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식인 동치미 맛

 

▲ 김기숙 수필가. 수석동

겨울이오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동치미는 올 해도 어김없이 터주 대감이되어 응달진 광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릇 점에 가면 잘 생긴 그릇이 눈길을 끈다. 그래도 난 옛것이 좋아 옛것만 고집하는 고집불통 주부다. 김치를 담는 그릇 중에 옛날 항아리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으랴. 항상 시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거칠거칠한 김칫독 몇 개가 아직도 남아있어 사용하고 있다.

요즘 배추김치보다 집집마다 동치미가 인기다. 두 셋만 모여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동치미에 대한 평가다. 인정이 할머니는 동치미를 잘 담아서 내년에 몇 집 담아주기로 했다고 은근 슬쩍 자랑을 한다.

항아리 속에는 쪽파, 생강, 청고추, 무, 소금을 약간 넣은 싱거운 물이 만나 한 가족을 이뤄 옹기종기 모여 지낸다. 동치미가 익으면 냉면을 삶아 국물에 부어먹는 것도 겨울철 별미다. 어릴 적 고향에서도 겨울 동치미는 인기였다. 초가지붕에 왕골자리를 깐 방바닥이 식어 갈 즈음이면 밤은 깊어 입이 출출 했다. 친구들과 라디오를 켜놓고 노래가 나오면 되돌리기 하면서 적기도 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동창이자 친구로 몇 수십 년을 이어지고 있는 친구들 여섯 명과 아직도 잘 지내고 있다. 그 친구들은 다들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두더지처럼 평생 땅만 파는 나를 부러워한다. 자급자족해서 내 맘대로 해먹는 음식이 부럽단다.

도시에선 자연식인 항아리에 담아먹는 동치미는 아예 생각지도 못한다고 친구들은 말한다. 나는 항아리 김치를 담아 자연으로 익혀 먹으니 맛도 옛날 맛 그대로다. 눈 내린 밤 오도 가도 못하고 어른들 주무시면 동치미를 꺼내어 숟가락 달그락 거리면서 먹던 동치미 맛을 잊지 못하겠단다. 조용히 먹으려고 하면 웃음이 더 나오고 양푼에 맞닥뜨리는 숟가락 소리는 좁은 방을 넘어 결국 친구 아버지가 깨어 나셔 떠들지 말라고 하셨지만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한 달간의 항아리 속에서 삶을 포기하고 녹초가 된 파와 고추, 무의 변신. 동치미의 뽀얀 모습이 경이롭기만 하다. 가을무로 담아 겨울에만 참 맛을 느끼는 동치미는 담기도 수월하고 비싸지도 않아 누구에게나 부담이 안가는 시원한 음식이다.

가끔씩 이웃과 아니면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격식 갖추지 않고 찐 고구마와 양푼에 동치미 쭉쭉 쪼개어 놓고 한쪽씩 먹는다. 양푼에다 먹는 것은 멋도 아니요 그릇이 없어서가 아니다. 국물과 함께 많이 담아야 여럿이 먹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 사람 앞에 한 그릇씩 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닥다닥 붙어살던 집들은 폐허로 변하고 어른들도 연세가 많아 돌아가셨으니 이웃이라고 해도 이젠 몇 분이 안 된다. 어른들은 회관에서 앉아서 하는 건강체조라도 하신다고 유모차에 의지하여 일렬로 가신다. 사랑방이 없어지고 이웃으로 자주 가던 마실 도 줄어든다.

어느 날인가 우연찮게 어른들 몇 분이 오셨다. 동치미를 맛보러 오셨단다. 나는 좋아라고 동치미를 일부러 큼직하게 썰어 양푼에다 사람 숫자대로 숟가락만 띄워서 드렸다. 밥을 한다고 하니까 동치미만 먹으면 된다고 하신다. 한사코 말리는 어른들을 뒤로 하고 냉장고를 뒤져보니까 무시루떡 서너 쪽이 보인다. 동치미와 떡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동치미 평가를 시작한다.

“어쩌면 그렇게 동치미 간을 잘 했냐”고 하시면서 동치미로 배를 채웠다고 너스레를 떤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자 저녁이 늦어진다고 발길을 재촉하시면서 돌아가시는 등엔 석양이 동무 한다. 어르신들의 연세가 서산에지는 석양과 같아 맘이 짠하다.

“건강하게 지내시다, 내년에도 동치미 맛보러 오셔요.” 등 뒤로 꼭 오시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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