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논쟁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수 없는 영혼들

“좌·우익 3차례의 집단학살...주민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고, 65년이 흐른 지금도 그 상처와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6·25 전쟁 초기 우리 서산지역 이야기다.  6·25 전쟁 시기 전투는 주로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에 당시 서산지역은 전투와 관련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천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집단학살이 자행됐다. 왜 일까? 그 참혹한 역사를 추적한다. - 편집자 주

 

전국 최대 규모 민간인 희생

1950년 7월 경찰->보도연맹원, 요주의·요시찰인 집단학살

1950년 9월 인민군과 좌익->우익 인사들 소탐산 집단 학살

1950년 10월 경찰과 치안대->부역혐의자 민간인 집단학살

전쟁 시기 서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그리고 부역혐의희생사건이 상호 고리처럼 연결되어 연이어 3차례 발생했다.

맨 처음 군경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을 집단 살해한 것이 직접적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이어 인민군 점령기에 보복적 차원의 집단살해사건이 있었고, 수복 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행위와 더불어 대규모의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했다.

메지골 등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 서산시 성연면 일람리 621의 2 일대 일명 ‘메지골'은 1950년 7월 서산·태안지역 보도연맹 연루자 수십 명이 적법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전쟁 초기 한강 도하 이후 남진을 계속한 인민군 제6보병 사단은 1950년 7월 9일 천안 서북 지역에 도착했다. 인민군 제6사단은 중공군 제166사단을 전환하여 편성한 사단으로, 사단장은 방호산(方虎山)[본명은 이천부(李天富)]이었다.

7월 11일경부터는 제6보병 사단의 1개 연대가 포병 연대 예하의 1개 포병 대대와 합동으로 서해 연안을 따라 군산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6보병 사단 주력은 7월 12일 아침 공주 유구리에 도달하였으며, 제13보병 연대는 서해 연안을 따라 서산, 홍성 방면으로 남하하여 서산, 홍성, 공주 방면을 통과했다.

인민군이 서산·홍성 방면으로 남진하자 서산 경찰은 예산 지역의 경찰과 함께 신창 등지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를 수행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진 서산과 태안 경찰은 7월 12일경 지역의 모든 공공 기관을 소개한 뒤 철수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전쟁 직후부터 군 경찰서나 면 지서에 예비 검속을 해 두었던 보도 연맹원이나 요주의·요시찰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경찰이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 등지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한 것도 퇴각 직전인 7월 9일부터 12일 사이였다. 메지골 마을 주민 공 모씨는 그날 거의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요란했고, 그 당시 어른들이 메지골 산골짜기 초입부터 끝까지 시체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충남서부지역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은 수백 명에 달했고,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74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희생자들 중 상당수는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하면 장래성이 있고 직업도 보장된다'는 등의 주변의 회유와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가입한 농민들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은 1950년 6월25일 내무부 치안국장 명의로 전국 각 도 경찰국장에게 내려진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같은 달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 다음 달인 7월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 등의 지시에 의해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이에 따라 서산경찰은 지역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예비검속 대상자들을 연행하거나 불러들여 구금한 후 인민군의 남하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산 성연면 메지골 △당진 한진포구(목캥이) △태안 백화산(사기실재)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유족에 의해 수습됐으나 태안과 부여의 경우 경찰이 희생자들을 총살한 후 시신을 불태우거나 백마강 등지에 수장시켜 시신수습이 어려웠다.

당시 태안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했던 이 모 씨는 진실화해위의 조사에서 "충남경찰국의 지시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 중 일부를 대전형무소로 이송했고, 후퇴하기 2~3일전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을 '즉결처분 하라'는 공문을 충남경찰국으로 받았다"고 진술했다.

 

서산지역 인공 73일간

인민군 3개 연대 주둔

서산군의 경우 1950년 7월 18일부터 9월 30일경까지 인민군 3개 연대가 군 경찰서에 주둔하였다. 당시 서산 지역의 지방 좌익들은 인민군과 노동당의 지도하에서 군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뒤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인민 공화국 시기, 서산군에도 정치 보위국의 지휘 하에서 군 내무서, 면 분주소, 리 자위대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군·면 단위의 노동당과 인민 위원회 조직, 또는 청년 동맹, 농민 동맹, 여성 동맹 등 각종 정치·사회단체를 조직한 뒤 이를 매개로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핵심 내용으로 한 북한식 토지 개혁, 8·15해방을 기념한 궐기 대회 형식의 인민재판, 징병과 전쟁 물자 징발 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전개로 인민군 후퇴

양대리, 소탐산에서 우익인사 집단학살

▲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좌익에 의해 희생된 우익인사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다.

1950년 9월 중순 인천 상륙 작전이 전개되자 서산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도 인민군 전선 사령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1950월 9월 30일경부터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태안 지역에도 미군들이 함포 사격을 하면서 근흥면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고 전한다.

서산시 수석동에는 소탐산(蘇耽山)이 있다. 소탐산은 음암면 신장리와 경계에 있는 산(山)으로 해발 122m밖에 되지 않지만 동으로 가야산(伽倻山), 북으로 간대산(艮臺山)과 성왕산 그리고 부춘산 옥녀봉(玉女峰)을 병풍처럼 두른 앞에 넓게 펼쳐진 평야 위에 알듯 모를 듯 노년기의 잔구로 내려온 구릉이 마침내 둥근 봉우리를 이룬 산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소탐산이다.

산의 생긴 모양이 너무 아담하고 예뻐서 예부터 이름이 있어 왔고 높은 산이 없는 이 곳 사람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할 때에는 기우제도 지내는 신령한 산이다.

그러나 퇴각하는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대규모 우익 민간인학살 사건이 소탐산과 양대리에서 벌어졌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대한청년단원, 공무원, 경찰공무원과 가족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 여자까지 경찰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대상에 포함시켰다.

소원면 부면장 김성용 씨, 전직 경찰이었던 이창영 씨, 의용소방대였던 심형섭 씨 등도 서산내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양대리에서 총살 혹은 창으로 척살되었다. 심지어 박종혁 씨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이유로. 박홍진 씨는 공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와중에 집안끼리의 토지문제 등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밀고 되어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 서산시 양대동 937 일대는 1950년 9월 서산·태안지역 민간인 수십 명이 퇴각하던 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무참히 총살돼 매장된 곳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부신문, 충서신문에서는 전쟁 중이라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7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기록에 의하면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의 학살은 서산시 177명, 태안군 156명 모두 333명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서산시 수석동 소탐산 자락에는 당시 희생된 300여 명 중 28구가 안치돼 있는 ‘반공호국희생자 합동위령탑’이 있다.

서산군 수복, 우익청년 치안대 조직

2000여명의 부역혐의자 집단학살

▲ 서산시 갈산동 산 2의 87 일대는 1950년 12월 서산·태안지역 부역혐의 체포자 1천865명중 일부가 집단 희생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산군이 수복되자 서산 지역의 우익 청년(의용 경찰, 의용 소방대, 대한청년단)들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치안대를 조직한 뒤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부역자들을 무단으로 색출하여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역 혐의자에 대한 사사로운 학살은 10월 8일 경찰 진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 등에 의해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2,000여 명 이상의 부역 혐의자들이 좌익이란 죄명을 쓰고 집단 학살되었다.

당시 경찰은 북한군 점령 시기(1950년 10~12월)에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읍·면 창고 등에 가둬놓고 가담 정도에 따라 ‘가·나·다’ 3등급으로 분류했다. 이어 경찰은 처형 대상인 ‘가’ 등급으로 분류된 수백 명을 서산시 갈산리 교통호 등지에서 즉결 처형했다. ‘나’ 등급은 재분류, ‘다’ 등급은 훈방으로 분류됐지만, 실제로는 이들 중 상당수도 처형된 것으로 파악됐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북한군 점령기에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 및 우익단체 등이 주축이 된 치안대가 자의적으로 처형 대상자를 정하면서 피해 규모가 컸다”고 밝혔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한 경찰은 “부역 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 많이 개입됐다”고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진술했다.

특히 우익인사들이 집단학살 당했던 소탐산이 이제는 부역혐의자 집단학살의 장소로 사용됐다. 소탐산 부역혐의자 집단살해사건은 1·4후퇴 직전에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사건 당시 소탐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은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트럭으로 이송하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약 한 시간 동안 총소리를 들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전했다.

당시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 정○○도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급해서 그냥 끌고 갈 수 없으니까 (부역자들을) 소탐산에서 죽였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해미면 홍천리의 전재기 씨는 아버지와 함께 친척의 시신을 수습하러 소탐산에 갔었는데, 수십 구의 시신이 골짜기에 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당시의 참혹함을 전했다.

당시 서산경찰서 ○○지서장 등 다수의 경찰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됐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치안대원과의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는 등 부역혐의가 불분명한 민간인의 희생도 매우 많았다”고 밝혔다.

지곡면에 사는 이 모 씨는 "평생을 좌익이란 딱지를 붙여 숨죽이며 살고 있다. 좌익을 하다 죽었다면 그래도 덜 억울하죠, 이건 농사밖에 모르는 청년을 잡아다가 부역했다고 죽이고 시신조차 못 찾아가게 했으니 그게 사람들이 할 짓입니까?" 이 씨는 평생을 분한 가슴으로 산다고 했다.

팔봉면의 안 모 씨는 “할머니는 평생을 '우익눔덜'하며 우익세력에 의해 희생된 아들의 죽음을 애달파 하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생전에 결혼도 못하고 죽은 동생의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집안어른들께 제가 어릴 때 귀가 닳도록 듣고 지낸 말은 '앞에 나서지 마라'였습니다, 지금도 여차하면 좌익이니 빨갱이니 몰아 매도하는 판국 아닙니까. 정치인들은 아직도 국민을 자기들의 탐욕을 위해 우리를 총알받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며 분개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념논쟁

이렇듯 서산지역 원주민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세 차례의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인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이 상처가 살짝만 건드려도 피가 터져 나올 듯 한 정치 냉소주의나 허무주의가 이 지역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이유도 이웃 간의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지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6.25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보듯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좌우익에 앞장섰던 ‘정치가’들도 그들을 위해 앞장섰던 ‘보도연맹원’도 ‘우익의 치안대’도 아니었다.

평생 땅을 파며, 농사를 짓던 농부였고, 서민들이었다. 1950년 그 잔혹했던 민간인 학살사건으로부터 65년이 흐른 지금도 이 땅에는 종북주의니 친미주의니 하는 이념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누구를 위한 논쟁이며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지금도 메지골, 소탐산, 양대동, 갈산동에는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영령이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땅에서 이념논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갈 수 없는 까닭이다.

 

국민보도연맹이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로 정부수립 이후 결성되었지만 조직 성격과 명칭, 운영방침 등은 보도연맹 창설을 주도한 검찰과 경찰 간부들이 일제강점기 때 본인들이 운영·관리하였던 사상보국연맹·대화숙·교외교호보도연맹의 조직 성격과 명칭·운영방침 등을 원용해 조직을 결성하고 주도했다.

이 조직은 법률이나 훈령에 근거해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었고, 내무부·국방부·법무부와 사회지도자들이 협의 후 정부 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 조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운영하는 주요직책은 모두 군·검·경의 간부들이었으며 보도연맹은 법률상 임의단체이자 성격상 관변단체였다.

구체적인 가입대상자는 창설 초기 국가보안법 관련자와 남로당원을 비롯해 노동조합전국평의회·인민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남로당 외곽 단체 구성원들이었으나 조직 확대과정에서 정부는 보도연맹 의무가입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고, 이 규정은 자의적이어서 좌익과 관련이 없는 국민들이 가입되었다. 또한 가입인원 수가 말단 행정기관에 강제 할당되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많은 지역에서 좌익에게 물자나 식량을 제공한 혐의로 강제로 가입된 경우가 있었고, 주민 간의 사적감정에 따라 보복으로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일부지역에서는 비료나 배급 등 각종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키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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