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숙(수필가, 수석동)

아버지는 평생 술을 못 끊고 어머니는 아버지 끈을 놓지 못하고 속이 새카맣게 타서 살으셨다. 술이 그렇게도 맛이 있었을까?

“술 애주가 여러분! 술은 어떤 맛입니까?”

“대답 좀 해 보슈! 여러분들도 술을 잡수시면 울 아버지와 똑같이 연극을 합니까?”

“아버지가 술 잡수시고 저녁 늦게 들어오셔서 일인 5역이란 연극을 하고 계십니다. 관객은 두 살 먹은 동생부터 두 살 터울로 계속 다섯 명이 더 있습니다. 어머니는 배역이 아닌 배역으로 연신 집둘레를 돌다가 방에 앉아 있다가 아버지의 느닷없는 부탁에 부엌에 가셔서 생솔가지를 때서 술국도 끓입니다.”

아버지의 연극은 리허설이 없는 연극입니다. 아버지의 연극 1막이 얼추 끝이 날 때면 관객은 각자가 쭈그리고 잠이 듭니다. 아버지도 연극 하시느라고 힘이 빠졌는지 옷을 풀어 헤치고 스르르 쪽 마루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보니까 남편은 술을 한 잔도 먹지를 못했다. 그리고 아버님은 반주로 한 잔씩만 챙겨서 잡수시었다. 참 다행이었다. 아들 녀석 하나 두었는데 아들도 도통 술 먹을 줄을 모른다. 아들 녀석이 군인을 마치고 돈을 벌겠다고 사회로 가면서 첫 마디 하는 소리가

“나는 사회에 나가면 술을 먹을꺼유.” 한다.

“왜?

“이유가 뭔데?”하니까, “아버지는 술을 안 잡수셔서 큰 사람이 안 되었잖유.” 한다.

“그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니까 너는 큰 사람이 되어봐.”

아들이 보기에는 술 먹는 사람만이 큰일을 하고 좋아 보였나 보다. 이웃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아들은 직장을 따라 시내로 이사를 갔다. 빈집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다가 나가고, 여러 사람들이 들고 나기를 몇 번 하더니 나중에는 쓰레기만 잔뜩 쟁여 놓고 아주 나가 버렸다. 대문도 부서지고 안마당과 밖에 마당은 풀이 수북이 쌓여서 발 디딜 틈도 없다. 하루는 큰맘 먹고 풀을 헤쳐 가면서 창고를 들여다보았다.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잔치가 나면 쓰던 그릇들이 눈, 비 맞고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다. 노란 양은 주전자는 짝을 잃지 않으려고 끈으로 묶여 뒤엉켜 있다.

저 끈이 무엇이기에 어머니는 아버지 끈을 놓지 못하고 김 씨 가문에서 묶여 살았을까?

그까짓 거 한 몸 훌적 가출하면 될 것을... 묶은 끈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끈. 연결고리인 자식들 때문이었을 거다. 본인의 뜻대로 한건 아니지만, 당신 자리를 남의 여자에게 내어 주고 우리 집으로 둥지를 다시 옮긴 것이 한이 되어 어머니는 평생 말씀 한번 크게 못하시고 울움 조차 삼켜야만 했던 작은 새였다.

옛날에는 잔칫날 술 담는 주전자를 한꺼번에 장만하기기 버거우니까 주전자를 빌리러 다녔다. 저 주전자로 우리 아버지는 술을 얼만큼 잡수셨을까?

“야!”

주전자 너희들 전성기 적에 술 때문에 울 엄마는 속이 새까맣게 탔지 뭐냐?”

주전자들이 너도나도 경험담을 이야기 한다. 가슴이 푹 패인 찌그러진 주전자가 먼저 나선다.

“나는, 토방에 있는 돌한테 부딪혀서 찌그려 진거야.”

“나는 어느 분이 막걸리를 실컷 먹고 네 까진 게 뭐냐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에 마당에 냅다 집어 던지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지, 얼마나 창피했던지 몰라.”

“그렇지만 짚을 깔아놓아서 많이 다치진 않았어!”

또 다른 주전자는 나도 할 말이 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린다.

“빨리 말 해봐.”

“빨리 하긴 성질도 급하셔.”

“나는 실컷 두들겨 맞았지 뭐야?”

“누구한테 맞았어?”

“늙은 기생이 쥐 잡아 먹은 듯이 입술에 빨갛게 루주를 바르고, 이 남자 저 남자가 주는 술을 받아먹고 분풀이는 나에게 하는 거야, 노래는 육두문자로 개 끌어가는 소리에 젓가락 장단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두들겨 대는 것이여.”

“나도 종일 술을 나르느라고 술독에 부딪히고 어린 것들 한테 얻어터지기도 하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주인집도 못 찾아오면 바뀌었다고 타박 놓고, 요즘 세상이 변해서 소주랑 맥주가 나오는 바람에 창고에서 몇 년째 이러고 있지.”

“나 좀, 구제 해 줘.”

“매일 연극하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살다가 이젠 직장을 잃었거든.”

“그럼 까치 쫓는 일이나 해봐. 뚜껑으로 배가 불뚝 나온 너를 두드리면 다이어트도 되고 시끄러워서 까치들이 날아가겠지?”

아버지는 술만 좋아 하신 것이 아니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한 학자이셨다. 오빠들은 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다 서당을 차려 놓고 학교에 못간 학생들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시조 잘 읊으시고 훤칠한 키에 유머가 풍부해 식구들은 물론 남들까지 항상 웃겼다. 동네 초상이 나면 축과 만장쓰는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마루에 천을 길게 늘어놓고 만장을 쓰면 어린 나는 아버지의 글을 읽어 보았다. 전체 생각은 안 나지만 ‘가시는 길 고이 가시옵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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