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미면 세선약국 장하영 약사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은 소름끼치게 즐거운 일

장하영 약사 “챔버(chamber)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보고 싶어”

 

<프롤로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등바등 밥벌이를 감당하기 위해 처절하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면 고단한 몸을 끌고 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서산시 해미면에서 세선약국을 경영하는 장하영(42살) 약사는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는 것으로 제2의 시간을 맞는다.

기자는 ‘나이 들어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에도 저 분은 어떻게 끊임없이 공부에 정진할 수 있을까?’ 늘 궁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하루가 다르게 더해져 갔고 급기야 그를 취재해 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석·박사 통틀어 졸업이 15종, 재학 13종, 중퇴 1종, 수료 4종에 이르기까지 총 33가지의 학력을 가지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개인적으로 기네스북에 도전할 만한 분이 우리 서산에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지경이다.

4월 마지막 꽃비가 내리던 날, 긴 시간 마음이 가리킨 대로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조심스레 타진했고, 그는 원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Q 어린 시절의 나는?

 

서산시 해미면이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자라면서 생업에 종사하기까지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옛 어르신들이 ‘차남은 조금 여유있는 삶을 누린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말은 정답이었습니다. 첫째에 비하여 책임은 덜 하고 여유(?)를 누리기에는 가장 유리하거든요.

돌아보면 다른 친구들이 체육 시간에 공을 차며 뛰어 놀 때 저는 골대 뒤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사실 운동을 썩 좋아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집중력 하나만은 누구 못지않게 좋았습니다. 생각이든 공부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Q 학창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은?

 

중3 때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눈치 싸움을 했습니다. 보통은 부모님이 자녀를 서울로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부모님은 달랐어요. 제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부모님께 약간의 서운함이 있습니다. 사실 중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공주 지역의 한일고등학교에 같이 가기로 약속하여 기대에 부푼 채로 수험생활을 했거든요. 항상 부모님께서 먼 지역으로 진학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게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 또 하나 코피 났던 사건은 뺄 수가 없겠네요. 고등학교 시절이었어요. 방학동안 친구들과 팀을 이뤄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빠져들었는지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진행했지 뭐예요. 그러다가 학교에서 코피가 났는데 멈추질 않는 겁니다. 결국 서산에서 천안까지 다녀왔던 기억이 나요. 후유증이 사나흘 간 계속되었죠. 아마 그때 처음으로 건강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Q 약대를 선택한 계기는?

 

(고3시절)그때 제가 진로에 대해 무얼 알았겠습니까? 기자님이 들어도 너무 단순하지 않아요? 소위 ‘부모님의 권유로’ 가게 되었습니다. 약대라는 목표는 중학생 시절 부모님께서 잡아주신 목표였죠. 그러다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별다른 목표가 없었습니다. 어떤 학교든 약대이기만 하면 되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전 컴퓨터공학 쪽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을 워낙 좋아했거든요. (프로그래밍은) 모두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자랑 하나 할까요? 제가 만든 프로그램 자료가 잡지에 소개되기도 하고 책으로 출판되는 등 나름 성과도 있었답니다(웃음). 가끔 상상 해봐요. ‘내가 만일 컴퓨터공학 쪽으로 진로를 정하였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Q 약국을 차리고 자리 잡기까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약국을 처음 개국했을 때입니다. 개국하려던 장소에 행정상 약간의 문제가 있었어요. 사실 새로운 약국을 개설한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거기다 약국 초창기에는 자금이 많지 않아 경영상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골손님이 차츰차츰 늘어났지요. 아마도 안정되는 데는 약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 유리한 점은 있더라구요. 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동네 어르신들이 처음부터 단골이 되어주셨다는 거. 이런 부분들이 너무 고맙고 감사했어요. 지금 개국한지 12년 정도가 되어가는 데 그 분들 중 세상을 떠나신 분들도 꽤 많습니다. 정이 들어서인지 가끔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아릴 때가 있어요.

 

▲ ICDPM 2017 국제학술대회 우수발표상 수상 시상식(왼쪽 임청환 교수, 오른쪽 이창식 지도교수)

 

Q 공부를 시작한 계기와 몰두하는 이유가 있나?

 

엄밀히 말하자면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고 꾸준히 공부를 계속 해왔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약대는 부모님의 권유로 가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적성에 맞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전 계산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공부를 좋아하는데 약대는 대부분 암기과목이라서 너무 어려웠지요. 물론 모든 과목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실 제 기억력, 특히 단기 기억력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억력으로 약학을 전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저는 늘 그게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졸업하면 정말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실컷 하겠다.’ 그런데 그게 말이죠. 졸업하고 나서 하고 싶었던 공부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선택하는 것도 만만치 않더군요. 일단 처음에 선택하였던 게 방송통신대 경영학과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직장인들을 위한 대학원(특수대학원)이 많지 않았고 낮에 약국을 비운다는 건 상상하질 못했거든요. 이후 약국이 안정되니까 요령이 생겼습니다. 아르바이트 약사를 고용하고 낮 수업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다녀오는 거죠. 물론 자주 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사이버대학교가 갑자기 우후죽순 개교하였고 (사이버대학)특성상 이중 학적을 허용하는 학교가 많아졌습니다. 또 대학원도 타 대학원끼리는 이중 학적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았고요. 그러니까 배우고 싶었던 분야를 시간만 맞추면 실컷 공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고요. 어떤 학교를 선택할지 밤새워 인터넷 검색도 하였고... 잠시 말이 옆으로 샜습니다(웃음).

공부에 몰두하는 이유는 특별히 없습니다. 그게 제 취미인 거 같아요. 취미란 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배워간다는 거. 제게는 그게 소름끼칠 정도로 즐거운 일로 와 닿습니다.

 

Q 어떤 학교와 학과를 다녔으며 자격증은?

 

분야가 다양합니다. 그래서 빈 수레가 요란할까봐 걱정될 때가 많아요. 학부로는 제 직업인 약학을 비롯하여 방송대에서의 환경보건학과 식품영양학과, 사이버대학교에서는 피아노학, 경영학, 사회복지학, 문예창작학, 상담심리학, 전기전자공학, 실용음악학 정도를 졸업했습니다. 회화과, 빅데이터학은 졸업 예정이구요. 석사는 응용화학, 컴퓨터공학, 과학기술교육학, 환경학을 졸업하였고 사회복지학, 약학, 음악학(피아노), 정보통계학과는 수료하였는데 올해 중에는 졸업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사는 평생교육학을 전공하였고 이 외에 진행 중인 과정들이 많습니다.

자격증은 약사 면허, 영양사 면허, 사회복지사 1, 2급, 공인중개사, 주택관리사, 산업위생관리기사, 정보처리기사, 물류관리사, 평생교육사 등 이밖에도 더 있는데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Q 가장 재미있었던 학과는 무엇이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박사과정이었던 평생교육학과였습니다. 코스워크 과목뿐만 아니라 연구 방식도 제 적성과 딱 맞아떨어졌지요. 지도교수님이신 이창식 교수님께서도 잘 챙겨 주셨구요.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이밖에도 평생교육학과에서는 학생들의 커뮤니티도 잘 형성되어 있어 스터디나 연구의 협력이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니 무엇을 하더라도 다 만족스러웠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가장 보람되었던 일을 꼽으라면 방학동안 헤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통계와 논문을 공부하였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학생들이 직장인들이었고 가족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 2019 약학 춘계 국제학술대회 Young Scientists Session 발표 모습

 

Q 논문은 몇 편을 썼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은?

 

30여 편 정도로 기억합니다. 국제저널 Scopus에 13편, KCI 등재지에 13편 정도가 실렸고 이외에도 국내 기타 학술지에 실렸죠.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은 아무래도 처녀작이 아닐까요. 2016년 7월 ‘청소년들의 학업성취도’란 주제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밤 새워 만들어 제출했는데 지도교수님께서 계속 퇴짜를 놓는 거예요. 당시는 학교를 그만 다닐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그게 논문 초심자였던 저를 훈련시키기 위한 의도였던 걸 깨달았지요. 6개월 고생 뒤 출판된 논문을 보는데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혹독한 과정을 거치고 나니 이후부터는 논문들이 그냥 술술 써지는 겁니다. 마치 손목이 기억하는 것처럼.

 

Q 앞으로의 꿈은?

 

너무 많아서 정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우선 3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싶어요. 참고로 이것은 제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첫째, 우리나라 최대 학위 보유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학위라는 목표가 있기에 학업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경험상 객관적인 종국적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학업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학위 취득을 목표로 공부하였을 때 학업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이루었을 때 성취감과 뿌듯함 또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연간 석사학위 2~3개, 박사학위 2~3개 취득을 목표로 공부 중이며 40대에 적어도 박사학위 20개를 취득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국가 자격증 취득도 연간 2~3개를 목표로 할 거구요.

둘째, 끝없는 연구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학위 공부는 연구를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구슬이 있어야 꿸 수 있듯 구슬을 준비하는 과정이 학위 공부라면 이를 응용하는 단계는 연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다 보니 지식들이 통합되어 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이러한 지식들을 융합적 차원에서 연구해 보고 싶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창안해 보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셋째, 조금은 다른 얘기인데 제 어릴 적 꿈이었었던 오케스트라 지휘를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팝음악 보다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합니다. 아니, 오로지 클래식 음악만 고집합니다. 피아노는 20세 이후에 배우기 시작하였어요. 그런데 배웠던 이유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전공하고 있기도 해요. 가까운 미래에 서산 지역에서 챔버(chamber)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주로 서·태안 지역에서 활동해 보고 싶은데 예를 들면, 서산공단 출퇴근 음악회나 호수공원 주말음악회 같은 거 말예요. 비영리 차원에서 사람들과 음악을 통하여 교감하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 이창식, 황연경, 장하영, 유은경 <공저> 도서출판 청람

 

<에필로그>

 

나날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장하영 약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그는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는 것처럼 보여도 옆도 뒤도 돌아보는, 어쩌면 가슴 따뜻함을 누구보다 많이 지닌 대한민국의 진정한 지식인 1호가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기자는 그로인해 인생을 되돌아보며 성찰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선물 받았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번 인터뷰로 인해 잠시 짬을 내어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 파투 나버린 장하영 약사. 그가 꾸는 꿈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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