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웅 편집국장

“남을 돕는 일을 왜 해야 할까요?” 한 청년이 질문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의 싱거운 대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 청년은 좀 더 설명을 해 달라고 졸랐다.

청년의 애처로운 눈빛에는 ‘우리 사회는 착하게 살면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면 잘사는 사회이지 않느냐. 그런데도 남을 돕지 않으면 왠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처럼 불편하다”는 하소연이 담겨 있었다.

“자리이타(自利),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利他)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自利)”이라는 응원의 말을 듣고 싶은 기대도 엿보였다.

자리이타(自利)란 대승불교에서 수행의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가르침이 아니다. 자신만을 위하고 타인에게 해가 되는 일을 반복한다면 타인이 용납하지 않듯이, 타인에게는 도움이 되는 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반복한다면 스스로의 자아가 갈등에 빠진다.

그 청년에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라고 해 준 답변은 그런 까닭이다. 사회적 평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남을 돕는 일은 그 청년에게 의무가 아니다. 선택사항일 뿐이다.

‘착하게 살면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면 잘사는 사회’라는 청년의 하소연은 틀린 말은 아니다. 돈이 신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부와 계층의 양극화로 신음하는 세계는 탐욕, 이기심을 부추긴 ‘돈교’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돈은 가까이 있는 신이고, 다른 신은 멀리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1864~1920)가 기독교를 틀 삼아 이상적이라고 여긴 합리적, 시민적 경영과 노동의 합리적 조직을 특징으로 하는 청교도적 자본주의 세상이 아니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천민자본주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자유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자유시장주의는 거짓말이다. 이기심을 발휘하고 탐욕을 부려야 돈을 번다고 가르치는 게 시장주의 경제학이다. 시장은 가만히 놔두면 무한경쟁, 승자독식, 이익독점, 불법, 탈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최근 자리(自利)적 소유억제, 이타(利他)적 소유억제의 절제와 공동체성을 자본주의 정신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싹 트고 있다. 자본주의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절제 자본주의는 빈자에겐 복지가, 중산층 이상에게는 절제가 요구되는 자본주의다.

‘자리이타(自利)’의 정신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며 방향이다. 청년이 중장년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로 변해 있을까? 그 물음을 청년들에게 묻는다면 무책임한 일이 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이 살 세상이기에 솔직히 묻고 싶은 심정이다.

저작권자 © 서산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