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토사학자 이영하 선생

 

“문화는 역사의 덩어리요 뿌리와 열매다”

이영하 “소명의식 가지고 미래세대에 물려줄 터”

 

프롤로그

 

“선진국은 문화에 비례합니다. 이 말은 곧 삶의 질이 높을수록 문화수준도 올라간다는 뜻이지요”라고 말하는 이영하 선생. 기자는 늦은 오후시간에 편안히 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우리는 흔히 「문화」라는 말을 할 땐 주로 나이 얘기가 먼저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이와 비슷한 경계의 말로 ‘청소년들 문화’ 또는 ‘어른들 문화’로 나누며 자신들끼리만 공유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문화기획자나 문화를 접하는 사람들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역사라는 범주만은 나이를 경계로 엮지 않는다.

몇 년 전 명성왕후 뮤지컬을 봤다. 함께 간 친구가 객석의 흐느낌과 작은 한숨을 듣더니 “우리의 아픈 역사가 침묵 속에 사라질까 두렵다”라는 소리를 했다. 기자는 그때 ‘역사는 올바른 텍스트로 기록되어 반드시 후대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관중석의 불이 켜졌다. 당시 눈에 비친 세대 불문의 관중들.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 되어 기립박수를 치는 모습을 봤다. 정말 감동이었다. 역사야말로 나이를 불문하고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지난주 우리지역 문화유산 지키기에 앞장 선 향토사학자 이영하 선생을 만나,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부터 우리 지역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보기로 하자.

 

# 엄한 부친 덕에 온 동네를 돌며 빠짐없이 세배를 다녔던 명절

 

서산군 음암면 수석리 주을마을에서 태어난 이영하 선생. 그는 등하교 시절 소탐산에 올라 서해를 한참씩 바라보면서 꿈을 꿨고, 하산할 때는 진달래를 꺾어 옹기그릇에 꽂아 두는 서정적인 아이로 자랐다. 이 선생은 자신의 어머니 성향을 닮았다고 했다. 또 “세상의 질서는 사람의 예절에서부터 비롯됨으로 유년기에 형성된 습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던 그의 아버지. 이영하 선생은 엄한 훈육으로 자신을 가르쳤다고 그의 아버지를 기억했다. 사실 그의 부친은 명절 때 동네 어느 댁에 세배를 다녔는지 꼭 확인하였고, 먼 일가 댁은 밤이 늦더라도 반드시 갔다 오라며 어린 자신의 등을 떠미셨다고 회상했다.

 

# 회초리를 들며 훈육하신 부모님, 그것은 자식에 대한 강한 사랑이었다.

 

그의 부친은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가업을 이어받아 한약업에 종사하며 사람들에게 의덕을 베풀었다. 지금은 이 선생의 자녀가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저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삼형제 분이 고종황제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복차림으로 경성(서울)까지 3백여 리를 도보로 왕복하셨대요. 정말 대단들 하지 않으십니까. 부친은 평소 늘 모시 두루마기에 모자를 쓰시고 손에는 꼭 두루미(학)다리 지팡이를 들고 외출을 하였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요즘말로 상당히 세련된 양반이셨던 거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부유한 집 장녀로 성장하면서 서당에서 공부를 한 똑똑한 분이셨죠. 우리 3남 2녀는 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어머니에게 한글과 중요한 한자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 저는 당시엔 최초로 양복을 입고 등교하는 부러움의 대상인 학생이었죠.

이런 두 분도 마냥 (자식들)보듬기만 하지는 않으셨어요. 때론 우리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회초리를 드는 것은 늘 어머니셨죠. 당신은 꼭 저희들에게 “몇 대 맞겠느냐?”며 물으신 다음 걷어 올린 종아리에 매를 대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닦으셨죠. 어머님의 그런 모습은 자식에 대한 강한 사랑이었음을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습니다.”

 

# 농촌계몽에 관한 책을 읽으며 농촌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크면서 그는 도매상 점원으로 들어가 늦은 나이에 야간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으면서 농촌을 디자인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뜻있는 몇 분과 지역 야간중학교를 개설하여 청소년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호응이 좋다보니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가만히 보면 가르치는 일도 좋아했지만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했던 저였어요. 군 복무시절, 읽을 책이 없어서 포켓용 한글사전과 한자사전인 옥편을 읽었어요. 그런데 어찌나 재밌던지 읽고 또 읽었지 뭐예요. 제대하면서 부터는 농촌에 관한 책을 탐독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성농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빈 땅과 둑 그리고 마당가에 콩, 피마자(아주가리), 해바라기, 포도나무, 복숭아나무를 사서 집집마다 심도록 나누어 주기도 했어요. 저녁에는 사랑방에 모여 마을이 울리도록 ‘하면 된다!’ 구호를 외쳤구요. 또 있네요(웃음). 서산에서 최초로 마을문고를 설치하고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을에 생기가 돌았고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검증하고 싶었던 청년 이영하

 

로마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대제국을 이루었듯이, 그는 젊은 시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생각하며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을 돌면서 지도와 비교하는 여행을 떠났다. 기자가 “정말 당시의 지도가 맞기는 맞더냐?”고 하자 이영하 선생은 “너무나 정확해서 깜짝 놀랐다. 가는 곳마다 어찌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지던지... 하나하나 보면서 무릎을 치며 걸었다”며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저의 집에는 일꾼이 있었어요. 형님의 군 입대로 저는 (일꾼)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나는 데로 틈틈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대동여지도가 맞는지 확인했어요. 아주 맹랑한 청년이었지요(웃음).”

 

# 농사를 짓다. 그리고 공무원이 되다.

 

27살 결혼을 하면서 황무지를 일궈 양계, 과수,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등 부엉골 농장을 열었다는 이영하 선생. 그는 말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정착기에 접어들던 1970년, 서산군청 게시판에 지방공무원 채용공고를 보고 식구들 몰래 응시를 했습니다. 운이 좋았던지 ‘5급 을류’에 합격을 했어요.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반드시 좋게 온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2남 1녀를 데리고 서산시내로 이사하며 마른 신발을 신으며 살게 되었죠(웃음).”

 

▲ 도로명 주소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이영하 선생

 

# 도로명주소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

 

그는 교육행정공무원 출신일 때부터 주말이면 지역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둘러보고 걷고 메모하기를 여러 시간. 그러다보면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이 되었고 그는 들고 온 보따리를 서둘러 메고 자리를 뜨곤 했다. “도로명주소가 거론되기 전인 지난 2001년 서산시의 기간도로망에 대한 이름을 짓는 임무를 맡게 된 것도 이런 인연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서산에서 대산 간 ‘충의로’는 충신과 의인들이 많이 탄생한 지역을 상징해 충신과 의인을 합쳐 만들었구요. 백제의 사신들이 지나간 길이라 하여 만들어진 지곡과 성연 방면의 ‘백제사신로’, 서산과 당진 간은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따 ‘고은로’라 칭하였습니다. ‘안견로’, ‘서해로’ 등도 제 손을 거쳐 이름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몇 년 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도로명주소 작업은 오랜 세월 길을 따라 향토사를 연구해온 까닭에 어렵지 않게 만들어졌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이미 서산지역의 길들이 자리 잡고 있던 터라 사연을 담은 길들이 줄줄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대가가 바로 길로 연결되었던 거지요.”

 

# 미래를 여는 산업대상 수상, 전통과 역사적 유산을 현대적 개념으로 승화시키는데 앞장서

 

경기대학교 대체의학, 동방대학원 미래예측학, 상명대학교 자연요법치유학을 수학하며 강의를 해왔다는 이영하 선생. 재직 중인 1990년대 초부터 지역학인 향토문화연구회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한 선생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서산에서 아주 중요한 지방사를 이끌고 있는 향토회장이다. 이곳에서는 ‘신서산 8경 선정의 아라메길 기획, 동학북접연구와 접전지 매현의 발견, 서산의 도로명주소 기획, 서산의 문화유적 76개소 해설문 작성, 서산 부춘산 옥녀봉의 3선암(1,2,3선암), 3선대(하선대. 중선대. 상선대)확인, 백제 네 번째 왕도 주류성 탐지발표 등 그간의 공적들이 한 가득이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2017년에는 미래를 여는 산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향토문화연구회를 구심점으로 지역사회의 역사, 문화, 행정, 교육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이유로 (미래를 여는 산업대상)큰 상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지역사회의 전통과 역사적 유산을 현대적 개념의 문화부흥으로 승화시키는데 앞장섰다고 주는 상이라더군요” 라며 상장이 걸려있는 한 쪽 벽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 20년 만에 빛을 본 논문으로 대한민국 사회공헌 대상, 대한민국 혁신한국인 & 파워브랜드 대상 수상

 

또 하나가 더 있다. 2017년 서산지역에서 벌어진 동학혁명의 중요한 역사자료인 ‘매현’을 찾아내 세상에 선보인 이영하 선생. 동학군과 관군의 치열한 교전지였던 매현은 수많은 설만 넘쳐났을 뿐 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버릴 처지에 있었던 이야기가 어느 날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날은 집안 제사였어요. 그때 큰 아버지께서 우연히 과거 동학군의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귀가 솔깃하대요. 그때부터 천도교 자료를 바탕으로 문헌에 기록된 현장을 모두 답사해가며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 결과 동학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곳이 지금의 음암면 신장리 산 68번지(소탐산 뒤편)라는 것을 밝혀냈구요.”

1996년 매현과 관련한 그의 논문 ‘충청도 서부지역(서산·태안) 동학농민군 최후 접전지 매현의 확인’이 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대한민국 사회공헌 대상을 받기도 했다. 이는 서산시 향토사 발전과 전통문화유산의 조사·연구·창달에 헌신하고, 향토자료 발간 및 학술가치 창출을 이끌며, 서산향토문화연구회 위상증대와 지역문화예술 수준제고 및 균형발전에 선도적인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 서산에 반드시 있어야 되는 서산박물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들었다고 하자 그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고유의 역사와 문화 등을 보존·전승하기 위해선 박물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서산시만 박물관이 없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2007년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힘을 합쳐 국립서산박물관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전국의 박물관이란 박물관은 다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기회가 되는대로 외국 박물관까지 답사를 마쳤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성사를 목전에 뒀다가 끝내 무산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현재 발 빠른 추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줄 압니다. 성일종 의원은 ‘흩어져 있는 문화재 보관 및 관리를 위해 서산시 유물전시관 건립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고, 맹정호 시장 또한 ‘내포박물관 건립을 충남도와의 협력을 통해 서산에 추진하겠다’라고 발표했지 않습니까. 의지를 밝혔으니 좀 더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으로 힘쓸 것으로 압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연구는 하나의 역사이고, 문화입니다. 저 혼자라도 연구를 하지 않으면 매몰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서라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앞으로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역의 역사문화 증진과 부흥을 위해 연구회에 함께 활동하시고 참여해주시는 회원님들이 계시다는 것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분들의 열정에 힘입어 시대적 사명의식으로 견인차 역할을 하며 향토사 연구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특히 후계자 양성에도 더욱 힘써 지속가능한 연구회로 만들어 나갈 것을 약속드리구요.”

그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런 말을 기자에게 남겼다.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문화적 정서만은 놓지 않고 살아 왔습니다. 축제 속에 장승을 세우고 안녕을 기원하는가 하면,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뜨거운 국물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며 땀을 씻어내는 강인한 혼을 간직한 나라가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이 땅에 문화를 지어놓은 선인들이 있고 또 지어나갈 우리가 있기에 앞으로도 그 맥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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