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마을공동체탱자성협동조합 사무국장

문을 나서는 나에게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어디가니.”

“마실 다녀올께요.”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밤이 되면 이웃동네 친구들 집으로 마실을 가거나 친구들이 우리집에 마실을 왔다. 마실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마지막 추억이다. 하지만 마실 다니던 그때의 기억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사전적 의미로 마실은 “마을”의 방언이다. 마실을 가는 것은 우리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놀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실은 공간적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우리는 마을에 살며서 마을에서 마을로 공간적 소통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을 마을공동체라 부른다.

‘가족’이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구성체이자 공동체라면 ‘마을’은 가족과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지역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 사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작금의 마을은 젊은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보내고, 늙으신 부모님들만이 어렵게 어렵게 지키고 있는 노령화되고 쇠약한 마을로 변해버렸다. 우리마을과 이웃마을의 공간을 잇던 마실이 사라지고 마을공동체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마을공동체의 순기능은 많다.

첫째, 마을은 자치활동의 주체다.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일을 서로 공유하면서 참여를 통해 공동으로 마을을 가꾸고 지켜가고 있다. 자치의 기본 조건인 참여를 마을주민 스스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범죄없는 마을’처럼 치안도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가진 것이 마을자치다.

둘째, 마을은 돌봄 기능이 작동하는 복지전달체계의 기본 토대다. 우리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전체가 함께 돌봐야 한다. 예전에는 그랬다. 마을에서 마을의 모든 아이들을 케어하고 돌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했다. 마을의 돌봄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아이들이 마을에 대한 소속감과 어른들에 대한 예절을 배우며 자랐다.

셋째, 마을은 경쟁이 아닌 협동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경쟁을 통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성격을 가진 자본주의의 불평등, 불균형의 모습이 아닌 협동, 협력의 모습으로 사회적경제의 틀을 가진 마을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을공동체의 순기능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마을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 복원 등 다양한 사업들의 기획되고 추진되고 있다.

나는 벽화마을을 제안하고자 한다. 울퉁불퉁 담벼락에 그려낸 벽화가 대단한 문화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벽화를 그린다. 예술가들의 손으로, 자원봉사자들의 손으로, 마을주민들의 손으로 그려진다.

전국의 대표적인 벽화마을을 살펴보면 통영의 ‘동피랑마을’, 부산의 ‘감천문화마을’, 전북 전주의 ‘자만벽화마을’, 충북 제천 ‘교동벽화마을’, 강원도 묵호역 ‘논골담길’, 강원 태백시 ‘탄광이야기마을’, 서울 혜화동 ‘이화벽화마을’, 홍제동 ‘개미마을’ 등이 전국에서도 이름난 유명한 벽화마을이다.

공통적인 것은 주민들의 삶이 묻어나 있는 마을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오랜세월 마을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때가 묻어있는 마을 곳곳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 담벼락에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졌다. 헐떡이면 오르내리는 언덕길 담벼락과 계단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주제도 다양하다. 마을사람들의 삶을 이야기로 표현한 벽화도 있고, 작가의 상상력이 그려진 벽화도 있고, 희망을 주는 그림들과 재미있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벽화도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유명한 그림보다 언덕길 달동네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삶의 희망과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것을 왜일까? 우리는 왜 마을벽화를 보면서 위로를 받고 잔잔한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가 우리들의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공간안에 그려진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마을벽화를 그리는 것도, 벽화마을을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마을과 마을을 잇던 마실이 사라진 지금 벽화마을 조성을 통해 노령화된 마을에 나그네들이 찾아오게 하자. 나그네들의 지친 삶을 위로하고 위안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마을공동체를 만들어보자. "마을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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