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국악인 이상성 선생과 박소정 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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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국악인 이상성 선생과 박소정 무용가
  • 최미향 기자
  • 승인 2019.05.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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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인 이상성 선생과 박소정 무용가

 

전통 문화를 알리는 열렬 모녀

“전통을 기반으로 마지막까지 무대를 지키는 것이 꿈”

 

(인터뷰 시작 전)

 

미소가 잔잔한 국악인 이상성 선생과 그녀의 막내딸이자 손 매무새가 아름다운 박소정 무용가를 늦은 오후에 만났다. 두 모녀는 햇빛을 받아 밝게 빛을 내며 들어와서는 미리 나온 기자 앞에 멈춰 섰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이상성) 선생님 어쩜 피부가 이렇게 고와요. 스카프도 그렇고요”라고 기자가 먼저 말을 던지자, 따님인 박소정 무용가가 “아침부터 엄마가 미장원에 다녀오셨어요. 아마 사진 찍는다고 신경 좀 썼나 봐요”라고 대답했다. 그녀 모습을 보면서 기자는 참한 목련꽃이 생각났다. “젊었을 때는 아무거나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고운 것을 입어도 보기 싫다”며 예쁘다는 기자의 말에 손을 내젓는 이상성 선생.

전통을 잇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활동하는 모녀를 보며 기자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전통을 알리기 위해 앞장서고 있는 모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 칠지도문화제 행사에서 태평무를 선 보인 박소정 무용가

 

Q 가장 큰 스승은 누구인가?

 

(이) 내게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우리 아버지다. 어릴 때부터 장구를 치며 시조를 읊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그 소리가 너무 좋아 속으로 곧잘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태어남과 동시에 잠재의식 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소리를 하면 하던 일도 멈추고 가만히 턱을 괴고 아버지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좋던 소리도 결혼을 하고 애들을 줄줄이 낳으면서 서서히 잊고 살았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소리 대신 터미널 앞 분식집 뜨거운 열기와 함께 13년을 살았다.

(박) 82세 우리엄마, 이상성 선생이 내게는 가장 큰 스승이다. 연로하신 모습으로 지금도 당당히 무대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열정에 목이 멜 정도로 가슴이 벅차다. 세월을 거슬러 가만히 3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엄마가 분식점을 운영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곱게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하더라. 예쁘게 단장하고 가는 엄마가 너무 궁금하여 “어디 가 엄마?” 놀랍게도 엄마는 장구를 배우러 간다고 했다. 그것도 엄마 대신 일하실 분을 분식집에 모셔다 두고선 말이다. 깜짝 놀랐다. 엄마에게는 우리 식구가 전부였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마음에 서운함이 들었다. 엄마는 그냥 엄마라는 이름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가 장구를 치며 늦게까지 연습에 몰입하는 것을 보면서 서서히 세상으로 나가려는 엄마의 모습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장구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어깨춤이 춰 졌고, 마음속에는 뭔가가 뜨거운 것이 심장 저 밑바닥에서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때부터 스펀지에 잉크가 스미듯 내게도 조금씩 우리 가락이 베어들었고, 한이 묻어있는 우리 것에 소름이 돋았다. 익숙함에 속아(?) 두려움도 모르고 결국 그 길로 뛰어 들어 현재 이곳에 서 있다.

 

▲ 국악동아리 무용지도(화관무)

 

Q 전통을 지킨다는 것이 힘들지는 않나?

 

(이) 왜 없겠는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다. 까막눈일 땐 글씨를 봐도 그것이 그림인줄 알았다. 그런데 글씨를 배우고 나니 그것이 글씨더라. 글 배우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늦은 나이에 구구단을 배워 노래처럼 읊기도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영어를 배워 딸들 내외의 영어이름을 써주었을 때인데 자식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해줬다. 얼마나 우쭐하던지 모른다.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사를 종이에 적어 그 놈을 보고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 가사를 연필로 꾹꾹 눌러 쓰고 집에 돌아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다. 처음으로 글을 배운 것이 내 생애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장구대신 이참에 노랫가락으로 전향을 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것이 내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노력에는 장사가 없는 법. 시간이 흐르면서 남들처럼 소리가 터져 나왔고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박) 왜 힘들지 않았겠나. 그래도 엄마니까 잘 참고 해 내시더라. 50대 중반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악보를 읽는 엄마를 보며 처음에는 ‘재능도 없는데 굳이 힘들게 왜 할까’를 생각했다. 그 전에도 틈만 나면 복지관에서 한글과 영어를 배워 일기를 쓰시는 엄마를 봤지만 소리를 하는 엄마는 그때보다 몇 곱절 더 연습을 하셨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과연 엄마만큼 할 수 있을까’ 대단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인 것 같다.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회에 참가하여 네 번씩이나 상을 받기도 했다. 엄청난 내공이 숨겨져 있는 걸 알았다.

(이) 우리 (박소정 무용가)딸이 좋게 봐줘서 하는 말이지 아직도 부족하다. 내공이 있는 사람은 우리 딸이다. 무용을 전공한 딸이 나로 인해 무대에 서면서 처음에는 많이 낯설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출산하면서 무용계에서 멀어져 갔던 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깎이로 세상에 나와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제 길을 걷는 딸이다. 정말 대견스럽다.

 

Q 언제부터 (박소정 무용가)무용을 했나?

 

(박) 어릴 때부터 엄마를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우리 전통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교도 무용학과에 진학했고. 하지만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춤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2년 전 한국무용 강습에 참여하면서부터 그동안 놓았던 한복을 다시 꺼내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상하게 무대 위에 서는데 무겁던 가슴이 박하 향을 맡은 듯 쏴하게 뚫리더라.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정도다.

 

Q 관객들 앞에 서면 두렵지 않았나?

 

(박) 손 놓고 있던 춤을 막상 추려니 두렵더라. 그래도 내가 누군가. 천하의 박소정 아닌가(웃음). 강한 멘탈을 저 속에서부터 끌어올려 나를 무장시키며 무대에 올랐던 것이 적중했다. 각각에 맞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서 관객과 한 몸이 되어가다 보니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나를 발견했다. 최대한 춤에 대해 내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다. 춤은 기쁠 때만 추는 게 아니라 슬플 때 그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이다. 같은 춤이지만 보는 이들의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보는 이들에게 순간이라도 감동을 주길 바라며 춤을 췄다. 지난번에는 내 공연을 본 젊은 연인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무대 위의 나와 객석이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 박소정 무용가가 세월호 추모제에서 진혼무를 추고 있는 모습

 

Q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뭔가?

 

(박) 작년 4월, 서산 호수공원에서 '세월호 참사 4주기 추모식' 춤을 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파랑새’라는 곡에 맞춰 하얀 소복을 입고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춤을 줬다. 공연하기 전부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그래도 무대 위에서 울지 않고 꿋꿋하게 잘 참아준 내가 스스로 봐도 대견하더라. 내 자식과 같은 아이들의 영혼이 더는 아프지 않도록 어루만져 주며 진정 어른으로써 아이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춤을 췄다. 봄꽃이 만발하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5주기 추모식에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Q (모녀)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박) 이 이야기를 하면 울 것 같은데.... 엄마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 있다. 어느날 엄마가 살풀이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처음에는 흔쾌히 승낙을 하고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도 손 봐야하고 개인적인 일들도 많으니까 내가 자꾸 성의 없이 하게 되더라.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했는데 내가 먼저 접어버렸다. 엄마니까 약속 펑크 내고, 엄마니까 변명하며 시간 탓하고... 그런데 어느날 보니 엄마 혼자 내가 조금씩 가르쳐 준 춤을 매일 연습하고 있더라. 그 당시는 ‘할머니가 뭔 춤을 추냐’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는 간절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60이면 한창 나이인데 왜 내가 못해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그때 끝까지 가르쳐 드렸다면 지금쯤 엄마는 무대 위에서 살풀이춤을 추고 있었을 텐데....

(이) 집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늘 바쁜데 엄마가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이 무리였지.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소정이가 괜히 쓸데없이.... 나는 우리 소정이가 지금처럼 무대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정말 훌륭한 무용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서산의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는 물론 힘들고 아픈 이웃들도 거두면서 사는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

 

▲ 국악인 이상성 선생의 팔순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한 여행

 

(인터뷰를 마치며)

 

“예전 엄마는 저를 키우면서 대리만족을 하셨고, 저는 쉬는 동안 엄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와 전 한 곳을 바라보는 동료이자 선후배입니다. 저희 모녀가 있기까지는 가족들의 격려와 응원이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죠. 특히 지금 병상에 계시는 아버지는 늘 엄마에게도 저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분입니다. 또한 남편과 언니 형부 등도 마찬가지구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껏 엄마와 제가 가는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 그렇지 않을까요.” 기자는 모녀에게 부탁 한가지를 했다. “함께 무대에 서 주시면 어떨까요?” 그녀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날은 유난히 하늘에서 마지막 봄 햇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모녀를 비춰 주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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