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성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교학처장

‘서산유래비’ 용어사용 논란에 대한 ‘최영성 교수’의 입장

지난 제20호(7월 13일자) 특별기고 ‘오호통재! 너무 슬프다 어찌 이런 일이?’에서
김종옥/이은우 씨는 서산지명유래비의 ‘반역향’과 입비취지문 등의 ‘배반의 땅’이라는 기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잘못된 서산지명 유래를 후손에게 전할까 두렵다는 뜻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최근 비문을 지은 최영성 교수가 서산시대에 자신의 입장을 밝혀왔고, 최 교수의 특별기고문을 이번호에 기재한다.      
 

  Ⅰ.

사람이 살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얻기도 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횡액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서산유래비의 비문을 짓고 나서 이런 구설수에 오를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이 비문을 개인 문집에 넣어 집안에 전하려고 할 정도로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향토사학자를 자처하는 모씨가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학자연(學者然)하면서도 마치 토호(土豪)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비문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비문 내용 운운하지만, 기실 향토사학자이며 지역 원로인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은데 대한 섭섭한 감정의 발로라고 한다. 내가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은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다. 서산인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유래비 건립을 두고, 억지로 트집 잡아 서산 지역의 여론을 분열시킨 뒤 무엇을 얻고자 함인지 묻고 싶다. 그것도 주민 통합에 앞서야 할 노경(老境)의 원로들께서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행동을 해서 박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의 글을 비판할 때는, 비판할 내용과 관련하여 한 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준비를 하여,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글을 자세히 읽지 않고 앞뒤 문맥을 잘라버린 채 공격의 소재로 삼는다면, 일시적으로는 통할지 모르지만 끝내는 남의 비웃음을 사기에 이른다. 세상에 눈 밝은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인가. 내 생각이 옳고 남의 생각은 그르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특정 분야에 이른바 ‘전문가’로 데뷔한 사람이 아닌 경우는 더욱 겸손할 필요가 있다.


  Ⅱ.

당초에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에 웃어넘겼다. 그러나 비문의 찬자인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한다.
  저들은 처음 다음 몇 가지를 문제 삼았다.

  1. ‘부성민란’이란 표현을 쓸 수 있는가?
  2. ‘반역향’이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3. 복군(復郡)이라야 맞는데 왜 ‘독립’이라고 했는가?
  4. 충렬왕이 정인경을 ‘받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로서는 하나같이 대답할 거리가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해명을 하였다.

  1. ‘부성민란’이란 말은 비문에는 없고 취지문에 들어 있다. ‘민란’이란 현대적 개념이다. 󰡔고려사󰡕 등에서 ‘민란’이란 표현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무신정권이 민란으로 인식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란’이란 명명은 이제 각종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민란’이란 ‘힘없는 민중들의 정당한 항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서산 시민에 대한 모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한 측의 역사의식의 부족을 꼬집고 싶다.

2. ‘반역향’이란 명칭은 집권 측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패역(悖逆)’ 운운한 대목이 있다. 당시 무신정권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다. 그런데, 패역이란 말은 반역보다 훨씬 강도가 센 말이다. 패역이란 윤리, 도덕적으로 인간 이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주로 정치적인 사건에서 사용되는 ‘반역’이란 말과 일정한 구분은 필요하다.
  나는 비문에서 “무신정권은 부성현을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고을을 없애고 관호(官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집권 측에서 반역향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102년간이나 사실상 고을을 없앴던 것이다. ‘반역향’이라는 것과 고을 폐쇄는 상호 연관 관계에 있다. 후세의 평가와는 별개로 한 역사적 사실의 원인과 결과인 것이다. ‘반역향’이란 지역민의 연대 책임을 묻는 전근대 시기의 정치적 유산이다. 오랜 역사적 산물을 놓고 그 근거를 묻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더욱이 내가 ‘반역향’이란 말을 통해 은근히 서산 시민을 모욕한 것처럼 몰아가려는 태도는 음험하기 짝이 없다. 나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본다.

3. ‘복군’이냐 ‘독립’이냐의 문제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서산이란 한 고을의 역사성,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복군’이 될 터이고, 정치적 예속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독립’이 될 것이다. ‘복군’과 ‘독립’을 번갈아 썼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은 마치 ‘광복’이냐 ‘독립’이냐 하는 문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립군’과 ‘광복군’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4. ‘받들었다’는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은 그야말로 생트집 가운데 생트집이다. 사전을 보라! ‘받들다’는 ‘공경하여 예우하다’로 되어 있다. 한 예로 “유비는 제갈공명을 스승으로 받들었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는 이상과 같이, 간단하지만 할 말을 다하였다. 나의 글을 읽어본 양심적인 지식인, 학계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하등의 문제가 없는 내용을 왜 생채기를 내려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나는 글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수백 년을 가는 금석문임에랴. 그런데 저들은 이제 ‘반역향’이라는 용어 하나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려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고장에 대한 사랑은 정말 고귀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향토 사랑이 지나쳐 ‘자기만의 도그마’에 빠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또 이 일로 인해 어른대접 받아야 할 노인들이 지탄을 받는다면 그 아니 슬픈 일인가.


  Ⅲ.

나는 이번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사람이다. 예우나 잘 받고 이런 일은 당했다면 ‘시기와 질투 때문이려니’ 치부할 수도 있겠다. 다만, 속상한 가운데서도 한 가지 애써 자위할 것은 있다고 본다. 이번 일이 있었기에, 서산 시민들이 자기 고장의 유래에 대해 한 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반역향’이란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좀 더 살펴 이해를 돕기로 한다.
  ‘반역향’이란 역사적인 용어다. 이 용어의 근거는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에 있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통제력 강화에 그 목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반역향에 대한 징치(懲治)가 있어왔다. 큰 틀에서는 󰡔주례󰡕를 근거로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좀 더 구체화한 당률(唐律: 중국법)에 의거하여 시행하였다. 내용을 보면, 일차적으로 반역의 당사자와 혈족을 철저하게 다스리고 해당 지역의 수령에 대한 징계를 엄하게 하였다. 이어 그 지방민에 대해서도 연대 책임을 지웠다. 고을의 격을 강등시키거나 고을을 아예 폐쇄하기도 하였다. 서산의 경우 ‘강등’보다 훨씬 더 무겁게 다룬 결과라고 보겠다.
  본 비문에는 ‘반역향’이란 말이 꼭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무신정권의 폭압성이 제대로 드러나며, 집권층의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부성현 민중의 ‘의로움’이 더욱 부각된다. 또 정인경 같은 선각자의 노력으로 상황이 180도 반전된 극적 기쁨이 배가되는 것이다. 이점을 간과하거나 애써 외면한 채, ‘서산 시민에 대한 모욕’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그 유치함을 나무랄 정도도 아니다.
  근대의 민족사학자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상의 반역아’란 글을 연재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의 적지 않은 반역적인 거사들은 역사의 동력이자 발랄함’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발전의 계기를 역사상의 반역사건을 통해서 찾으려 했다. 문일평에 의하면, 부도덕적이고 폭압적인 집권층에 저항하고,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이런 역동적인 노력들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논리에 비추어보면, 힘없는 민초(民草)들의 항쟁으로 초래된 ‘반역향’이란 명칭은 부끄럽거나 모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후세 서산 시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될 문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후세의 역사적 평가’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라 하겠다.


  Ⅳ.

서산 유래비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정당하게 세워졌다. 비문 내용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최종 자문을 거쳐 확정한 것이다. 자문위원들은 역사학 전공자들이다. 당시 자문에서 ‘반역향’ 운운하는 대목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근자에 지곡면 일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글을 지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비의 건립을 지원한 시장을 ‘서산시민의 반역자’ 쯤으로 공격하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혹여 옛 부성현의 치소(治所)가 지곡면에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은 아닌가? 지곡면에 치소가 있었다고 믿는 그들의 신념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학계에서 그 말을 인정하는 학자가 몇이나 될지는 스스로 헤아려 보시기 바란다. 또 설령 백보를 양보하여, 지곡면에 치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번 유래비와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논리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뚜렷한 논리나 근거 없이 지역 언론 매체를 통해 어른스럽지 못한 표현으로 ‘선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 것은, 양식 있는 이들의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서산을 아끼는 사람은 ‘말없는 다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자신들만이 서산을 잘 알거나 사랑하는 것처럼 자임하는 태도는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투정’으로 빚어진 이번 비문 논란을 일소(一笑)에 붙이려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공식 입장을 다시금 천명한다. 이것으로 논란이 종식되기를 기대한다. 서산의 지성인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으로, 정치적 선동이 서산 땅에 발 붙이지 못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서산의 여론이 분열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2015. 7. 29)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