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웅 편집국장

봄 가뭄이 심하다. 조선조 태종과 관련 한 가뭄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태종 18년에 유례없는 큰 가뭄이 오래 계속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하늘을 우러러 비를 빌었지만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았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태종은 가뭄 속에서 땡볕 아래 하루 종일 앉아 하늘에 빌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태종이 임종하였는데, 이때 아들인 세종에게 “내가 죽어 넋이라도 살아있다면 기필코 비를 내리게 하리라”하고 유언을 하였다. 숨을 거둔 후 과연 음력 5월 10일 흡족하게 비가 내렸다. 그 후로 매년 이날만 되면 비가 내리므로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하였다.

이번 주 초에 비가 내렸다. 태종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논에 갓 심은 애기모부터 밭마다 목 말라하던 작물까지 오랜만에 생동감이 넘쳤다.

‘밀운불우(密雲不雨)’란 말이 있다. 주역에서 유래된 말로, 하늘에 구름이 짙게 끼어있지만 비가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여건은 조성됐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뒤따르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비유한다.

대산공단 환경문제가 연일 화두다. 한화토탈 유증기 유출 사고가 발단이 되었다. 천 명이 넘는 현장 근로자와 주민이 병원 진료를 받았고, 환경부 차관부터 도지사 등 정치인들이 현장을 찾았다. 현재 시민사회단체까지 참여한 사고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산시는 ‘권한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문제’라며 대산공단 화학사고에 대해 그동안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 대응으로 변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산시가 이처럼 “서산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나선 것 자체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큰 변화다. 무엇보다 대산공단 환경오염과 잇따른 사고 문제에 대한 시민의 원망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으면 ‘우려’가 증폭되고 실망을 넘어 절망이 뛰 따른다. 신뢰의 상실은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대산공단 내 화학사고 문제는 이번 한화토탈의 유증기 사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려진 사고보다 감춰진 사고가 더 많았고, 아직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보안시설인 대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시민의 안전에 무감각하다. 북치고 장구치고 요란을 떨어도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던 시민들의 입장에선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높다. 행정당국은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화토탈 사고는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개혁의 기회다. 개혁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응원이 무르익은 지금이 새로운 화학사고 관리 시스템 구축의 철호의 기회다.

시민은 힘을 몰아준 뒤 기다린다. 그러나 기대치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이후에 가서도 ‘권한이 없기 때문에...’이라면 지난 레퍼토리다. “우리는 힘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때는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

서울 양화대교 북단,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세종의 형님이었던 효령대군이 지은 망원정(望遠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안 처마 밑에는 ‘희우정(喜雨亭)’현판이 걸려 있다.

1425년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이 새 정자를 지었다는 소리를 듣고 형을 찾았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세종은 ‘비가 오니 기쁘다’라는 뜻의 희우정(喜雨亭)이라고 현판 이름을 지었다.

이번 한화토탈 사고가 ‘밀운불우(密雲不雨)’가 아닌 ‘희우정(喜雨亭)’이 되기를, 태종대왕의 염원같이 단비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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