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 한기홍 향토사학자

순성진(蓴城鎭)은 충남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구) 고성초등학교 뒤편의 야산에 있는 골프연습장 주변에 위치해 있다.

순성진은 조선 초기인 태조 6년(1397)에 지방의 군제개편에 따라 설치되었다. 서산과 태안지역의 지정학정 중요성에 따라서 서해안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태안반도가 그만큼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한양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황해도와 충청도는 「⊃」 형태로 서해 바다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황해도와 충청도의 바다 입구만 방어한다면 경기만이 안전해지고 경기만 안쪽에 위치한 한양의 안보는 보장되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태안의 안흥진성의 설치 목적도 순성진과 똑같은 방어목적 하에서 축성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고려말과 같은 왜구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순성진 역시도 그 일환의 하나이며 당시에 충청도내에 설치된 3개의 진(鎭) 중 하나였다.

서산과 태안 지역은 세곡미를 한양의 경창에 운송하는 조운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항상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왜구로부터 안전하게 세곡미를 조운할 수 있도록 서해안의 전초기지로 순성진(蓴城鎭)을 설치한다.

고려 인종 12년(1134)에 현 태안의 인평리와 서산의 어송리 경계에 이미 굴포운하를 개착했고 조선초에 순성진을 그 굴포운하 인근에 설치하여 운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운과 순성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에 의하면 순성진에는 유방군(留防軍) 61명, 패속군(牌屬軍) 300명, 신백정(新白丁) 58명, 수성군이 50명이 근무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순성진은 군 동쪽 14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6척, 둘레는 1,353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환여승람 고적조에서도 순성진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在泰安面有石城周一千三百三十三尺』

순성진 태안면에 있다. 석성으로 둘레가 1,333척이다.

 

태조 6년(1397)에 설치된 순성진은 왜구을 방어하는 군사적 시설이자 안흥량의 험로와 왜구의 약탈로부터 조세미를 안전하게 한양으로 운송하기 위해 시작된 굴포운하의 개착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말기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태안군은 폐허로 변해버리고, 태안군수는 겨우 아전 몇 명만 데리고 서산군과 심지어 예산군에까지 옮겨간다. 그러나 조선초에 순성진이 설치된 후에 순성진 일대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굴포운하의 개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새로운 유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세종 30년(1448)에 조정에서는 각 도에 영을 내려 유리하여 없어진 민호를 조사하고 본적지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이 때에 순성진에 거주하던 300여 호 중 104호가 이주 대상이었다. 주민의 1/3이 일시에 빠져나간다면 실질적으로 순성진의 운영이 불가능하므로 당시 순성진을 관할하던 지군사 박홍문은 이를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또한 유민들 역시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이곳을 버리고 본적지로 다시 재이주하는 데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게 된다. 결국 박홍문이 고을 사람 이숙(李熟)과 호장(戶長) 가택(賈宅) 등을 도당(都堂)에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였고, 재이주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백성들은 크게 환영 하였다고 한다.

이에 지군사 박홍문의 공적을 기리고자 주민들이 집현전의 신숙주를 찾아가 그를 찬양하는 글을 부탁하였는데 태안군벽기(泰安郡壁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세조 3년(1457)에 전국에 산재한 여러 진(鎭)과 포(浦)를 통합하게 되는데 순성진 역시도 운영상 효율이 떨어지는 곳 중의 한곳에 포함되어 서산군에 이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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