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형문화재 17-2호 내포제시조보존회장 안종미 단장

 

“나는 지금 사다리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밟아 올라가고 있다”

“앞으로도 숙명처럼 우리의 가락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 기자와 인터뷰이의 대화 형식을 띤다. 하지만 안종미 단장의 인터뷰 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써 내려갔다. 다소 파격적인 형식이지만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택했다. -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 프롤로그

오늘은 뭔가 가슴 한쪽이 도려내듯 아프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겨우내 얼었던 모든 만물이 몸을 풀며 걸음마를 시작한다. 하지만 내겐 유독 풀리지 않은 가슴속 아픈 기억이 있다. 은밀하게 때론 미치도록 지독하게 나를 할퀴고 지나가는 유년시절의 상처. 한 번씩 매운바람처럼 스쳐지나갔던 지난 시간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을까 한다. 돌아보는 것도 차마 안쓰러워 애써 도리질했던 나의 이야기를 서산시대를 통해서 말이다. 이날은 대한민국 독립 100주년 3.1절을 맞은 오후였다.

 

# 하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안종미. 이것이 내가 지금껏 세상에 내 놓은 이름 석 자다. 한 때는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려워 내 이름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새벽 두시면 으레 아버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분명 술이 취해 저녁잠을 주무시던 분이 어느새 일어나 장작처럼 서서 겨우 잠든 나를 내려다보며 호통을 쳤다. “술이 떨어졌으니 가서 술을 사오느라”는 어명이었다. 주전자를 챙겨 주막까지 가려면 보름달이 떴을 땐 40분, 초승달이 떨어질 땐 너무 깜깜하여 1시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길이다. 새벽 두시니 당연히 주막집 문은 굳게 잠겼을 테고, 어린 나는 그곳에서 문을 두드리며 한정 없이 또 주인을 불러야 했다.

어린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며칠 되지 않은 무덤이었다. 70년대는 왜 그리 어린아이와 어른들이 많이도 죽었든지. 술을 사러가는 길에 만나는 숱한 무덤들은 내 머리칼과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귀신이 따라오는 건 아닌가 하고 사시나무 떨듯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아버진 내 등을 떠밀며 200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술 한 주전자 값은 220원인데...

 

# 둘

우리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에 취하는 날이면 딸 셋은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왜 그렇게 밝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우리 자매들을 찾아 지난번 세웠던 벌을 또 세웠다. “닭은 해가 뜨기 전에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준다. 그만큼 부지런하다. 너희들은 닭만도 못한 인간이다. 지금부터 토끼 뜀뛰기를 하면서 “‘해 떨어졌슈’라고 닭들에게 절을 해”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말이었지만 이미 우리는 아버지에게 길들여진 순한 양이었다. 언니들과 함께 일렬로 서서 배고픔을 참아가며 외쳤다. “‘해 떨어졌슈’, ‘해 떨어졌슈’...”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음색이 파장을 일으켜 어둠속으로 젖어들었다. 목은 이미 쉬었고 걸음은 비틀거렸지만 그래도 어쩌면 밥을 먹을 수 있진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슬금슬금 밥상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딸들 밥마저도 아버진 소밥으로 쓰일 구정물 속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 셋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내일’이 아니겠는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했던 어른들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초등학생이었지만 가난한 집안을 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남의 인삼밭에 가서 짚을 엮어 천막으로 씌우는 작업을 하고 돈을 벌어왔다. 때로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지피기도 했고, 사방공사가 한창일 때는 그곳에 나가 일을 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아니 나 안종미는 어쨌든 살아남아야 했다.

 

# 넷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미치도록 힘들게 했던 아버지가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나는 너무 기뻐 동네사람들이 아버지 수의를 꿰매고 있는 그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다시는 이상한 벌을 서지 않아도 되고, 밥을 굶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잠을 잘 수 있었고 새벽녘 무덤을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아 좋았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했으니까. 이제 더는 이불 속에 몰래 숨어서 고구마를 먹지 않아도 되었고, 아그작 소리에도 아버지의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제 더는, 정말 더는 엄마가 우리 자식들 밥 먹이려고 나무 뒤에 밥공기를 몰래 숨겨 둘 일은 없을 테니까. 밥 한 끼를 먹더라도 더는 집 뒤에 숨어서 미친 듯이 먹을 일은 절대, 절대 없을테니까.

 

# 다섯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후, 엄마는 그동안 못해 준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주셨다. 나는 엄마 냄새가 좋아 무릎을 베고 누워 처음으로 잔잔히 엄마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런 막내딸을 사랑스런 눈길로 내려 보시며 이를 잡아주었던 우리 엄마. 삯바느질을 하며 오봉산 타령과 신고산 타령을 흥얼흥얼 들려주시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발장단을 치며 함께 흥얼거렸다.

그때 들었던 엄마의 노래들이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의 노래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한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내지는 아픔이 묻어 아주 슬프게 들리기도 했다.

 

▲ 내포제시조보존회장 안종미 단장

 

# 여섯

많이 아팠던 유년시절은 그렇게 상처와 아픔으로 나를 성숙시켰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무엇보다 자존감이 극도로 낮은 나 안종미. 의욕도 없이 주어지는 대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갔다. 21살 어린 나이에 고향집 가까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성실하고 착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막내로 시집을 갔지만 우리는 시부모님을 모시며 정말 재미나게 살았다. 그 사이 아들 둘을 낳았고 아이들이 커 나가던 어느 날, 시댁이 건너다보이는 산 옆으로 작은 조립식 집을 지어 분가를 했다.

비록 농사를 지었지만 그래도 어른들을 모시지 않으니 자투리 시간들이 꽤 있었다. 그러던 차 친구가 부르는 한강수 타령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내 심장이 바위 위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도 배워봐. 서산에 있는 새마을금고에서 민요를 가르쳐줘.”

 

# 일곱

내 나이 서른두 살, 유치원에 막내를 맡기고 서동새마을금고에서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날이었다. 당시 민요동기들은 주로 6~70대 노인 분들. 젊은 아낙이 콧소리를 넣어가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니 여기저기 박수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러면 차태완 선생님은 “잘했어”라며 용기를 심어주었고, 나는 또 그것이 고마워 더 열심히 연습에 연습을 더 했다. 그 후 민요에 대한 나의 열정은 중요무형문화재 19호 이수자 배수옥 선생, 보유자 황용주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이춘희 선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경기민요 수료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 나갔다.

 

▲ 2018년 내포제시조 발표공연

 

# 여덟

배움의 행보 속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배수옥 선생. “지역에서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라며 중앙으로 내 등을 미셨다. 돌아보며 불안한 눈빛을 보이자 “더 큰 곳을 보며 꿈을 꾸어라”며 또 재촉을 하셨던 고마운 선생님. 그런 선생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정말 부단히도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서울을 넘어 아시아, 그리고 유럽 대륙으로 그 파이가 나날이 확장되어 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늘 마음 한구석에는 나도 모르는 위축감과 허함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아홉

어느 날 단국대 서한범 교수님이 미국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나를 부르셨다. “이제 대학 강단에 서야지?” 그 한마디가 토네이도가 되어 내 가슴을 내리칠 줄이야... 가슴이 콱 막히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교수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밤새 뜬눈으로 보낸 교수님이 이튿날 아침 일찍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또 말을 못하고 울었다. 지나온 환경이 아파서... 교수님께 숨김없이 말씀을 드렸다. 그때 교수님은 나를 다독여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바로 시작하면 되지.”

나는 현재 서울디지털문화예술대학교 실버문화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그리고 학사 졸업장을 받으면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에 다닐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지만 나는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그 본분을 지킨다.

 

▲ 예능보유자 박선웅,서한범,최민주,안종미

 

# 열

늦은 나이에 취미로 시작하여 선소리산타령과 내포제시조 이수자가 되었다. 내포제시조 보존 회장에 취임하기까지의 치열했던 나의 삶!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지금까지는 노래를 잘 하지 못해도, 행동이 바르지 못해도 흉이 되지 않았어. 하지만 이수자가 되어 문화재청에 등록이 되는 순간 너는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어야 할 거야. 행동은 물론 인간관계까지도 말이야. 소통하고 포용해야함은 물론 늘 연구하는 자세로 임해야해”라고 말씀하셨던 박선웅 은사님.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 소리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소리를 후학들에게 물려주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 무궁화예술단

 

# 열하나

박선웅 은사님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시조 보급을 전파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내포제시조 보존 회장을 맡고 있으며, 무형문화재 17-2호 박선웅 보유자의 대를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여 부르는 노래 시조. 이는 지식인이나 선비계층의 애호를 받아 왔던 우리의 전통가락이다. 하지만 빠른 템포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겐 이런 부류의 노래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공연장에서도 시조를 부른다고 하면 “5분을 넘기면 안된다”라고 미리 엄포를 놓는다. 이러다가는 시조의 맥을 잇기 어렵다. 전공자 수도 적을 뿐더러 일반인들의 이해도 부족하여 어쩌면 머지않아 정가의 혼이 단절될 위기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든다. 요즘은 이리저리 참 생각이 많다. 앞으로도 숙명처럼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가락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할 것 같다. 우리 소리가 영원히 대중 속에 뿌리내려질 수 있도록.

 

# 에필로그

내 인생을 가만히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다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제 보다는 오늘이, 오늘 보다는 또 내일이, 내일보다는 또 그 다음이 행복하고... 그렇게 나는 지금 사다리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밟아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워낙 불행했던 내 지난날의 사슬, 그것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새롭게 치유되기를 바라며 작년에 담은 개복숭아 차를 뜨거운 물에 넣어 마셨다. 달콤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다 심장에 닿아 움찔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커피를 마실걸 그랬다.

 

▲ 안종미 단장과 최민주 양

 

【미니인터뷰】안종미 선생, 시조 후계자 최민주

예천초등학교 2학년 1반 최민주 양을 만났다. 안종미 선생의 시조 후계자이다. 안종미 단장은 “2018년 민주가 전국민요경창대회 학생부(초·중·고)에서 2등을 했다. 1등은 대학입시를 목적으로 공부했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고, 2등이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민주였다”며 “우리 소리를 사랑하는 꿈나무가 이곳 서산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뿌듯하다. 많이 응원해주고 지켜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Q. 민주의 태몽은?

(민주 어머니) 호랑이 꿈을 꿨다. 집채만한 호랑이 세 마리가 내 품에 안기더라. 알고 봤더니 호랑이는 그릇에 비유된다고 했다. 아마 크게 될 인물인 것 같다(웃음).

 

Q. 어린 나이에 전통소리를 하게 된 계기는?

(민주 어머니) 사촌언니가 한국무용을 한다. 어릴 때부터 민주 손을 잡고 공연장에 갔다. 아이가 유난히 가야금을 좋아했고 특히 우리 소리를 좋아하더라. 민주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했다.

 

Q. 아이가 포기하고 싶다고 할 때는 없었나?

(민주 어머니) 아직은 없다. 너무 좋아한다. 때로 학업을 게을리 할 때 “(소리)학원 안 보낸다”고 말하면 민주는 통곡을 하면서 “다른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 그러니 소리는 꼭 가야된다”고 하더라.

 

Q. 무엇을 배우고 있나?

(최민주 학생) 민요, 시조, 선소리산타령 세 가지를 배우고 있다. 그중에서도 민요를 하면 기분이 나쁘던 것도 금방 좋아진다. 그래서 존경하는 사람도 우리 (안종미)단장님이다.

 

Q, 뿌듯할 때는?

(최민주 학생) 친구들 앞에서 소리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지난번 학교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부터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태평가를 따라 부르더라.

 

Q. 앞으로의 꿈은?

(최민주 학생) 민요, 시조, 선소리산타령을 열심히 배워서 세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래서 지금 영어공부와 중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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