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대한민국 여장부 설미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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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대한민국 여장부 설미경 씨
  • 최미향 기자
  • 승인 2019.07.31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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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고비마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삶

“세상은 ‘내가 노력한 만큼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 KCC 협력업체 설미경 반장

 

# 에필로그

 

여기 산하나 사서 오갈 데 없는 어르신들과 같이 집을 지어 같이 사는 게 꿈이라는 KCC 협력업체에서 근무하는 설미경(53) 반장.

그녀를 두고 두 아들은 한결같이 “엄마 같은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거예요. 세상 모든 엄마들이 다 대단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설 여사를 따를 만한 사람은 없을 걸요”라고 한다.

늘 까르르 숨 넘어 가는 웃음과 함께 행복한 에너지를 팍팍 전파하는 그녀에게도 행복해서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던 사건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 이름으로 된 집을 샀습니다. 그때 아들과 자축하기 위해 자장면을 먹는데 갑자기 ‘고생한 엄마를 위한 선물’이라며 목걸이를 걸어줬어요.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서산시대는 호탕한 웃음 속에 늘 씩씩함을 간직한 설미경 씨를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산을 사랑한 그녀가 가방디자이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다

 

전북 순창에서 1남 4녀 중 욕심 많은 둘째로 태어난 설미경 씨.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쌍방울 방직공장에 다니면서도 야간학교에 다녔던 그녀는 “그래도 그때는 꿈이 참 많았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쩌면 일하기 위해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일에 매달렸던 어느날, 자신보다 여섯 살 아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오래 사귄 것도 아니고 겨우 3개월 만에 가방디자이너와 결혼을 했어요. 노는 날에는 산을 좋아해 산만 탔는데 제가 남자 보는 눈이나 있었겠어요. 그냥 살갑게 잘 대해주고 챙겨주니 덜컥 결혼을 했던 거죠.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그는 다니던 직장을 나와 버리더군요.”

그녀는 말하다말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잇기위해 물 컵을 들고 목을 축였다. 우리를 위한 듯 카페 안의 음악은 낮춰져 있었고 기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귀를 기울였다.

 

# “가슴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이미 수척한 가운데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남편은 집안을 꾸리기 위해 알뜰히 모아놓은 돈으로 당구장을 개업했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고스란히 빚더미로 돌아와 억장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남편은 살기위해 남의 집 목장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했지요. 당시 시부모님 역시 남의 집 목장에서 일을 해주고 계셨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는 출근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어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남편 대신 아이들을 두고 새벽부터 목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돈을 조금 모았어요. 그런데 또 남편은 그것을 들고 당구장을 오픈했고 역시 예상처럼 또 다시 빚만 지고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떠났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가슴이 타들어가는 고통이었다고 말하는 설미경 씨. 두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를 바라보고 저는 한없이 남편을 기다리며 빚을 갚아 나가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살아내려 해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즈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인 두 아들을 자리에 앉히고 뱉어내면 안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기자는 들고 있던 음식을 손으로 밀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수척한 가운데 물기를 머금었고 목소리는 자꾸만 잠겨들고 있었다.

 

 

# “우리를 낳아주신 건 고마운데 저는 형이니까 동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녀 앞에 앉은 아이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미어졌다. 더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세상의 끈을 놓고 싶어 두 아이를 불러다 앞에 앉혔는데 무슨 말로 서두를 풀어야 할까.

“엄마는 니네 아빠 때문에 도저히 힘들어서 살 수가 없다. 그냥 우리 셋 다 약 먹고 죽자.” 그녀는 이미 체념한 상태로 먼 허공을 바라보았고 큰 아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큰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엄마, 말씀 다 하셨어요? 그렇다면 약을 먹었을 때 세 명 모두 죽으면 다행인데 동생이 ‘이 약 맛없다’며 안 먹으면 어떻게 해요?”라는 것이 아닌가!

“엄마 죄송해요. 우리를 낳아주신 건 고마운데 저는 형이니까 동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엄마가 정 힘들어서 우리를 버리고 돌아가신다면 말리진 않겠어요. 대신 보험 좀 들어주세요. 저는 초등학생이라 생활능력이 없어요. 동생을 키우려면 생활비가 있어야 되는데 어디서 나올 곳이 없잖아요. 보험 들어 놓고 그때부터는 엄마 목숨이니까 엄마가 사시고 싶은 대로 사세요.”

그때 그녀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너무 큰 실수를 했구나! 이제부터는 새끼를 위해 살자!’고 다짐했다.

“그때부터였어요. 죽을 각오로 아이들만 보고 살았어요. 두려울 것도 부끄러움도 없었어요. 아이들만 생각하면 못할게 없더라고요. 고맙게도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고 우리 큰 애는 학원한번 안가고도 중·고교 모두 우수한 성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학도 원하는 곳에 들어갔구요.”

기자는 이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어 노트북을 닫아야했고, 그녀는 기자와는 달리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초점 없는 시선을 거두며 한 숨을 쉬었다.

 

# 대산공단 KCC 현장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그녀

 

기자가 연고도 없는 서산으로는 어떻게 내려오게 되었냐고 묻자 그녀는 “목장에서 인부를 구한다는 정보를 듣고 내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여직원은 구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녀는 주유소에서 주유일을 하며 서산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주유소 일은 육체적 고통보다 젊은 손님들의 폭언과 무시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딱 1년 다니고는 사표를 썼습니다.”

2008년 5월 1일, KCC 생산협력업체 구인광고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가 면접을 봤고, 그 길로 설미경 씨는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미뤄왔던 남편과의 서류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잘 한 것이 5년 전 그 남자를 놓아준 것입니다. 원체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떨어져 살아서인지 이혼 도장 찍을 때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어요. 저는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요.”

정말 그녀는 별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듯 표정이 밝아보였다.

새벽 5시 30분부터 시작하여 저녁 9시까지 죽도록 일을 했던 시간들도 돌아보면 행복이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설미경 씨였다.

 

▲ 활짝 웃고있는 그녀

 

# 여장부답게 3.5톤 이상 지게차를 손수 운전하며 공장안을 제 집 드나들 듯 누비고 다니는 그녀.

 

그녀는 KCC가 참 고맙다. 물론 몸이 힘들고 고달프긴 하지만 그래도 두 애들을 4년제 졸업은 물론 번듯한 회사에 취직까지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큰아이와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인생 역전을 시켜준 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생활의 기반을 만들어 주었고 무엇보다 두 아이들을 떳떳이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 회사가 바로 이곳입니다. 이렇게 고마운 회사에게 저는 저의 작은 힘이나마 다 갚아주고 싶어요.”

그녀는 여장부답게 3.5톤 이상 지게차를 손수 운전하며 공장안을 제 집 드나들 듯 누비고 다닌다. 그녀가 지게차를 운전하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일하다보니 지게차로 물건을 상차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사장님이 ‘휴가 떠나야하는데...’라며 매끄럽게 지게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저에게 아주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거예요. 저는 대책도 없으면서 무작정 ‘그냥 (휴가)가시라’고 했죠. 그런데 그길로 정말 휴가를 가버렸어요. ‘어떡하나. 이판사판이다’ 생각하고 ‘25톤 트럭 기사들에게 수신호 좀 해 달라’고 해서 무사히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3.5톤 대형 지게차 면허증을 땄고 여자로서는 단독으로 현장을 누비는 여장부가 되었습니다.”

 

▲ 직원들과의 유쾌한 야유회에서

 

# 소머즈 귀를 가진 그녀가 있어 지금껏 노크레임 노불량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녀는 개인적으로 회사에 애정이 많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살렸고 자신 또한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 단 한 건의 불량도 없었다는 그녀는 “다 이유가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는 바로 제 귀에 들려요. 정말 신기하죠? 에누리 없어요. 제 귀는 못 속이거든요. 저는 그럴 땐 직원들에게 말해요 ‘불량 낼 것 같으면 차라리 일하지 말고 쉬는게 낫다’고요. 이것은 곧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으라는 얘기죠.”

기자가 봤을 때 그녀의 귀는 아마도 소머즈 귀가 분명했다. 소머즈 귀를 가진 그녀에게 “그동안 휴가 때는 무엇을 하며 주로 보냈냐?”고 묻자 씩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52시간이 실행되기 이전에는 결근이나 지각, 휴가라곤 단 한 번도 쓰지 않아 잘 모릅니다. 아니 연차도 한번 안 썼던 저였어요. 아시다시피 아들이 둘씩이나 딸려있는 가장이었고 우리는 먹고 살아야했잖아요. 두 아들만 생각하면 휴가가 웬말입니까. 그런데 막상 52시간이 주어지니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했어요.

놀아본 놈이 놀 줄 안다고 당최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막막했어요. 그때 생각한게 그동안 마음에만 품고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죠. 그길로 실버공연 봉사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배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요즘 그녀의 일상은 52시간의 나머지는 어르신과 함께 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참 바쁘게 생활한다.

 

 

# “세상은 ‘제가 노력한 만큼 된다’는 것을 제 인생역전을 보며 알았어요.”

 

그녀는 말한다.

“제 꿈은 환갑 때 1년 동안 무전여행 하는 겁니다. 캠핑카를 타고 전국일주를 떠날 거예요. 그동안 사느라 바빠서 여행을 못해봤거든요.

그리고 또 있어요. 배우고 싶은 것 다 배울 거예요. 얼마 전에 우리 애들한테 말했더니 ‘제발 하시되 건강만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녀석들이 하는 얘기가 뭔 줄 아세요? 잘 키워줘서 고맙다며 ‘엄마도 인생 즐기며 사실 때가 되었으니 정말 아껴주고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언제든 우린 콜이다’는 거 있죠(웃음).”

하지만 저는 어르신들 앞에서 장구쳐주고 놀아주고... 그런 것이 더 좋아요.”

그녀는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세상은 ‘제가 노력한 만큼 된다’는 것을 제 인생역전을 보며 알았어요. 얼마전 노래 한 곡을 하기위해 노래방 모니터를 보면서 2주 동안 외웠는데 되더라고요(웃음). 노력하는 사람 앞에는 아무도 감당할 수가 없나봐요.”

기자는 그녀의 삶이 지금처럼 늘 행복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 나아가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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