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첨지가 살아 숨 쉬는 마을

▲ 마을회관 전시실에 보관돼 있는 박첨지놀이 주인공들. 오는 연말 전수회관이 준공되면 새로운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조용하던 음암면 탑곡4리가 요즘 떠들썩하다. 십 수 년에 걸쳐 말만 무성하던 박첨지놀이 전수회관이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어떤 마을이건 간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문화유산이 하나 둘씩은 있게 마련이지만 박첨지놀이는 서산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특색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 이유로 서산에서는 최초로 지난 2000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26호)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도 지정 무형문화재라고 깔보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박첨지놀이 이후 15년 동안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문화재가 3가지뿐인 것만 보아도 박첨지놀이가 얼마나 중요한 문화적 위치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첨지놀이와 평생을 함께해온 마을 노인들도 언제부터 이 놀이가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인데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 그 유래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박첨지놀이와 같은 민속 인형극이 유행했으나 현재는 오직 탑곡리에만 남아있다고 한다.

주민들의 기억을 빌리자면 1930년대 초 남사당패 놀이꾼 출신인 유영춘 선생이 이 마을에 들어왔고, 당시 박첨지놀이를 이끌던 주연산 선생과 의기투합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일제강점기 박첨지놀이는 큰 위기에 빠졌는데 매서운 감시 아래서도 민족혼이 담겨있는 문화유산을 지켜야한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마을주민들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해방이후에는 농한기나 추석명절을 맞아 놀이판이 선다는 소문이 퍼지면 인근 마을은 물론 먼 곳에서까지 구경꾼이 몰릴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했고, 지난 1989년 당시 인기프로그램이던 ‘사랑방 중계’에 방영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그 후 수차례에 걸친 방송출연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최근에는 보존회원들의 나이가 고령화되면서 젊은 회원 영입이 절실한 형편이 됐다. 그러나 주민들은 박첨지놀이 전수회관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부푼 희망을 안고 박첨지놀이의 전수에 매진하고 있다.

박첨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탑곡4리에서 제2, 제3의 박첨지가 탄생하길 기원해 본다.

 

인터뷰 김동익 박첨지놀이 보존회장

“통렬한 사회비판이 큰 매력

김동익 보존회장은 평생을 박첨지놀이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산증인 중 한사람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김 회장은 16살 때 마을 어르신들의 박첨지놀이 공연을 돕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후 시간은 박첨지로 살아왔다.

김 회장은 박첨지놀이의 가장 큰 매력은 통렬한 사회풍자에 있다고 했다. 가부장적 사회와 기득권 세력(양반)에 대한 해학 가득한 비판이 수백 년간 서민들의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줬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해 올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11명의 보존회원들이 자신의 배역을 전수할 후계자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며 젊은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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