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게 꿈이란, 힘들지라도 버터야 하는 아름다운 시기

 

▲ 오현복 화백

 

<프롤로그>

기자가 왜 석가탄신일에는 꼭 벽화를 그리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빠 기일이 바로 석가탄신일입니다. 아빠 무릎에 매달려 칭얼대던 현복이가 이만큼 커서 뜻 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날만큼은 아무 생각없이 육체적으로 좀 힘들게 보내고 싶어져요. 아빠가 저를 꼭 안아주시려고 오시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철없게도 들곤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자는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소녀의 마음이었다.

 

Q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

서산시 읍내동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세상에 태어나면서 제 짧은 인생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저를 얻으셨어요. 두 분의 사랑은 눈물겨웠습니다. 당시에도 딸 바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아빠는 유난히도 저를 예뻐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심장마비로 그만 우리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딸과 서른두 살의 아내를 두고. 우리의 슬픔은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빠의 빈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늘 곁에 있는 것 같아 자주 아빠를 찾다 보니 저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차츰 시간이 흘렀고, 어머니와 저는 서로가 부모이자 친구이자 의지하는 동반자가 되어 안정을 찾았습니다.

 

Q 엄마 얘기를 들려줄 수 있나?

우리 엄마는 동부시장 한 켠에서 한복집을 운영하시는, 조금은 유명한 분입니다. 고집 센 어린 딸을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신 강한 엄마이기도 했죠. “고집 센 걸로 치면 우리 현복이가 세상에서 으뜸이다”라고 했던 엄마는 어릴 적 얘기를 곧잘 해주세요. 어느 날 우리 집이 이사를 가게 되었대요. 그런데 밖에 나갔던 제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부모님은 안절부절 못하시며 사방으로 찾다가 혹시나 싶어 이사 가기 전 가게를 가보았대요. 그런데 글쎄 제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라지 뭐예요. 엄마가 제 손을 끌며 “빨리 집에 가자”고 해도 “여긴 우리 가게야. 저 아줌마가 우리 가게에 왜 있어. 빨리 나오라고 해”라며 생떼를 쓰더랍니다. 이미 팔린 가게라고, 우리 가게 아니라고 그렇게 어르고 달래도 말예요(웃음).

엄마는 어릴 때부터 가위로 자를 수 있는 종이인형을 한 박스씩 사다놓곤 했습니다. 왜냐면 엄마가 잠시 가게를 비우는 사이 잠에서 깬 제가 손님이 찾아가실 한복 저고리를 무쇠가위로 조각조각 잘라 놓았거든요. 물론 저는 기억에도 없지만요. 나중에 가계로 온 엄마는 “손이라도 다쳤으면 어떡했냐”라며 잘라 놓은 저고리 보다 오롯이 돌보지 못하는 그 상황을 더 미안해 하셨대요. 그런 분이 바로 우리 엄마예요. 38년을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한 번도 존경하는 인물이 바뀐 적이 없어요. 저의 스승님은 바로 우리 엄마예요. 어쩌면 여태껏, 포기하고 싶을 때, 혹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에도 번쩍하고 스치는 얼굴이 바로 우리 엄마였기 때문에 여전히 엄마처럼 한 길을 저도 고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을 찾아 앞으로 나가는 것도 어쩜 엄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일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 엄마. 엄마는 저의 멘토이기도 합니다. 저는 엄마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늘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요.

 

Q 미대로 진학한 계기가 한복명인 엄마 덕분?

듣고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웃음). 어릴 때부터 엄마가 만드는 한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심미안이 생겼나 봐요. 서일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큰소리쳤죠. 그때 엄마가 엄청 반대를 하셨습니다. 끈기가 없으니 시작도 하지 말라고요. “그렇게 오래 친 피아노도 단번에 접는데 미술은 뭐 하러 시작하냐”는 겁니다. 오기가 생겼어요. 엄마가 반대할수록 무섭게 미술에 매달렸으니까요.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저를 훤히 아시고 끝까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채찍을 가한 현명한 엄마였어요.

사실 처음에는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순수미술의 매력에 푹 빠지는 거예요. 결국 디자인은 뒤로 물리고 다시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전공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Q 고향으로 내려온 계기는?

한남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면서 외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즈음, 고향에 계신 엄마가 많이 편찮으시단 소리를 들었어요. 갈등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짐을 꾸려 고향으로 무작정 내려왔어요.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뭐 괜찮았어요. 다만 엄마의 멋진 딸로서 ‘누를 끼치면 어쩌나’란 생각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열심히 활동했어요. 그 결과, 서산창작예술촌에서 초대전으로 ‘사루비아-상실된 기억 찾기’를 전시하게 되었어요.

한 때의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루비아 꽃처럼 저에게도 아름답고 달콤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달콤하고 행복했던 생각들을 사루비아 시리즈로 캐릭터화 했고, 꾸준히 작품으로 완성해 나갔습니다.

 

▲ 도외지역 예술 프로그램 (해미초)

 

Q 작품들 얘기를 묻고 싶다

2007년 왼쪽 발목인대가 손상되는 사고로 1년간 재활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그때 그토록 좋아하는 하이힐도 못 신고 많이 속상했죠. ‘다리에 애착을 갖다’ 시리즈는 일종의 애증에 대한 대리만족 같은 거였다고 보면 됩니다. 다리와 신발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감정과 내면의 본질적인 욕구를 작품으로 재현하려 노력했어요. 누군가 말했잖아요.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라도, 세상에는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가득하다”고 말예요. 이 말을 신앙처럼 믿고 따르게 됐다고나 할까요(웃음). 재미있는 사실은 오랫동안 다리에 애착을 갖다보니 ’다리 시리즈‘로 미술관계자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의 작품 대부분은 아루쉬지(紙)에 수채화 물감을 주로 써, 화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맑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반추상적 작품 내면에 표상되는 흥미 진지한 화면에는 그동안 제가 겪어온, 조금은 녹록치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Q 벽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미술을 전공하고자 하는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봉사걱정을 하는 아이들을 봤습니다. 도서관 청소를 하러 가기도 하고, 단체에 가서 시간 떼우기식 봉사를 의무적으로 하기도 하고... 그때 생각해낸 것이 지금의 서산의료원 맞은편 벽면을 벽화로 그리는 작업을 하자는 거였어요. 아이들과 함께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에게 봉사의 의미를 깨우쳐주고 싶었거든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고·대학생들과 함께 관내 학교와 서산시 공공장소에 벽화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시경관 디자인 봉사에 참여하는 계기를 유도하다 보니 저보다 그 친구들이 더 좋아하더군요. 이런 기억들이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 2018년 자원봉사자의날 국회의원상 수상

 

Q 서산시 최초, 문화거리조성 우수상을 수상했다는데?

2018년 동문2동과 함께 생활자치 마중물 사업의 일환으로 '빛나는 나의 길' 을 기획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응원과 바뀐 공간에 대한 긍정적 반응 덕분에 충청남도 주최 주민자치 우수사례 발표 대회에서 '이야기가 있는 문화거리 조성' 주제로 서산시 최초, 우수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그마치 상금도 천만 원이었어요. 2019년 올해는, 작년 사업 결과를 토대로 연계되는 사업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 활성동프로젝트

 

Q 드림페인터 얘기를 해달라

도시재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한 것이 기획 영역부문이었어요. 처음 도전했던 공모사업이 충남공익지원센터의 '청춘작당' 이었는데 청년활성화를 지원하는 사업이었죠. 이것을 계기로 문화예술과 사회공헌을 접목한 청년 예술가 단체 ‘드림페인터’를 창단했습니다. 분야별로 봉사가 다 나눠져 있어요. 저희는 시각적 봉사인 벽화를 진행하면서 원도심 활성화방안 설문조사와 함께 청년 네트워킹을 위한 발걸음을 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청년들이 우리 지역에서 일하기에는 그다지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하긴 다들 어렵겠지만요(웃음). 특히 급여가 낮다보니 “차라리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는 게 생산적이다”며 새로운 길을 가는 친구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꿈이 있고 그 길이 맞다면 힘들지라도 버텨야하는 시기가 또 청춘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구요. 감사하게도 저와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저의 제자들은 이 말에 의외로 공감하는 친구들이 꽤 많아요.

 

Q ‘서산청년들’ 창단 배경은?

먼저, 서산시의 도시재생은 도시사랑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시에는 의외로 젊은 친구들이 도시재생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과 함께 비영리단체 ‘서산청년들’을 창단했습니다. 지금은 지역에서 활동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찾고 있어요. 저는 현재 서산청년들 부대표와 동문2동 주민자치위원으로 기획분과를 맡고 있습니다. 사업을 실행할 수 있는 특정 분야가 있기에 기획과 진행을 총괄하게 되었지요. 저희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지역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콘텐츠 계발과 인적 인프라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거예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가 화두이기도 하지만요.

 

▲ 서산창작예술촌 오현복 초대전

 

<에필로그>

그녀에게 꿈이 있다면 학창시절부터 문화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란다. 그 속에는 문화예술의 공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더불어 교육과 쉼의 공간이 있는 행복한 공간이다. 현재 오현복 화백은 ‘공유라는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즐겁게 경험하고 있다.

기자는 그녀가 꿈꾸는 한발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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