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한혜진, 노래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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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한혜진, 노래를 그리다
  • 최미향 기자
  • 승인 2019.07.17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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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인터뷰】 서산 토박이 가수 장미희

 

▲ 가수 장미희

 

# 프롤로그

 

오전 열 시가 되기도 전, 도리카페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고 실내 차가운 공기와 잔잔한 음악이 고소한 빵 내음과 더불어 기자의 눈길을 맞아주었다. 잠시 후 새로운 곡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오늘의 주인공. 왜소한 모습에 환한 미소를 간직한 그녀가 인사를 하고 기자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가수 장미희입니다.” 경쾌한 걸음에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듯 낯익었다. 서로 인사를 하며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커피를 마셨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노래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지내요. 오늘 오후도 성연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는데 아주 즐거워요”라며 그녀는 정말 신나는 듯한 음성으로 잔을 들었다.

“힘들진 않으세요? 이것저것 다 하시려면?” 기자 또한 앞에 놓인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자 “울 엄마를 보는 듯해서 힘들진 않아요”라고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녀의 말을 듣는데 기자 또한 멀리 경주에 있는 부모님 생각이 선연했다.

 

# 아무리 바빠도 요양원에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녀

 

그녀는 어르신들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시고, 때론 손을 잡으시곤 토닥여 주시는데 어떻게 힘들겠냐며 기자의 눈을 바라봤다.

“자식들은 다들 부모님께 잘 해 드리고 싶잖아요. 그런데 살아보니 제 뜻대로 안되는 게 세상살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늘 속상하고 맘이 짠 하곤 하는데 요양원가서 공연을 하면 꼭 우리 엄마에게 하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그럴 땐 내 엄마가 박수를 쳐주시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제 마음을 온전히 드리고 옵니다.”

그녀는 어르신들 눈을 못 마주 치겠다고 했다. “그분들이 우시기도 하지만 노래하다 감정이 복받쳐져서 저도 울컥하거든요. ‘나도 저럴 때가 있을 텐데...’싶기도 하고... 암튼 남의 일 같지는 않아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 우울함이 때론 한숨이 되기도, 때론 슬픔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이뿐이 왔네’라며 기다리고 계세요. 아무리 바빠도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해요. 자주 뵙지 못하는 엄마 대신 그분들이 꼭 제 엄마 같아요.”

 

# 곁에서 챙겨주는 엄마가 그리웠던 어린 시절

 

서산시 읍내동 토박이 가수 장미희, 혹 자들은 그녀를 ‘제 2의 한혜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녀.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녀의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안타깝게도 제 기억 속에는 아버지 모습이 없어요. 단지 사진에서만 본 모습이 전부예요.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더라고요.”

아버지의 부재로 세자매가 성장할 때까지 그녀의 어머니는 비포장 같은 굴곡진 삶을 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위해 우시장에서 소머리국밥 장사를 했어요.” 넉넉한 재산은 커녕 딸 셋만 덩그러니 놓고 떠난 남편을 원망할 사이도 없이 혼자서 억척같은 삶을 살았다는 그녀의 어머니. 딸 셋을 남부럽지 않게 입히고 먹이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정작 그녀는 식당하는 어머니를 많이도 미워했다고 했다.

“빨간 구두에 원피스를 사 입혀 줬던 엄마보다 다른 엄마들처럼 늘 제 곁에서 챙겨주는 엄마가 그리웠거든요.”

 

# 부모님 대신 밥상머리 예절을 가르쳤던 우리 언니

 

부모님의 빈자리는 장미희 씨의 두 살 터울 언니가 모두 메워주었다고 회상했다.

“언니는 엄마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해주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언니는 석유곤로에다 밥을 해서 우리에게 먹였죠. 나이 어린 언니는 유난히 밥상머리 예절을 중요시했어요. 쩝쩝거리면 나무젓가락으로 톡톡 때리곤 했죠. 저는 너무 싫었어요. ‘자기가 엄마도 아니면서...’ 속으로만 씩씩댔지 그래도 언니가 무서워서 감히 대들지 못했어요. 그게 쌓이고 쌓였나 봅니다.

드디어 중학 시절, 어떤 사건이 발단되어 언니랑 호되게 싸웠어요. 그때부터 언니는 더 이상 동생들에게 무섭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언니에겐 늘 고마워요.”

 

# EBS방송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

 

▲ 한국방송가수협회 충남지부 개소식에서

 

사춘기를 맞으면서 늘 가계에서만 생활하는 어머니의 빈자리에 친구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있으면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동안 잠재운 끼가 표출되는 순간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의 시청 앞 벤치에 앉아 친구 네 명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옆을 지나가던 어떤 중년남자가 “몇 학년인가? 목소리가 특이하고 참 좋다. 아저씨는 EBS방송국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부모님과 통화한번 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흠칫 놀랐지만 바로 명함을 받아들고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던 찰라였다.

“친구들은 난리였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지 아냐? 만약 전화하면 너는 그길로 끝이다’는 둥...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외국으로 팔려나가 성 접대해야한다, 여자들을 팔아넘긴다, 장기 밀매업자들이 넘쳐난다는 등 여러 가지 얘기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어요.”

순간 받아든 명함이 마치 당장이라도 그렇게 되는 것처럼 너무 무서워 얼른 찢어버리고 자리를 떴다는 가수 장미희 씨.

 

# 억척스럽게 살았던 지난 세월이 나름 행복했다는 그녀

 

많은 시간, 노래를 잊고 살았다. 성남에 있는 지인소개로 작은 회사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재봉틀을 배울 때는 밤잠을 설쳐가며 맹연습을 했다는 그녀. 그리고 어느 날 돈이 좀 모아져서 아산으로 내려가 장사를 시작했다. 경기가 좋아서인지 당시로서는 제법 장사도 잘 되었다. 카페를 하면서도 옷가게, 화장품 등 소위 말하는 투 잡, 쓰리 잡을 했다. “가만 보면 이런 것도 유전인가봐요(웃음).”라고 말하는 가수 장미희.

그리고 난 후 장 씨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식당을 하기에 이르렀다. 억척스럽게 사는 것까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며 애써 태연한 척 웃는 그녀의 웃음이 짠하게 가슴을 저몄다.

 

# 식당 한 켠에서 부른 노래가 마중물이 되었다는 장미희 씨

 

▲ 새조개축제 남당항에서

 

예산에서 해물종류의 음식을 하게 되었던 어느날, 아는 동생이 손님을 모시고 가게에 왔다. 그때 “이 누나 노래 잘해요”라는 한마디에 손사래를 쳤지만 간곡한 부탁에 결국 앞치마를 두르고 노래를 한 장미희 씨

“그분이 흘려 듣더라구요. 그런데 나가면서 제 명함 한 장 가지고 나가대요. 시간이 흘렀어요. 별다른 소식없이 지냈는데 어느 날인가 그분이 전화로 ‘대충 해도 되니 노래 좀 부탁한다’고 하대요.

솔직히 오신다던 가수 분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제게 땜방 가수로 해달라는 간곡한 전화였어요. 그것도 바로 다음날 오후 2시. 어떡해요. 식당도 바빴지만 그것은 관객과의 약속이잖아요. 그냥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지요. 반응은 아주 성공이었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공연 무대를 지키고 있다.

 

# 우연은 물살이 되어

 

우연은 그녀의 삶에서 큰 물살이 되는 기회를 안겨 주었다. 마침 자신이 부른 노래 영상이 있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행운은 그때부터 찾아왔다.

이벤트 회사에서 (카카오스토리)그것을 보고 그때부터 공연 예약을 해오기 시작했다.

“노래한지 벌써 10여년이 되었네요. 노래를 쫓은 게 아니었는데도 어느날 우연히 가수가 되어 이렇게 무대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제 길을 찾은 것 같아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노래할 때만이 제 속을 모두 비워내는 듯 후련하거든요.”

 

# 제겐 신장이 하나밖에 없어요.

 

그녀에게는 아픔이 하나 똬리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제겐 신장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먹고 살기 빠듯할 때였는데 늘 허리에 통증이 있었어요. 저는 그것이 ‘힘드니까 단순한 디스크’인줄 알고 물리치료나 진통제로 참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가 봤더니 글쎄 급히 저를 구급차에 태우고 큰 병원으로 가더라구요. 그곳에서 ‘노로결석’이라고 하대요. ‘이미 썩어서 신장 한 쪽을 떼어내야 한다’고요. 정말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수술대 위에 뉘어졌다. 힘들게 했던 지난날이 생각나는 듯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가슴에는 아픔이 느껴져서인지 눈에는 슬픔 비슷한 물기가 묻어났다.

기자는 어깨를 안고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맥의 흐름에 방해가 될까봐 애써 태연한 척 질문을 이어나갔다.

 

# 제2의 한혜진이다!

 

▲ 제2회 석남동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발표회

 

이제는 그녀의 슬픔을 묻어두기 위해 좀 행복하고 좀 편안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녀에게 “재미있는 행사가 어떤 게 있냐?”고 하자 그제야 환한 웃음을 되찾은 가수 장미희 씨.

“행사 내용이 재미있는 것 보다 이름이 재미난 게 있어요. 바로 ‘예산장터삼국축제’인데 국화, 국수, 국밥이 만나 만들어진 재미난 축제죠. 작년 (예산장터삼국)축제 때 식전 행사를 모두 제가 봤어요.

이거 말고 기억에 남는 것은 금년 제1회 서산육산한마당축제 때는 1부 진행 외에 노래자랑 심사위원을 맡았고, 팔봉산감자축제 때는 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어요.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작은 체구에 어디서 저런 노래가 나오냐! 제2의 한혜진이다!’라고 하셨어요.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신장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지금보다 더 우렁찬 소리가 나왔을텐데...’라구요(웃음).”

그녀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남은 커피를 들자고 손짓했고 기자도 그때서야 마음의 아픔을 덜어낼 수 있었다.

 

#에필로그

 

그녀는 서산시대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저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한 늦깎이 가수 장미희입니다. 2집 음반이 8월 말쯤 세상에 나오는데 우리 지역을 전국 아니 나아가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죠.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서산을 지켜가며 노래하겠습니다.

끝으로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늘 건강 잘 지키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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