저자 한여현(韓汝賢)의 11대조로 원경(元京)에 10여 년 간 머물면서 원나라 벼슬이 정3품 평장사(平章事)까지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우리 서산과 관련 있는 인물 또는 서산출신으로 역사가의 기록물인 열전(列傳)에 나오는 인물은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신라학사 고운 최치원(新羅學士 孤雲崔致遠)선생과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 양렬공 정인경(襄烈公鄭仁卿) 선생뿐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두 가지만 이야기해야겠다. 우리지방이 양렬공 선생의 공로로 천민집단인 부곡(部曲)으로부터 벗어난 해가 1284년인데 벗어나는 계기와 정확한 날자가 있다. 나는 우리지역에 광복절을 기념하듯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제안했었다. 그러나 다만 관심을 보여주시는 분은 김종옥 교장선생님에게 이번 비문을 전해주신 〇〇회관 여사장뿐 결과가 없다.
또 한 가지 성황신(城隍神) 문제다. 이것은 내가 문화제에 대한 학술회의 토론자로 참여해 양열공을 우리지역 성황신(城隍神)으로 볼 수 있으니 문화제 전야제에 양렬공을 성황신인 주신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한일이 있다. 당시 서산문화원 측에서 이것을 좋게 받아드려 대단히 잘된 일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문화원 측에 따르면 성황신이란 지역의 수호신을 말하는 것으로 한사람이어야지 여러 명이 될 수 없는 것이 시의 입장이라며 무산됐다. 지금 성황신(城隍神)을 모시는 곳은 전북 순창군에서 있는 것으로 안다. 아쉬운 대목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서산 지명유래비 문제에 대해 결론부터 말씀 드리고자 한다.
비 건립 추진에 관여했던 단체는 서산에서도 명망 있고, 신망이 두터우며 최고 수준의 지성인들만으로 구성된 대단히 훌륭한 단체로 알고 있다. 또한 앞서 역사 기록을 살펴보았듯이 양렬공 정인경 선생의 현창 사업은 더도 말고 덜도 말며 그 어른에 대한 역사 기록만 가지고도 위대하고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비명을 하필 ‘서산 지명유래비’라 해놓고, 역사에 근거도 없는 ‘반역향(叛逆鄕)’을 새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추진 단체 회장과 최영성 교수는 그 이유와 추진과정에 대해 17만 서산시민들에게 명백히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또 단체 측 분들의 깊은 이해를 바란다. 비 건립 단체사무실 혹은 개인 집집마다 ‘반역향의 단체’ 혹은 ‘반역향의 집’이라 크게 새겨 비석을 세우던지 문패로 달던지 그것은 우리가 왈가왈부 할 일도 아니고 관여 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왜 있지도 않은 역사의 사실을 있는 것처럼 창작해 내어 서산시민 전체를 ‘반역(叛逆)’, ‘배반(背叛)’, ‘민란(民亂)’등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강제 하려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양렬공 선생에게도 누가 되는 일일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양렬공의 크고 큰 업적은 모두 팽개쳐 버리고 역사에도 전혀 없는 스쳐듣기만 하여도 소름끼치는 ‘반역향(叛逆鄕)’을 돌에다 새기고 홍보하여 우리시민들을 실망 흥분케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비문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정치적 선동인가?

얼핏 풍문으로 서산시청 담당부서에서 지난 7월 30일 최영성 교수의 글이 오면 ‘서산 지명유래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시의 공식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후 최영성 교수의 기고문이 서산시대신문사에 게재됐고, 이것은 우리가 7월 13일자 서산 지명유래비에 대한 의견을 서산시대에 발표한지 21일 만에 나온 첫 반응이다. 그러나 서산시의 공식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는 비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글을 쓴 사람, 비문 설립 추진 대표자, 시장 등 관련하신 분들의 직위를 가지고 이야기 했을 뿐 의도적으로 그분들의 명예를 위하여 이름은 거론치 않았다. 그러나 이번 최 교수의 반론 글을 보면 우리 두 늙은이에게 저주에 가까운 인신공격을 한 것을 보고 정말 전율을 느끼며 놀랐다.
나 스스로 향토사학자라 자칭한 일도 없는데, 그는 “학자연(學者然)하면서 마치 토호(土豪)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정말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로 공격했다. 학자이고 교수라면 논점에 구체적 반론만 제기하면 되는 것인데 어찌 이러한가? 안타까울 뿐이다.
더욱이 용어사전에 보면(동아출판사 편찬 국어사전)『‘토호(土豪)’=란 ①그 지방에서 오래 살면서 양반을 떠세(떠세=돈이나 세력을 믿고 억지를 쓰는 짓) 할 만큼 한 세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 ‘토호(土豪)질’=지난 날 시골에서 양반이 세력을 믿고 죄 없는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거나 가혹한 행동을 자행 하던 일.』이라 명시되어 있고, 현문사간 대국어사전에는 『토호(土豪)=①어느 한 지방에 오랫동안 살면서 재산과 세력이 많아 양반 부럽지 않던 사람, ②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던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찌 좁은 공동주택에서 84세, 82세의 두 늙은이가 자전거 하나 없이 지팡이에 의지해 나들이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나를 토호(土豪)라 지칭하니 명예훼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최 교수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인지 우리의 문제제기를 ‘정치적 선동’이라 여러 번 언급했다. 우리의 글에는 정치적인 말은 한구절도 없다. 더구나 일생을 통해 어느 정당에도 가입해 본 일도 없으며 선거운동 한번 참여해 본적 적도 없는 나는 선거 유세장에도 가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향토사 하는 사람 중 전국적으로 봐도 정치인으로 변신한 예는 이제껏 보지 못했다. 비문의 잘못을 지적한 것을 어떤 근거로 정치적 선동이란 단어를 썼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문 논쟁과 관련 과정이 있다. 글이 나가기 전인 7월 10일경 시장과 전화통화를 요청했지만 못 이루어졌고, 어렵게 연결된 담당과장은 비문의 글은 유명한 교수의 글이며 충남역사문화원의 자문을 받은 완전한 내용이란 말만 강조했다. 교수라는 직위가 어떤 권위인지 행정의 난맥상을 본다. 최 교수의 반론에서도 이와 똑 같은 뉘앙스를 느끼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최 교수는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비문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일은 메르스 사태로 두 늙은이가 집에만 있을 때인 6월 4일 김종옥 전 교장 선생님이 터미널 어느 점포에 시청 앞에 세워진 비문내용을 갖다놓았으니 살펴보라는 연락이 오면서 시작됐다. 김 전 교장선생님과는 같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각종학술회의에 자주 같이 다녔던 사이다.
나는 비문(碑文) 내용을 보며 특히 “부성현이 ‘반역향(叛逆鄕)’으로 지정되었다”고 적혀 있는 부분에서 온 피가 머리끝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성현 옛 치소가 있던 곳은 내 고향 지곡면 현 산성리다.
다음 날 일찍 최 교수와 비문 설립 주최 측 책임자 위치에 있는 모 박사에게 “누가 도대체 이런 일을 했는가?”라며 격한 말을 했다. 비문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다면 나는 ‘반역(叛逆)의 땅’ 그것도 중심지에서 출생하고 자란 사람이며 ‘반역(叛逆) 부성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어찌 복되고 즐거운 일이 많은 상서로운 땅. 서산을 반역향으로 금석문에 새기려 하는가!

향토사가들을 비하하고
매도해도 되는가?

우리의 핵심요지는 무슨 근거로 서산 땅을 ‘반역향(叛逆鄕)’이라 비문에다 썼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최영성 교수는 한국철학을 전공한 교수다. 현존하는 성리학 분야의 최고 유능한 교수이고, 한국유통사에 최고의 권위자로 알고 있다.
더구나 양렬공의 아버지인 송나라 형부 원외랑 정신보 선생의 학문 세계를 구체적으로 밝혀낸 공도 작지 않다. 최 교수는 충남서부의 양열공문생도학고명제자팔현(襄烈公門生道學高名弟子八賢)이란 긴 제목아래 정인경의 문인으로 도학에 이름 있는 제자 8명을 밝혀냈으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불리는 점필재 김종직(佔畢齋金宗直)의 학문세계에도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최초의 발표를 한 교수다. 그의 이런 학문적 업적은 특히 서산사람으로서 큰 찬사를 보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 비문으로 말미암아 무참히 인신공격을 당하고 보니 너무 허탈하고 안타까운 심정 표현 할길 없다. 
그의 반론 글은 악의에 가득 차 있다. 『①학자연(學者然)하면서도 마치 토호(土豪)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②억지로 트집 잡아 ③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다. ④ 서산의 여론을 분열시킨 뒤 무엇을 얻고자 함인지 묻고 싶다. ⑤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행동을 해서 박수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⑥ 전문가로 데뷔한 사람이 아닌 경우는 더욱 겸손할 필요가 있다. ⑦ 문제를 제기한 측의 역사의식을 꼬집고 싶다. ⑧ 내가 ‘반역’이란 말을 통해 은근히 서산 시민을 모욕한 것처럼 몰아가려는 태도는 음험(陰險)하기 짝이 없다. ⑨ 왜 생채기를 내려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⑩ 향토사랑이 지나쳐 자기만의 도그마에 빠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⑪ 서산시민에 대한 모욕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그 유치함을 나무랄 정도다. ⑫ 뚜렷한 논리나 근거 없이 지역 언론매체를 통하여 어른스럽지 못한 표현으로 선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 것은 양식 있는 이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등의 이런 막말은 처음 보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좀 언짢은 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글로 나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오래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도 완곡(婉曲)하게 표현해 쓰는 것이 지성인들이 취해야 할 기본 도리이다, 더구나 유명대학 보직교수가 말이다.
전국에는 돈이 들어 갈 뿐 돈도 생기지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일은 아니지만 지역의 바른 역사정립을 위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향토사에만 몰두 연구하는 분들이 수 천 명이다. 일종의 매니아(mania)들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는 96세의 고령임에도 지금껏 글을 쓰고 수만 점의 고문서를 수집 대학박물관과 충남역사박물관에 기증한 향토사가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조차 크게 존경 받고 있는 김영한 씨 같은 어른도 있다. 그에게는 여러 해 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도 수여되었다.
또한 30여 년 전 모 국립대 정교수께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서산태안 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많이 참고 한바 있다. 그 교수님은 그 분야의 전국학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모르지만 그때 최 교수는 학생이었을는지 모르겠다. 이름만 대면 전국 어느 곳에서나 알 수 있는 세계적인 교수님도 지역의 일은 그 지역 향토사학자의 의견을 들어 묻는 학자다운 자세를 견지한다. 모 국립대에서 역사문화에 관한 학술지 창간호를 낼 때 내 논문도 그곳에 게재된 사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학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반역향’ 용어에 대한 올바른 역사

〖한국국어사전위원회편, 대국어사전(문학박사이숭녕, 문학박사 남광우, 문학박사 이응백, 국어학자 최학근, 국어학자 지춘수) 〇 반역향(叛逆鄕)=조선때 반란이 일어났거나 이에 동조한 지방. 이 고을 사람들은 관계(官界)의 등용에 제한을 받았음〗
이 국어사전에 의한다면 ‘반역향(叛逆鄕)’이란 조선조 때 비로소 생긴 용어로 고려시대 더구나 1182년 (명종2)에는 용어조차 없었다. 예를 들어 정여립 반란이 그렇다.
정여립(鄭汝立)은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으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이적(異蹟) 등을 조작하여 이 씨(李氏)가 망하고 정 씨(鄭氏)가 흥한다고 퍼뜨리며 민심을 선동하고 1589년(선조22) 거사를 모의, 한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황해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함으로써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이 사실을 듣고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정여립은 금구(金溝)의 별장(別莊)을 떠나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였으나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으며 전라도(全羅道)를 반역향(叛逆鄕)으로 하여 도민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부득이 ‘반역향’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정여립의 행적 전부를 그대로 옮겼다.
〖현령(縣令)과 그 보좌관인 현위(縣尉)가 대립 갈등함으로써 현민(縣民)들의 고통이 컸다. 이에 백성들이 봉기하여 아문(衙門)을 폐쇄하고 현령과 현위를 강금했다.〗가 과연 반역향이라고 창작하고 판결할 수 있는지 뒤묻고 싶다.

부성현 치소가 지곡면에 존재한
사실의 부정에 대해

최 교수는 1182년(명종12)폐현 될 때 치소가 지곡에 있었다는 것을 누가 믿느냐며 극구 부정했다. 다음은 지곡에 옛 치소가 있었다는 구체적 역사 자료이다.
〖①호산록 〇 건치연혁 : 백제(百濟)에는 기군(基郡)이라 한 것을 신라에서 부성(富城)으로 개칭하다가 고려인종(1123~1146)때에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1182년(명종12)에 그 고을 아전이 영위(令尉=현령(縣令)을 유폐시키자 유사(有司)가 주달하여 고을이름을 삭제했다.
〇고적(古蹟) : 지곡은 폐지된 고을이니 즉 백제시대에는 지육현(知六縣)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지육(地育)으로 부르다가 부성(富城)이라 했는데 고려에서 지금의 군명(군명=서산)으로 고치어 본주에 복속 되었으니 군청북쪽 十五리에 있다.
②1896년(고종9) 서산군지. 고적(古蹟):지곡폐현(地谷廢縣)본백제지육현(本百濟知六縣)신라개지곡부성현(新羅改地谷富城縣)고려개금명잉속(高麗改今名仍屬)본조재군북삼십리유고성주일천이십칠척(本朝在郡北三十里有古城周一千二十七尺), ③ 1926년 서산군지, 부성산(富城山)재지곡면(在地谷面)...중략...산성리(山성리)부성산(富城山)차즉 신라위 부성현(此卽新羅爲富城縣)진성여왕시(眞聖女王時)최치원위부성태수(崔致遠富城太守)군치중심지유허(郡治中心地遺墟) 산상유석(山上有石)부성산토미성(富城山吐美城)〖재지곡면산성리(在地谷面山城里)석축원형(石築圓形)고(高) 육(六)~칠척(七尺)경약육십간(經約六十間)안서산구지(按瑞山舊誌)왈(曰)지곡면폐현(地谷面廢縣)본백제지육현(本百濟知六縣)신라개위지육위부성군(新羅改爲富城郡)영현고려개금명잉속본조한국인지재군서산군서산군(本朝韓國因之在郡瑞山郡)북삼십리유고성(北三十里古城)주회(周回)일천이십칠척(一千二十七尺)역견여지승람(亦見輿地勝覽)안지곡현(按地谷縣)고려조시이살현령폐현속지서주시고명(高麗朝時吏殺縣令廢縣屬地瑞州是故)기지왈이살리(其地曰吏殺里)금산성리일부(今山城里一部), ④ 여지도서 리명(里名) : 이사리(而沙里) 현 지곡면 산성리, ⑤ 1998년간 서산시지 역사편(이해준 집필)60쪽 14행, 부성군의 치소는 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있는 토미성과 연결시켜 이해가 필요하다. 이곳은 진성여왕(893)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해 왔던 곳으로 그가 집무했던 옛터가 부성동(富城洞)에 있었고 그 밖에 관아와 관련된 각종 지명들이 이러한 연유를 증명해 주고 있다. 부성군은 고려 명종12년(1182년) 현의 관리가 현령을 살해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군호를 없애면서 마을 이름도 이살리(吏殺里)라고 하였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이사리(而沙里)로 남았다고 본다.(시지에는 고려인종 23년(1145)으로 오타되었기 내가 바로 잡았다.)〗
이와 같이 최 교수는 역사기록도 최근까지 충남 역사문화원장을 한 이해준 교수가 1998년에 쓴 서산시지 기록도 부정하고 있다. 서산시 문화관광과의 시각도 이와 별 다르지 않음에 놀랍다. 지곡사람들이 시청에 들르면 과 책임자가 “백제, 신라, 고려 초의 옛 치소가 지곡이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등 부정하더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듣는다. 향토사에 대한 시의 무관심이 지나친 것인지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최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독립(獨立)이란 용어사용의
오류에 대해서

고려시대에는 빈번히 백성들의 통치 수단으로 군현을 없애 임내(任內)인 향소부곡(鄕所部曲)으로 강(降)시킨다든지 이것을 군현(郡縣)으로 승(陞)시킨다던지 했던 것인데 독립(獨立)이라는 용어가 맞는가?
독립(獨立)이란 용어사용은 1896년 서재필이 우리나라가 대청국으로부터 간섭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사신들이 청나라로 오가던 옛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이 세워지고 부터다.
학자라는 분이 소설도 아니고 어떻게 고려시대의 내용을 기록하면서 ‘독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단 말인가? 과공은 비례라 하는 말도 있듯이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단어 선정에 신중해야 한다.

반역적인 거사가 역사의 동력이다?

최 교수는 ‘반역향’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 관련도 없는 독립운동가 문일평의 논설을 예로 들면서 반역적인 거사들은 역사의 동력이기에 비문에 새겼다고 했다. 더 나아가 “반역향”이 부끄럽거나 모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후세 서산 시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반역향”이 자랑스럽다면 양렬공 선생의 업적은 독재정권에 충성하여 얻은 결과라는 의미인지 무엇이란 말인가! 변명도 치졸하기 짝이 없다.
이제 비문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한다. 서산시장에게 묻는다. 반역(叛逆)이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통치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더 이상 역사적으로나 시민감정에도 맞지 않은 지명유래비에 대해 어찌 해결할 것인지 17만 시민에게 시보(市報)를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끝으로 최영성 교수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우선 모든 일에 억지와 막말이면 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① 우선 ‘반역향(叛逆鄕)’이란 조선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비롯된 용어이다. 고려시대에는 용어조차 없었으므로 서산지방이 ‘반역향(叛逆鄕)’이었다는 역사기록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서산에는 ‘반역향(叛逆鄕)이 될 수 있는 ‘반역사건(叛逆事件)’이 어떤 시대에도 없던 곳이다. 궁여지책으로 한 말이겠지만 최 교수가 ‘패역(悖逆)이 반역(叛逆)보다 훨씬 강도가 센말이다’라 주장하는 것도 소가 웃을 일이다. ‘패역(悖逆)은 인륜에 반하여 불순’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반역(叛逆)’은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고 국가의 통치권을 빼앗으려는 행위’로 엄연히 다르다는 억지주장으로 “반역향”을 고집하지 말라.
② 부성현에 민란이 있었다는 기록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 없는 사실을 더 이상 창작해 내지 말라.
③ 옛 부성현 치소가 현 지곡면 산성리라는 것을 계속 부정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게 되면 바른 학문을 하는 교수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거론하기 싫어 참아 왔지만 이 일은 최 교수 전공분야와는 다른 역사분야 중에서도 고려사 분야가 아닌가? 
더 이상 서산시민을 얕잡아보는 억지주장을 하지 말라. 특정 전공분야에 무엇을 잘 안다고 마치 무불통지인(無不通知人)으로 행세 하려는 자세는 학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17만 서산 시민들이여! 지성인들이여! 우리 모두 각성(覺醒)하여 수 천 년 지켜온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정체성을 보전(保全)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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