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동 독립운동가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조선민족대동단 조직책 ‘한기동(韓基東) 독립운동가’

손자 한순기 수석1통장은 그 뜻을 기려 매일 봉사하며 산다

 

독립선언서라고 하면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독립선언은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다.

3.1운동에 앞서 1918년 2월 1일 만주 길림(吉林)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에 의한 ‘무오독립선언’이 있었고, 뒤이어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3.1운동 이후 설립된 항일 지하조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1919년 11월 28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가 있다.

대동단은 전협(全協)을 단장으로 하여 출판 담당에 최익환(崔益煥), 조직 동원에 한기동(韓基東)과 권태석(權泰錫), 이념 정립에 정남용(鄭南用), 자금 동원에는 부채표활명수를 만들어 거금을 모은 동화약방 사장 민강(閔橿), 기독교 대표에 전필순(全弼淳), 불교계 대표에 동창률(董昌律) 등의 대표들이 주동이 되어 총재로 전 농상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을 추대함으로써 조직을 완비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동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당시 조직을 담당한 한기동(韓基東) 독립운동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지자주

 

▲ 대한문 앞 3.1운동 모습

 

“비폭력주의로는 독립은 요원하다”

민족주의 비밀결사 조직 ‘대동단 탄생’

 

역사는 늘 격동이었다고는 하지만 1919년의 절박한 상황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망국 10년이 되는 그 무렵의 민족의식은 분노와 절망의 이중주였다. 국내외 민족주의 세력의 성숙과 연계, 서구에서의 반식민지주의의 풍미, 그리고 러시아혁명이 보여준 소수민족의 보호 정책에 힘입어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3.1운동의 거족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은 요원했다. 이에 일부 민족주의 세력들이 지난날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조직을 통해 민족운동을 다시 전개하겠다는 의지로 항일투쟁 조직 결성에 나섰다. 그중 대동단은 가장 규모가 큰 비밀조직으로 3․1운동의 지도세력이 전략적으로 대중의 역량을 투쟁화 하는데 실패했고, 당시에 유행하던 비폭력주의는 독립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반성 속에 탄생했다.

비밀결사인 대동단은 황족(皇族)·진신단(縉紳團)·유림단(儒林團)·종교단(宗敎團)·교육단(敎育團)·청년단(靑年團)·군인단(軍人團)·상인단(商人團)·노동단(勞動團)·부인단(婦人團)·지방구역 등의 11개 지단(支團)으로 구성되었다.

종교단 총대(總代)에는 정남용, 유림단 총대에는 이기연(李起淵)과 이내수(李來修), 상인단 총대에는 양정(楊楨), 청년단 총대에는 나창헌, 군인단 총대에는 유경근(劉景根), 노인단 총대에는 김상열, 부인단 총대에는 이신애를 선출했다.

이 무렵의 활동은 주로 지하 문서의 배포를 통한 독립 사상의 고취였는데 1919년 10월 7일에 최익환, 이능우(李能雨), 권태석, 권헌복(權憲復), 박형남(朴馨南), 이건호(李建浩), 김용의(金溶儀), 황란(黃鑾) 등이 체포됨으로써 조직에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이에 전협 등의 대동단 수뇌부는 1919년 10월 초순경 조직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義親王) 이강 공(李堈 公)의 상해 망명을 추진했다.

 

▲ 의친왕 망명미수사건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기사

 

의친왕(義親王) 이강 상해망명 ‘실패’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대동단 ‘와해’

 

1919년 10월부터 항일 지하조직 단체인 대동단은 임시정부에 큰 힘을 실어줄 인사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다름 아닌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었다.

의친왕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로서 황위 계승 서열상 순종의 다음 차례였다. 의친왕의 망명은 대한제국의 계승을 표방한 임시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하였다.

의친왕은 망명을 결심하고 임시정부에 친서를 보냈다.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다.

11월 10일 오후 5시경, 대동단 조직책인 한기동외 두 사람은 의친왕을 모시고 수색역에서 신의주로 출발했다. 당시 한기동은 의친왕의 출발상황을 대동단 단장 전협에게 알리기 위하여 개성역에서 내렸다. 대동단원인 정남용과 이을규가 의친왕을 모시고 12일 오전 11시에 무사히 단동역에 정차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경이 수배령을 내리는 바람에 단동에서 의친왕과 정남용은 일제의 검문에 결국 체포가 되고, 극적으로 피신한 이을규만 단동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으로 피신하였다. 그가 임시정부에 의친왕의 밀서를 전달하게 된다.

결국 단동역에서 일제에 의하여 체포된 의친왕은 서울로 호송된 이후 당시 조선총독 관저안에 있는 녹천정(綠泉亭)에서 50여일 연금이 된 이후에 다시 처소인 사동궁으로 돌아오게 되며, 여기서도 일제로 부터 더욱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대동단, 제2독립선언서 발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와해’ 운명

 

의친왕 망명 사건의 실패로 말미암아 전협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된 이후 대동단에는 비통과 적막만이 감돌았다. 분노와 회한이 엇가리는 가운데 남은 단원들은 자신들의 투쟁 과업이 중단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이에 따라서 탈출에 성공한 나창헌과 이신애, 정규식(鄭奎植), 박원식(朴源植), 안교일(安敎一), 정희종(鄭喜鍾), 이정찬(李貞燦) 등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만세 운동을 논의했다.

이미 1919년 10월 중에 상해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이 서울로 들어와 한편으로는 송세호(宋世浩), 윤종석(尹鍾錫), 나창헌 등과 함께 연통제(聯通制)의 조직에 주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에 있는 각종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 단체와 협동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가운데 정남용․전협․양정․한기동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다. 이에 체포망을 벗어난 나창헌은 이신애, 정규식 등과 협의하여 11월 25일 경 경성부내에서 등사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유민임을 천하만국에 선언할 것을 계획하고 11월 28일 오후 4시 반경에 안국동 광장에 깃발을 흔들며 앞장 서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각 신문사에 만세운동 사실을 통고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투옥에 대비하여 흰 솜두루마기를 입고 남바위를 쓰고 있었다. 약속된 오후 5시가 되자 정규식이 먼저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백기를 펼쳐 들고 만세를 선창하자 이신애와 박정선 등도 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대동단원들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한기동, 경성지방법원 3년 선고 받아

 

종로경찰서에 수감된 대동단원들은 고등계 형사 김원보(金源甫)의 취조를 받았다. 1920년 2월 2일부터 6월 28일까지 지루한 예심이 진행되었다. 예심은 주로 경성지방법원의 나가시마 유조(永島雄藏) 판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러는 가운데 1920년 3월 1일이 되었다. 이 당시 유관순(柳寬順)과 같은 동(棟)에 수감되어 있던 이신애와 박정선 등은 독립 만세 1주년을 옥중에서 맞이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미와 경부로부터 더욱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신애는 이로 말미암아 고막과 유방 파열의 고통을 받았으며, 나체로 신문을 받았다. 한기동, 이신애 등 대부분 대동단원들은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출판법 상 불온문서 반포죄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안녕 질서를 방해한 정치범죄처벌령(政治犯罪處罰令) 및 조선형사령에 따라 징역 4년 구형, 3년 선고를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대동단원들은 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전협이나 최익환과 같은 식자들은 형무소 안의 인쇄소에서 문선(文選)과 교정(校正)으로 수형 생활을 했으며, 박정선이나 이신애와 같은 여성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 생활과 완구 제조에 종사하면서 형기를 보냈다. 정남용은 옥사했다.

수형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메주에 가까운 콩밥은 이미 각오한 바이요 또한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20평 남짓한 감방에 90명씩 수용된 시설은 견디기 어려웠다. 더구나 별도의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감방 내에 6~7개의 변기를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방안의 악취로 코피를 쏟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신애는 2년 이상의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6월 1일에 가출옥했다. 그는 명천 3·1운동의 주역으로 순국한 동풍신(董豊信, 1991년 애국장)과 더불어 관북을 대표하는 여성독립운동가였다.

그 뒤의 행적에 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신애는 충남 공주읍 옥룡동에 거주하면서 한국부인회(韓國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47년부터 11년간 부녀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말년의 생활은 간고(艱苦)했다. 정부에서 마련해 준 대전시 문화동 집에서 남편 문홍범(文洪範)과 함께 병고를 치르며 1982년에 일생을 마쳤다.

 

한기동, 6.25전쟁 피난길 서산에 정착

아들 한종우·한 명, 손자 한형기·한순기 숭고한 뜻 이어가

 

1898년 3월 평남 평양에서 출생,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바친 한기동 독립운동가는 6.25를 맞아 피난길에 충남 서산으로 내려와 살다가 1997년 7월 향년 99세로 돌아가셨다.

현재 한기동 유공자 자손으로는 둘째 아들 한종우(91세), 셋째 한 명(78세), 그리고 손자 한형기(75세), 한순기 씨(72세)로 한순기 수석1통장은 돌아가신 조부님 집에서 마을 일을 보며 살고 있다.

한순기 통장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대해 말씀은 많이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3.1절 날이면 시(당시 서산군)에서 할아버지를 모셔가 행사를 치른 일들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피는 못 속이는 걸까. 한 통장도 이웃을 위한 봉사가 몸에 배어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동네 한 바퀴 돌며, 혼자살고 늙어 거동 못하는 집의 살림도구를 고쳐주고 동사무소로 향한다. 늘상 집에 일은 뒷전이다. 사모님의 잔소리도 못 들은 척 하는 한순기 통장의 가슴 속 깊이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랑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한편, 한기동 독립유공자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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