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옥 / 이은우

▲ 김종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서산지명유래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2015년  2월 1일 서산시청 앞에는 높이 2.5m,가로 80㎝ 두께40㎝의 거대한 “서산(瑞山) 지명 유래비”라는 비(碑)가 세워 졌는데 그 내용 중 첫 문단에는

 『1182년(명종12)에 부성현의 현령(縣令)과 그 보좌관인 현위(縣尉)가 대립, 갈등함으로써 현민(縣民)들의 고통이 컸다. 이에 백성들이 봉기하여 ,아문(衙門)을 폐쇄하고 현령과 현위를 감금했다. 무신 정권은 부성현을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고을을 없애고 관호(官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낱말의 뜻

  『한국국어사전위원회편, 대국어사전(문학박사 이숭녕, 문학박사 남광우, 문학박사이응백, 국어학자 최학근, 국어학자 지춘수)

〇반역향(反逆鄕)=조선 때 반란이 일어났거나 이에 동조한 지방, 이 고을 사람들은 관계(官界)의 등용에 제한을 받았음 』

 이 국어사전에 의한다면 반역향(反逆鄕)이란 용어는 조선조 때부터 비로소 생긴 용어로 고려시대 더구나 1182년(명종12)경에는 용어조차 없었다 할 것이다

라고 비문에 썼고 ‘입비취지문’과 ‘역사속의 서산’이란 글에는 취지문에1회 역사속의 서산‘이란 글에2회 우리지방을 “배반의 땅”이라 기록해  총3회나 강조 하고 있고 민란(民亂)이란 용어도 각 2회씩 4회나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가 서산에 대한 역사 기록에 있다 하더라도 17만 시민을 대표하여 시정(市政)을 수행 하는 지고(至高)의 위치에 있는 서산시장이  반역(叛逆)이란 단어는 스쳐 듣기만 하여도 섬칙한 것인데  반역(叛逆)의 역사를 크게 찬양  거비에 새겨 시청 정문 앞에 세워 영원히 현창 하려는 의도가 있다 할 것이다.  시장으로서 이러 한 일을 한 목적과  목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다시 말 하지만 이러 한 것이 역사책에 있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방사 기록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 신중하고도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간략히 기록하는 것이 예(例)이다.

 반역(叛逆)을 현창키 위하여 거비(巨碑)거나 작은 비(小碑)이거나 간에 비(碑)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필자들이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지만 들어 본 일 없다.  이 거비를 세운 저의가 앞으로 우리지방을 반역향(叛逆鄕)으로 만들려는 뜻을 가지고 한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역사서를 찾아보아도 우리 서산지방이  반역향(叛逆鄕)이었다는 역사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부성현 폐현에 대하여는  정사로는 고려사절요의 기록  밖에 없는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1182년(명종12)의 부성현(富城縣)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〇, 罷管城富城二縣 先是管城縣令洪彦虐民淫荒無度吏民殺彦所愛妓逐執幽之有司按問流首謀者彦亦廢錮終身又富城縣令與縣尉不相能害及無罪縣之逐殺尉衙宰僕及婢因閉令尉衙門使不得出入有司奏二縣悖逆莫甚請削除官號勿置令尉從之.

〇관성과 부성4) 두 고을을 폐했다. 이보다 앞서 관성현령 홍언(洪彦)이 백성들을 침범탈취하고  음흉하고 황당함이  한도가 없어 아전과 백성들이 홍언이 사랑하는 기생을 죽이고 또 기생의 어미와 형제들도 죽이고 마침내 홍언(洪彦)을 잡아가두었다. 유사(有司)가 살펴 문책하되 주모자들을 귀양 보내고 홍언도 폐출하고 종신토록  금고 시켰다.
 
또 부성 현령은  현위와 사이가 나빠 폐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 미치니 온 고을이 괴로워하여  드디어 현위의 남자종과 여자종을 죽이고 아문을 폐쇄 현령과 현위의 출입을 못 하게 하였다.

유사가 아뢰기를  두 고을은 패역(悖逆)함이 더 할 수 없으니 고을 칭호를 삭제하고 영위를 두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의견을 좇았다. 끝

4)관성은 충북 옥천이고 부성은 충남 서산,,
5)금고(禁錮)고려시대 죄과 혹은 신분에 허물이 있어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던 일

※ 낱말 뜻

1. 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 지음)
  〇패역(悖逆)=패역하여 불순함.
  〇반역=①통치자에 반대하여 나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
               ②제나라 제 겨레를 배반함
2. 국립국어연구원  표준어 국어사진/두산동아발행
  〇패역=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름
  〇반역=①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②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
           
3. 동아 새 국어사전
    〇 패역(悖逆)=인륜에 어긋나고 불 순 함(悖=어그러질 패. 逆=거스를 역)
   〇 반역(反逆)=명사①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 민족반역행위 ②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 - 반역을 꾀하다.
4. 네이버국어사전
  〇 패역(悖逆)=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슬러 불순함.
  〇 반역(反逆/叛逆)=①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②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함

 이상이 역사 근본 기록으로 전부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 것인데 반역향(叛逆鄕)이란 구절은 어느 곳에도 없다. 반역(叛逆)이란 임금이나 나라를 부정하고 배반하는 것이고 부정한 탐관오리에 반항한 것은 윤리도덕의  문제지 반역(叛逆)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민란(民亂)이란 것도 왕이나 나라를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규모가 커서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여야 하는 것인데 작은 불상사(不祥事)를 가지고 민란(民亂)이라 하는 것은 대단히 과장 된 것이다. 이미 본 역사기록에 민란(民亂)이라한 기록이 없다. 민란이 있었다면 진압 했다는 내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면 당시 부성현의 현령(縣令)과 현위(縣尉)의 이름을 왜 밝혀 내지 못 하는가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성민란’이란 것은 어느 누군가가 창작(創作)해 낸 것이다. 당시현령과 현위의 이름을 안다면 말해 보라.


 우리나라 지방사를 가장 잘 밝히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서산조(瑞山條)의 건치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建置沿革
本百濟基郡新羅改富城高麗仁宗置縣令明宗十二年逼令尉幽之有司奏除官號忠烈王十年以邑人鄭仁卿有功今名陞爲知郡事三十四年陞瑞州牧忠宣王二年例降爲瑞寧府後又降知瑞州事本朝』

※ 세종실록지리지(1454년(단종2)간행. 호산록1619년(광해11)편찬. 여지도서(1759년(영조35)간행.서산군지(1872년간(고종9)등에 기록된 서산의건치연혁     은 이 여지승람  건치연혁과 대동소이하다.

※1 현인(縣人)= 현인(縣人)이란 그곳에 사는 백성을 말 하는 것이 아니고 아전(吏)을 말하는 것으로 백성을 말 할     때는 현민(縣民)이라 함
 2 핍(逼=닥칠 핍. 핍박(逼迫)=바짝 다가와서 사태가 매우 절박해 짐. 바짝 죄어서 괴롭힘)

번역문(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인종(仁宗)때에는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明宗)12년에 고을사람이 영위를 협박하고 가두었으므로,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號)를 제거 하였다. 충렬왕(忠烈王)10년에 읍 사람 정인경(鄭仁卿)이 공로가 있었던 까닭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34년에는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 되었다. 충선왕 2년에 예에 의하여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고, 뒤에 다시 지서주사( 知瑞州事)로 강등한 것을 본조 태종13년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한 것이다.

※ 어디에도 반역향(叛逆鄕)이란 문구가 없는데 느닷없이 이를 함부로 창작(創作) 거비에 새겨 넣어 우리지방의 명예를 훼손시킨단 말인가 !  서산 지역은 어디나 모두 옛 부성현(富城縣)땅이지만 . 특히 비의 건립으로 부성(富城)고을의 관아가 위치해 있었던 지곡면지방의 명예 훼손은 더욱 심각 하다. 지곡면은 면명(面名)이 지곡면(地谷面)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이름을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이 부성태수로 7년간이나 재임 했던 것을 영예로 알고 “부성초등학교”로 하여 이제 85년에 이르러 4,543명의 졸업생을 배출 그들이 애국심을 가지고 국내외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지금도 유치원생43명 초등학교 재학생 481명 계524명의  학생들이 교명에 대한 명예와 긍지를 갖고 희망 속에 공부하고 있는데 부성이란 이름이 하루아침에 반역(叛逆)의 고을 이름이라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한처사가 아닌가?.   서산시장이 앞장서서 말이다.

 이렇게 지역과 교명의 명예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 법적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인쇄물 취지서문과 서산의 역사라는 곳에는 우리지방을  “배반의 땅” 이라 써서 많은 인쇄물을 전국적으로 배포 홍보 했을 것으로 추정 되는데 그 목적 하는바 저의가 정말 궁금하다. 요새 언론에서 매일 보도 논의 되는 것 같이 배반이란 것이 얼마나 나뿐 것인지 시민 모두 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조선조 중기 나라를 뒤집으려는 반역자가 생긴 어느 도(道)를 반역향(叛逆鄕)으로 지정하고 그 지역 사람들의 벼슬길을 제한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모르긴해도 최근세 까지도 그 지역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로 인해 많은 불이익을 받아 왔다는 사실은  알고들  있을 것이다.

 우리 지방이 배반의 땅 반역향(叛逆鄕)이었다는 내용의 비석을 세워 크게 홍보하는 이 홍보효과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다면 우리지방 사람들이 그동안은 서산이 양반고장 충청도이기 때문에 충절의 고장 출신으로 인정받아 왔을 뿐만 아니라 서산사람들의 품성이 영악치 않아 말은 느려도 의리 있고 인심 좋은 고장출신이라는 평을 받아 왔기 때문에 쉽게 살아 왔지만 앞으로는 서산 출신자들이 반역향 출신자들이라는 인식을 받게 되면 외지에 나가 발붙여 살기가 정말 힘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서산의 본적을 갖고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본적을 옮겨야 하는 엑스더스(Exodus)현상도 일어날 것이고 이에서 오는 피해는 물량으로 계량 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타 지역에서 우리지역에 대해서 그런 비하하는  말이 나오더라도 앞장서서 막아야 할 시장이 많은 예산을 투입 이런 오욕된 글을 써서 시청 정문 앞에다 거비를 세우고 인쇄물을 만들어 홍보 하다니 너무 슬픈 일이다.

 글을 쓴 사람도 나쁘다 할 수 있지만 이를 추진한 주최 측과  그리고 비를 세운 사람이 더 나쁘다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비의 글을 짓는 것은 하나의 용역자의 위치이다. 비문 내용은 어느 비문을 막론하고 예(例)가 이를 추진하는 사람과 세우는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1182년(고려명종12)이후 지금까지 우리지방에는 수 많은 효자열녀 충신이 났지만 서산출신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반역에 몰려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산(瑞山)이라는 관호가 정말 불길한 반역향(叛逆鄕)에서  연유된  이름이라면 이제는 서산(瑞山)이라는 관호를 과감히 버리고 시민들에게 긍지와 희망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길(吉)한 관호(官號)로 개호(改號)하는 문제도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그 외 이 비문 중에 봉기(蜂起)했다거나 충렬왕이 신하인 정인경을 지성으로 받들었다거나 서산군으로 독립시켰다거나 부성현을 독립시키고 등 마치 우리지방을 독립국(indpendence)으로 만들었던 것 같은 부적절한 단어도 보이지만 이글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고려조나 조선조에서 독립이란 용어는 쓴 적이 없다. 다만 구 한 말인 1896년 대(對) 청나라로부터 우리나라가 완전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해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조직되고 옛 영은문(迎恩門)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뒤부터 독립이라는 단어가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 한 것이다.

『역사속의 서산 -서산유래비 건립과 즈음하여-최영성=비문 쓴 사람(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철학박사)에서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2단 글

 -서산이 오늘에 이르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이제 근본을  되돌아보고 서산의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뿌리 없이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 없듯이 .자신의 근본을 제대로 알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를 소중하게 지키고 가꾸어  나 갈 때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의 서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의미 있는 일이다-』

 이 글을 보면 서산사람들에게 서산의 뿌리 역사가 반역향(叛逆鄕)이란 점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강조 한 것 같이 생각되어 매우 치욕적으로 느껴진다.  

 끝으로 17만 서산의 시민이여 ! 이일로 인한 폐해는 특정인  몇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재지(在地) 전 시민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출향인 모두에게 까지  미치는 중대사다. 우리 모두 각성(覺醒)동참해서 우리고장의 이름을 더럽혀 훼손하는 이 서산지명유래비를 맨 손으로라도 뽑아 파훼 분쇄 짓밟아 흔적을 없애 버립시다.


                     서산(瑞山)지명 유래비  (비문 전면)

 서산시는 본디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다. 통일 신라시기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다.신라 말엽에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이 부성군 태수를 역임 하였다.고려 인종때 부터는 현(縣)이 되었다.
명종12년(1182)부성현의 현령(縣令)과 그 보좌관인 현위(縣尉)가 대립 ,갈등함으로써 현민(縣民)들이 봉기하여 ,아문(衙門)을 폐쇄하고 현령과 현위를 감금 했다.무신정권은  부성현을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고을을 없애고 관호(官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10년(1284)에 부성현 출신 양렬공(襄烈公)정인경(鄭仁卿):瑞山鄭氏始祖)이 국가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시켰다. 102년만의 복군(復郡)이었다,정인경은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귀화한 성리학자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다. 문무를 겸전 했던 정인경은 누란(累卵)의위기속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 하였고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부터 그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관호가 없이 내려오던 부성현을 독립시키고 군으로 승격 시킨 일이다. 충렬왕은 복 군을 단행할 당시‘상서롭다는 ’의미를 넣어 ‘서산군( 瑞山郡)이라 명명하였고 ,충렬왕34년(1308)에는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서령(瑞寧)으로 바뀐 적은 있지만  조선태종13년(1413)에 다시 서산군이 된 이후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 하여 왔다.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뒤 서산백성들은 정인경의 공을 기려 해마다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조에는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셨다. 서산의 향리(鄕吏)들은 매년성황제때 정인경의 관복을 관아 앞에 걸어 놓고 황소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그날은 군수도 공무를 쉬면서 정인경을 추념 하였다.

그 세월이 3백여 년 이었다. 임진왜란이후 성황제는 단절 되었다.향화(香火)가 끊긴지  4백년이 헐씬넘은 2012년 제11회 해미읍성 역사체험 축제장에서 정인경에게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전통을 오늘에 되살렸다. 서산이란 이름을 얻게 한 정인경의성덕(盛德)은 꺼지지 않고 서산시만의 마음속에 영원히 전할 것이다.

※「이면」
서산지명유래비는 서산시민의역사적 정체성확립과 양렬공 정인경선생의 공을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서기2015년 2월 1일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최영성 글을 짓고
양렬공 정인경기념사업회장    문철주  추진하여
서    산     시   장         이완섭   세우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