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끝나는 날까지 고향발전 위해 봉사할 것”

음암면 탑곡3리에 최근 경사 하나가 생겼다. 이 마을 출신인 직암 이철승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유허비가 마을회관 앞 공원에 오는 12월 조성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업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앞장선 사람 중 하나인 현양사업추진위원회 김낙중 위원장은 고령에도 불구, 왕성한 고향사랑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낸 인물이다. 이번호에는 김 위원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직암 이철승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구한말 성균관 박사를 지낸 분으로 조선이 주권을 상실하자 일본 아래에서는 교육을 할 수 없다며 고향인 탑곡리로 낙향했다. 그 후 고향에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고 후학들은 천안, 당진, 신양, 면천 등지에서 활동했다. 특히 3.1운동 당시 선생의 제자들은 스승의 항일정신을 본받아 민족혼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철승 선생을 어떻게 발굴하게 됐는지?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에 앞장선 이철영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만들기 위해 몇 년간에 걸쳐 노력해 왔다. 이런 과정에서 이철영의 스승이 이철승 선생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더욱이 아버지(김구현)도 이철승 선생의 제자였던 까닭에 아주 어린 시절 직접 뵌 적이 기억난다.
이런 각별한 인연으로 지난 2013년 12월 13일 현양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게 됐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덕에 좋은 결과를 볼 수 있게 됐다. 협조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철영 선생도 지역에서 유명한 분인데?
경술국치 당시 서산경찰서 게시판에 나붙은 ‘한일합방 포고문’을 찢어버리고, 불사르며 항거한 의인으로 이일로 체포돼 공주형무소로 이감 중 왜경 순사부장 재등상웅(齎藤常雄)을 척살한 인물이다. 이후 이의영으로 개명하고 30여 년 간 은거생활을 하면서 당진군 송악읍 기지리에서 한학을 가르치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서거했다.
서산지역에서는 이철영 선생의 의로움을 높이 평가해 지난 1960년 시청 앞에 의사 추모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지역의 많은 뜻있는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본인의 삶도 기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 전쟁당시 중3이었는데 주변 학생들의 뜻에 의해 민청위원장(학도호국단과 유사)을 맡게 됐다.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그일 때문에 3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감옥에 있을 당시 감옥 창살 너머의 달을 보라보며 ‘살아서 나가기만 하면 고향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도 모든 일이 쉽지 않았다. 사상의 냉전이 날카로웠던 때라 사회의 편견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감옥에서의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고향발전과 관련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다. 그 후 고향사람들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지난 2000년 서산관내 최초로 면지를 발간하는 등 기억에 남는 일이 많다. 여생도 고향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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