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 한기홍 향토사학자

흥인교(興仁橋)는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일명 ‘흔진다리’라 일컬어진다. 지금은 서산과 태안간의 간선도로가 인지면 차리와 팔봉면 어송리, 진장리를 거쳐서 태안으로 이어지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이 길은 과거의 서산과 태안을 이어주는 고로(古路)로써 서산군청-여기정-흥인교-태안군청으로 이어지는 제일 큰 길이었다.

흥인교의 위치는 현 서산시와 태안군의 경계 지점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지금의 서산과 태안을 이어주는 간선도로 위에 위치한 인평교를 흥인교로 착각하고 있다. 팔봉에서 태안으로 가면 인평교를 건너게 되고 부석에서 태안으로 가면 가사교와 흥인교를 건너게 된다. 그러니까 인평저수지 위에는 교량이 총 3개 있고 부석쪽에서 태안 방면으로 가면 인평저수지 위에 가사교와 흥인교가 연달아 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1938년 인평저수지가 조성되어 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던 과거 흥인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흥인교가 처음으로 건설된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수 회 에 걸쳐서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고려사절요』『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등에서 흥인교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안읍지에 흥인교는 1920년대 태안읍 동문리 606번지에 살았던 이응우(李應雨)씨가 소실된 교량을 사비들 들여 다시 건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흥인교는 서산과 태안을 이어주는 주요 통로 상에 위치하여 지역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중요한 교량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다리가 세워진 후 주민들이 찬송비(讚頌碑)를 흥인교 옆에 세워 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인이응우효덕찬송비(士人李應雨孝德讚頌碑)

태동서서(泰東瑞西) 행족불절(行族不絶)

효재사령(孝哉斯令) 조통험천(潮通險川)

병보다년(病涉多年) 독지승선(篤志承先)

주난제상(舟難濟象) 여의흥인(如意興仁)

유공유덕(維功維德) 교고승선(橋苦昇仙)

구쥐상운(口碑相連) 천재가전(千載可傳)

또한 이 곳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을 거쳐 시도 되었던 굴포운하의 노선상에 해당하는 곳으로 흥인교는 굴포운하를 가로질러 다리를 건설한 것이다. 굴포운하 개척과 관련하여 고려사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강(王康)이 건의를 올리며 아뢰길, “양광도(楊廣道)의 태안(泰安)·서주(瑞州)의 경내에 있는 탄포(炭浦)는 남쪽으로부터 흥인교(興仁橋)까지 180여 리를 흘러가고, 창포(倉浦)는 북쪽으로부터 순제성(蓴堤城) 아래까지 70리를 흘러갑니다. 두 포(浦) 사이에는 옛날 도랑을 판 터가 남아 있는데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며, 파지 않은 것도 7리를 넘지 않습니다. 만약에 완전히 다 파서 바닷물이 통하게 한다면, 매해 조운이 안흥량(安興梁)의 400여 리나 되는 험한 곳을 건너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7월에 일을 시작하여 8월에 마칠 수 있도록 청하옵니다.

그러나 굴포운하 개척 공사는 실패하고 만다. 운하를 파면 조수가 밀려들어와 파 놓은 곳을 도로 메웠고, 운하를 파는 곳의 지반이 화강암 지반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이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천수만 AB지구 간척공사로 인하여 적돌만이 커다란 평야지대로 변모했고, 흥인교 또한 현대식 교량으로 교체되어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인평저수에 농업용 관계용수를 저장하고 있어 저수지에 물이 고여 있을 때에만 과거의 흔적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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