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과 불교

 

▲ 한 기 홍(향토사학자)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지역은 항상 사람과 물류가 북적였다. 중국과 거리도 가깝고,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을 오고가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인데다, 과거에 연안 항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오고 가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이곳에서는 새로운 정보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지역에 자연스럽게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다양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정치ㆍ사회ㆍ문화를 주도했다. 고려조에는 미륵신앙이 들어와 민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여말선초에는 유학(성리학)이 들어와 사회를 이끌었다. ‘의리’를 강조하는 정주성리학에서부터 ‘실용’을 중시하는 성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풍이 번성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학’이 유입되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말기에는 ‘천주교’와 ‘동학농민운동’이 사회를 격동시켰다. 국망 전야에는 ‘의병투쟁’이 치열했고 일제치하에서는 사회운동ㆍ노동운동ㆍ민족운동ㆍ청년운동ㆍ형평운동이 격렬했다. 무정부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도 타 지역에 비해 매우 활발했다. 일반적으로 충남의 정신을 논할 때 충효정신ㆍ절의정신ㆍ선비정신ㆍ예의정신ㆍ개척정신을 드는데(충남의 ‘5대 정신’), 이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 이면에는 다양한 사고와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백제의 불교는 태안반도를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수용한 것은 384년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백제의 불교는 그 이후 약 150 여 연간의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에 밀려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동성왕 년간부터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산의 사면석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 그리고 태안의 마애삼존불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필자의 견해로는 중국과 천도한 백제의 수도 웅진과의 통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가야산 주변으로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불교 유적이 산재한다. 이들 유적 중에는 중국의 석굴에서 발견되는 것과 형태와 양식이 유사한 것도 더러 있다. 불경에 정통한 고승도 여럿 있었던 것 같다. 당나라 태종 때 도선율사가 편찬한 『속고승전』에 보면 혜현대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는 수덕사에 재직할 때 삼론학을 강의하고 법화경을 독송하며 대중을 교화하였다고 한다.

불교의 중심지도 백제시대에는 이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서에 의하면,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도침이란 승려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다가 백제의 부흥을 도모했다고 한다. 비록 의자왕의 종제인 임존성주 복심의 배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종교가 정치나 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고대 사회의 의식 세계를 생각하면, 도침이 부흥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불교가 큰 세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백제를 멸한 뒤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가야산(상왕산) 강당계곡에 보원사를 크게 짓고 이곳을 화엄종찰로 삼은 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원융무애(圓融無涯)하기 때문에 대립과 차별, 개별적인 것의 존재는 일종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삼국이 대립ㆍ갈등하였을 때에는 꾸준히 불법을 닦아 ‘이화세계(理化世界)’를 만드는 일에 진력해야겠지만, 이제는 통일이 이루어져 법화경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경전과 종파가 필요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화엄종이 크게 강조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고려조에는 미륵신앙이 다시 들어와 전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미륵신앙 또한 서ㆍ태안 지역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하겠다. 지금도 지역 곳곳에는 자연석을 깍아 만든 다양한 형태의 미륵석불이 산재한다. 아주 작은 바위에 부조(浮彫)한 것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본래 있던 자리에 두고 깍아 만든 조형물(造形物)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양식이 매우 다양하다. 보통 거대하고 위협적인 불상은 사회질서가 문란할 때 조성되고 작고 온화한 불상은 평화로운 시대에 등장한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지닌 미륵석불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 변동이 그만큼 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륵신앙은 피지배자 쪽에서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의로운 정치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이 기복신앙 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륵불만 세워져 있고 미륵도량이 없다는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 이것은 이 지역에 만연했던 주술ㆍ점복ㆍ예언 등과도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

미륵불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몽골족의 침입을 전후하여 재등장하여 또 다시 조형된다. 그러다 선종이 등장할 무렵부터는 거의 조각되지 않는다. 선종에서 볼 때, 미륵신앙은 마음이 일으키는 번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신라가 화엄사찰을 건축한 후 백제 고유의 천태종이 쇠락해 가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필자는 불교에 관하여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벌써 4년째 가야산 주변의 폐사지를 찾아다니고 있는 사람으로 가야산 주변의 폐사지는 백제가 통일신라로 통합 흡수되면서부터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야산은 후삼국시대의 왕건의 북악파와 견훤의 남악파가 대립하던 경계선 역할을 수행했던 곳으로 경주의 남산에 버금가는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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