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 한기홍 향토사학자

가야산은 내포지방의 중심에 있는 서 있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차령산맥에서 떨어져 나온 금북정맥이 홍성의 월산과 예산 덕숭산을 거쳐 가야산 주봉을 만들고 그 지맥이 북서쪽으로 흘러 태안의 지령산에 이른다. 이렇듯 가야산은 내포의 대표적인 산이라 할 수 있고 가야산의 동서남북에 서산시, 당진시, 홍성군, 예산군 등이 위치해 있다.

내포지역의 지리적 특성은 비산비야(非山非野)라 할 수 있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라는 뜻의 이 말은 내포를 한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다. 가야산은 표고 670미터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내포 지역의 가장 높은 산이다. 그리고 그 위치가 내포 지역의 중심에 있어 내포지역의 어느 곳에서도 가야산을 조망할 수 있다.

내포를 한자로 표기하면 안 내(內), 갯가 포(浦)를 써서 內浦라고 쓴다.

내포(內浦)라 함은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을 지리학적으로 만(灣)이라고 부른다. 천수만, 적돌만, 아산만, 가로림만 등등 실로 수많은 만들이 내포지역에 산재해 있다.

반대로 바다쪽으로 육지가 깊숙하게 들어간 곳을 반도라 일컫는데 반도는 한반도나 태안반도처럼 그 규모가 큰 것을 지칭하는 것이고 반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은 일컬어 곶(串)이라 한다.

지금은 안면도가 섬이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육지와 연결된 곶(串)이었다. 육지였던 곳을 인위적으로 끊어서 섬이 된 게 안면도인 것이다.

내포지방은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처럼 손가락 끝이 바다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고 또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처럼 바다가 육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갖는다. 즉, 내포지역은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청담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가야산 앞뒤의 10개 고을을 내포라 한다고 했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 했다. 비산비야의 구릉성 지형은 개간을 통해 농경지화 하기에 적합하였으며 육지 깊숙이 들어온 바다는 해산물과 소금으로 부를 일구기에 적지였던 것이다. 또한 화강암 암반은 가뭄에도 우물에 물이 마르지 않았고 큰 비가와도 빗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므로 수해가 적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천혜의 고장이었던 것이다.

과거 전통시대의 권역은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높은 산은 지역 간의 교류를 막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지만 강은 달랐다. 오히려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교통로로 활용되어 요즘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서울과 충주간의 남한강 수운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높은 산이 없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내포지역에는 큰 강이 있을 수 없다. 내포지역의 가장 규모가 큰 강이 삽교천인데 일반적으로 강(江)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면 천(川)이라 칭한다. 삽교천 역시도 강의 규모에는 못 미치는 천(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비스럽게도 조수간만의 차로 인하여 밀물 시에는 비교적 큰 배도 운항이 가능해진다. 약 5~6미터에 이르는 조수가 밀려들어와 썰물 때와는 전혀 다른 운항조건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조건이 내포문화권이라는 해양문화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포(內浦)를 순 우리말로 풀이하면 안 개(안쪽 갯가)라 말할 수 있다. 육지 안쪽 깊숙이 갯물이 들어오는 곳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자연지형적 조건은 내포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첫째로 내륙 깊숙한 곳까지 갯물이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내륙에 포구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주는 교통로로 작용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세곡미 운송 시스템인 조운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둘째로 비산비야의 지리적 특성은 육지에서의 농업생산력에 추가하여 바다가 가져다주는 어류, 소금, 간척 등의 각종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로 국토의 중심부에서 빗겨나 있으므로 왜구를 제외한 큰 외침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넷째로 이상의 조건들로 말미암아 내포 고유의 문화가 내포 땅에서 전승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정치적 역량이 모아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면 내포문화의 꽃은 활짝 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포는 훌륭한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정치적 역량을 하나로 모으지 못해 좋은 결과물을 수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도 원형 그대로의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 내포 땅이 촉망받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내포문화를 일궈내기 위한 선도적 역할을 우리 서산이 자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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