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포운하 개착의 역사①

 

▲ 한기홍 향토사학자

① 서산시와 태안군에 걸쳐 있는 태안반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리아스식 해안으로 육지부가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곶(串)을 이루고 있다. 충청남도의 서북단 끝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안면도 고남, 안흥, 파도리, 구름포, 소근진, 학암포, 내리 및 서산시 대산읍 독곶의 황금산 등은 부채살처럼 펼쳐진 금북정맥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안면도가 육지와 연륙된 섬이지만 과거에는 뭍이었던 곳으로 안면곶이었다. 육지였던 곶에 인공적으로 운하를 개착하여 지금의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사이에 바닷물이 통수됨으로써 섬이 된 것이다.

이곳 서산시와 태안군의 태안반도가 가지는 중요성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조운로를 비롯한 세곡선의 항로에 있어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

지금도 인천과 평택항에서 중국의 산동지방으로 운항하는 선박은 태안반도와 덕적도 사이의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만리포와 학암포에서는 배의 운항로를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다.

난행량(難行梁)이라 일컬어졌던 안흥량(安興梁)은 좁게는 관장목을 포함하는 안흥과 신진도 주변을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안면도 영목 앞바다에서 서산시 대산읍 황금산까지를 일컫는데 바로 이 곳에 쌀썩은여, 안흥량, 관장목, 방이도 주변의 험로가 산재해 있어 고려와 조선시대의 조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연례행사처럼 난파되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세곡미의 안전한 운송을 위하여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시도가 있었으며 그 중의 하나가 굴포운하(堀浦運河)의 개착이었던 것이다. 우리고장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서산과 태안지역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운하개착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고려시대에 있었던 운하개착의 역사>

-숙종(1095~1105) 및 예종시대(1105~1122)

시기적으로 안흥량(安興梁)의 대한 대책으로 굴포운하(堀浦運河)와 관련된 최초의 기사는 태종실록에 보인다.

其在前朝睿王 肅王及乎叔世 皆動民疏鑿 未見其效

『전 왕조 예종(1106~1122)과 숙종(1096~1105) 시기에 백성을 동원하여 굴착하였으나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기록상으로 확인해 보면 이미 고려 숙종과 예종시기에 백성을 동원하여 굴착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 분명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에 임했고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실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고려 숙종과 예종조의 양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공사라면 이는 논의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공사에 돌입한 것이라 하겠다. 선행연구자 대부분이 본 기사를 두고 직접 공사에는 돌입하지 않고 논의과정에 그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오류라 판단된다.

 

-인종시대(1122~1146)

이어서 고려 인종12년(1134년)에 굴착 시도가 있었는데 내시 정습명(鄭襲明)에 의해서 이다.

『내시 정습명을 시켜 홍주 소대현에 운하를 굴착하게 하였다. 안흥정(安興亭) 아래로 통하는 수로는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살이 거셀 뿐만 아니라 험한 암석이 있어 왕왕 배가 전복된다 하여 혹자가 건의하기를 소대현 경계에 운하를 파고 물을 끌게 되면 뱃길이 가깝고 편리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습명을 시켜 소대현의 인접 군현에 있는 군졸 수천 명을 풀어서 운하를 파게 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상기의 기록으로 보아 정습명 역시도 굴포운하(堀浦運河) 개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공양왕시대(1389~1392)

왕강이 왕에게 건의하기를 “양광도 태안과 서주의 지경에 있는 탄포는 남쪽으로 흘러 흥인교(興仁橋)까지 180여 리요. 창포는 북으로 흘러 순제성 아래까지 70리 인데 두 포구 사이에는 옛날에 개울을 팠던 곳이 있는데 그 깊게 판 부분이 10여 리이고 아직 파진 못한 곳이 7리에 불과하므로 만일 이를 다 파서 바닷물을 통하게 만든다면 매년 해상 운송할 때에 안흥량(安興梁) 400여 리의 험한 곳을 거치지 않게 될 것이니 7월에 공사를 시작하고 8월에 마치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정들을 동원하여 이를 파게 하였다. 그러나 돌이 물 밑에 있고 또 조수가 왔다 갔다 하므로 파는 족족 메워져서 시공하기가 용이하지 못하므로 끝내 성취하지 못하였다.

왕강은 고려 왕조의 종실로 그 역시도 굴포운하(堀浦運河)를 개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지반에 화강암 암반이 있어 굴착이 어렵고 또 서해안의 큰 조수간만의 차로 인하여 조수가 힘들게 공사한 조거를 메워버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고려시대 숙종(1096~1105)조부터 이루어졌던 굴포운하(堀浦運河)의 개착은 모두 실패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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