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낙원식당’ 복원은 민족혼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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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낙원식당’ 복원은 민족혼의 부활
  • 박두웅
  • 승인 2019.08.0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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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몸부림

‘낙원식당’은 서산 땅에서 펼쳐진 전통문화예술의 독립운동
심화영 선생 10주기 내포제 전통춤의 향연이 서산문화회관에서 펼쳐졌다. 사진은 공연을 마치며 관객에게 인사하는 출연진 모습.
심화영 선생 10주기 내포제 전통춤의 향연이 8월 3일 서산문화회관에서 펼쳐졌다. 사진은 공연을 마치며 관객에게 인사하는 출연진 모습.

 

일제 강점기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전통공연예술 분야의 몸부림 속에 근대 전통공연예술의 기원이라 칭하는 서산출생 심정순가(家)가 있다.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판소리와 가야금병창, 산조, 재담 등으로 일가를 이룬 뛰어난 국악명인으로 큰아들 심재덕과 큰딸 심매향, 작은딸 심화영, 조카 심상건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인 국악인 심정순가(家)를 이루었다.

최근 일본이 ‘한국,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라는 경제침략을 노골화 하고 있는 가운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것’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전통문화예술계의 거두 심정순가(家)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20세기 초반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은 심정순은 당시 서울무대를 쥐락펴락한 최고의 예인으로 인정받았다. 1910년대 초반 서구식 극장인 장안사 소속으로 이른바 ‘심정순일행’을 꾸려 지방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또 1911년 음반취입을 하고, 신문연재,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선구자적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심정순은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강점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가무악을 보전 전승하기 위해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내포제 거장 홍성 출생의 한성준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등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특히 ‘쇠퇴해가는 조선 가무악의 침체’는 그들로 하여금 민족예술을 보존 계승해야 한다는 책무를 일깨웠다. 이들의 노력은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 조선’이라는 상호 이항대립적 노정에서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일종의 몸부림으로 간주된다.(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화영 선생 10주기 기념 학술세미나 중에서)

 

▲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 옛 모습 그대로의 대들보가 보존되어 있다.
▲ 철거되기 전 낙원식당의 옛 모습.

 

서산율방시대를 이끈 ‘낙원식당’

 

부친 심팔록으로부터 국악을 사사한 심정순의 기예는 심상건을 비롯하여 심재덕, 심매향, 심화영, 심태진 등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중고제 혹은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중심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현대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심정순가(家)는 대대로 서산에 터를 잡고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 온 가문이다. 그중 심화영은 아버지 심정순이 주로 서울에서 활동한 까닭에 1913년 서울 익선동에서 태어났다. 4세 때에는 온양 신창으로 이사하여 초등하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13세 때 근대 여성교육의 명문 이화학당에 편입하여 학업을 마친 신여성이었다.

그런 심화영이 전통예능에 처음 입문한 것은 18세 무렵이다. 오빠 심재덕에게 가야금풍류를 비롯 가야금병창, 양금, 판소리 등을 익혔다. 심화영은 19세 무렵 오빠 내외와 함께 서산에 내려와 ‘낙원식당’을 차렸다.

서산의 낙원식당은 전통예인들의 사랑방으로 내포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당시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예인으로는 명창 이동백을 비롯 김창룡, 한성준, 이화중선 등 당대 내노라하는 명인명창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처럼 ‘낙원식당’은 우리의 가무악을 지켜내는 아지트요, 전통예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나 율방 ‘낙원식당’은 1930년대 들어 전통예술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 핍박이 거듭되면서 심화영이 오빠 심재덕과 함께 청진으로 이사를 가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청진권번은 조선의 전통예인들이 핍박을 피해 집결해던 곳으로 한성준은 춤사범으로, 심재덕은 악기사범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청진권번 또한 1940대 초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

청진권번의 폐쇄로 서산 고향으로 돌아 온 심화영은 농악대의 이름 난 상쇠잡이 송운석을 만나 결혼 했고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지난 2000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심화영은 서산에서 2009년 9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리, 장고, 가야금병창, 입춤, 살풀이춤을 가르쳤고 그의 승무는 외손녀딸 이애리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 지난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철거 당시 현장 모습1)
▲ 지난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철거 당시 현장 모습2)

 

성기숙 교수, 서산국립국악원 설립 제안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에 따르면 현재 심정순가(家)의 국악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국악음반박물관과 심화영승무보존회 그리고 춤자료관 연낙재에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라도의 동편제·서편제에 비하면 체계적인 조사연구 및 아카이브화가 부족하다. 심정순가(家)의 가무악을 제대로 보존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체계적이고 학술적 연구가 요청된다.

성 교수는 지역문화자원으로서의 보존과 함께 현재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컨텐츠 개발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낙원식당 부지에 심정순기념관 혹은 중고제기념관을 설립하여 전통예인들의 삶과 예술세계를 기념하는 동시에 중고제 전통예술의 전승과 교육의 산실로 활용해야 한다고 부언했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화영 선생은 살아 생전인 2005년 10월 11일 성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신명이 나오면 춤이 나오고, 몸뚱이가 다 놀아야 춤이 나오는 거야. 내 몸뚱이에서 신바람이 나와야 다른 사람도 춤을 추게 하지. 신명에서 나온 거면 지랄 신명이지. (세계)각국에서 다 찾아봐. 우리처럼 하는 데가 있나. 그런데 이 서산시는 틀렸어. 우리 것을 알아줘야지. 별 관심이 없어. 학생들한테도 될 수 있으면 이것을 배워서 번성시켜야지....”라고 한탄했다.

심화영 선생이 작고한 8년이 지난 2017년 12월. 선생님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본지를 비롯한 전통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

철거 당시 주차장을 만들겠다는 건물주에게 문화유산의 보존 가치에 대한 설득은 전혀 먹이지 않았다. 이에는 시 당국의 무관심도 한몫을 했다.

성 교수는 “근대 중고제의 유서 깊은 공간인 서산 낙원식당의 소실은 안타깝다 못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했다.

 

▲ 심화영 선생 10주기 기념 학술세미나. 세미나 참여 출연진 기념촬영 모습

 

성 교수는 심화영선생 10주기 기념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제부터라도 온전히 지키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며 서산국립국악원 설립을 제안했다.

더 나아가 성 교수는 근현대 전통공연예술사를 쥐락펴락한 국악명인을 배출한 서산의 문화인프라는 타 지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으로 무엇보다 심정순가(家) 전통예술의 복원을 통한 전통문화유산의 활성화 전략과 함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관광자원화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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