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 한기홍 향토사학자

서산 원도심 이야기를 발간하는 과정에서 파악한 서산의 화교이야기를 3회에 걸쳐서 게재하고자 합니다. 서산에서의 화교들의 삶 또한 우리고장 서산의 중요한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한국사가 중국사와 긴밀한 관련속에서 이루어지듯이 서산의 향토사 속에도 화교들의 삶이 있었음을 적시하여 알리고자 합니다.

 

 

 

 

-서산의 화교

서산에는 작은 차이나타운이 있었다. 흔히 차이나타운은 한 도시에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차이나타운에 모여 사는 중국인들을 화교라 부른다. 화교란 말에는 중국의 이주민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서산시내 동헌로와 관아문길 사이 번화1로에는 좌우로 10 곳 정도의 화교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옛 장터(구장뻘)가 있던 곳으로 이 곳을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화교들이 모여 살았다.

▲ 옛 서산화교학교 자리

1927년 발행된 서산군지에 따르면 서산 읍내리와 서산군내에서 장사하던 화교가 많았다. 읍내리에서는 주로 포목을 판매했다. 당시에는 일본인 상점이 화교상점보다 조금 더 많았는데 일본인 상점에서는 주로 잡화와 식품 등을 판매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 일본인들은 대부분 돌아가고 그 빈자리를 한국상인과 화교상인들이 대신했다. 그래서 해방이 된 후에는 화교상인들도 잡화를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산의 화교는 서산 번화로 일대의 원도심 역사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흐름을 차지한다. 따라서 서산 화교의 역사와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산 원도심의 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어 서산 화교에 대한 이야기는 큰 의미가 있다. 현재 서산시내권에 살고 있는 분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화교와 관련된 추억을 들을 수 있었고 전)서산향토사연구회 김세중 회원이 작성한 ‘화교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서산화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서산 화교의 역사

2017년 2월 서산시 통계에 따르면 서산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3,948 명이며 그 중에 대만인은 34명, 중국인은 933명이다. 이중 중국인은 서산시 해미면에 433 명으로 많은 것이 큰 특징이다. 아마도 한서대에서 공부하는 중국인 유학생 수가 많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해방 전후와 비교해서 현재에도 적지 않은 중국인이 서산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화교의 역사적 배경은 조선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에 청국상인의 입국이 공식화된 것은 1882년 8월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후라 한다. 본 조약의 제 4조) 양국 상민은 개항장에서 통상할 수 있고, 토지의 영조 및 가옥의 임차, 건축을 소유할 수 있다. 조선 지방관원의 승인을 받으면 청상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다. 라는 조항에 근거하여 대분분 인천을 경유하여 서산지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1927년 서산군지의 상가 점포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의 점포는 서산면에 9곳, 해미면에 3곳, 운산면에 4곳, 부석면에 2곳, 성연면에 2곳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에는 일본인 점포도 21곳이 있었고 한국인 점포수는 38곳이 있었다.

당시에는 서산면 읍내리가 행정구역이었으며 중국인 상인들은 읍내리에서 면포류를 주로 팔았고 일본인 상인들은 식료품과 잡화를 주로 팔았다. 해미, 운산, 부석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중국인 상인도 잡화를 취급했다. 광복후 일본인 상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중국인 상인들은 계속 장사를 했는데 면포 뿐만 아니라 잡화를 취급하는 상점이 늘어난 것도 특이할만한 일이다. 일본인이 떠난 빈자리를 중국상인들이 대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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