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면 안 되잖아요. 용기를 줘야 되잖아요”
“모든 분들에게 기쁨이 되고자 슬픔은 잠시 감추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거든요”
어린시절, 아버지 말씀 “주고나면 더 많은 것을 받는다”
그해 겨울, 그녀는 아버지에게 “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1등을 하기 보다는 착한 사람이 되어라. 내 자식만큼은 콩 한쪽도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날 밤, 주고나면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어린 한선미에겐 너무도 낯선 말이었다.
날이 밝아 어머니에게 물었다. “주고나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더 받을 수 있어요?” 느닷없이 나온 어린 딸의 말에 “각자 달란트대로 살다가 여건이 허락되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 재능을 베풀면 되는 거란다”는 말을 듣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노래를 잘 하니까 힘든 사람들에게 노래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겠다. 그치요?”
어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는 봄볕보다 더 따스한 눈길을 그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이의 마음에 심은 사랑은 더 크게 자라는 법입니다.”
그의 말에 누구보다 노래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 남자만의 별이 되었다.
“평생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이웃을 위해 살고 싶어요. 그러니 제게 결혼은 그다지 의미가 없네요. 제가 결혼을 하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되잖아요. 죄송합니다.”
증조할머니 손에 자란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고민 고민 끝에 거절을 했던 한 단장. 그 순간, 숫기없던 남자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 사이 그녀는 최근까지의 그와 함께한 추억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에 펼쳐진 걸 보고 갈등에 휩싸였다.
“그냥 저와 살아주면 됩니다. 지금처럼 노래하고 봉사해도 좋으니 그냥 제 옆에 있어주면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녀의 사소해 보이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커다란 마음으로 다가와 준 한 남자. 드디어 그와 백년해로를 약속한 날은 하늘에서 내려온 밝은 햇살과 그의 커다란 웃음이 하나가 되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서산시 인지면 작은 시골로 시집 와 시할머니를 모셨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참으로 즐거웠다. 시할머니와 함께 외출이라도 하면 다들 친정어머니와 다니는 줄 알고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 딸인가 봐요? 보기 좋아요.” 그럴 때마다 양손에 잡힌 그녀와 그녀의 맏딸 혜임이의 손은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행복해지곤 했다.
한선미 단장은 말한다. “시할머니가 제 노래를 참 좋아하셨어요. 제가 노래라도 하는 날이면 ‘제 손자며느리요~’라며 좋아했죠.” 그런데 그녀는 “경쟁자가 또 한명 있어요”라고 했다. 현재 다양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28살 딸 혜임이(예명 혜이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리 집안에 이런 사람 없는데 누굴 닮아 우리 혜임이는 뭐든 잘해? 엄마랑은 전혀 다른데?” 어릴 때부터 엄마바라기였던 딸 혜임이는 그때마다 “엄마 닮았어!”라며 제 방으로 뛰어가 침대에 엎드려 울곤 했다. 그럴 때는 긴 기도로 마음을 씻었다는 그녀.
“날 닮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시각장애인인 이 엄말 닮았으면 어쩔 뻔 했어.”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바닥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내일아침 눈을 뜨면 광명을 찾게 해주소서. 제 고통은 우리 대에서 그만 마치게 해 주소서”
그녀는 시각장애인이다.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상태며, 그나마 남은 왼쪽 눈도 정상은 아니다. 혹시라도 자녀들이 닮으면 어쩌나 그 생각을 하는 날이면 긴 밤을 꼬박 새운다.
한 단장의 외할머니는 소위 말하는 맹인(盲人)이다. 그 대물림이 2대인 그녀에게 나타나 한동안 식구들을 힘들게 했다. 학교에서 수업 중에 해야 하는 필기는 친구들이 대신 해주었고, 숙제는 형제들이 돌아가며 맡았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늘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의 가족들. 이런 그녀에게 모르는 사람들은 수술을 권한다. “퇴행성에다 각막 두께가 워낙 얇아 수술불가 판정을 받았어요. 그냥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으면 좋겠어요”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 머리위로 히터 바람이 지나가며 벽에 부딪쳐 떨어진다.
한 단장에게 시각장애는 또 다른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건강한 사람의 눈에 비친 그녀의 인생은 어쩌면 안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힘든 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함께 하라”는 신의 메시지 같아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집에서는 주로 아주 두껍고 무거운 안경을 껴요. 그러다 보니 지난여름 무더위에는 코 옆에 상처가 나서 진물이 흐르더군요.” 흉터를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 그녀 앞에서 기자는 그만 울컥 눈물이 나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내렸다.
오늘같은 만남을 위해서는 꼭 특수렌즈를 끼고 나온다는 그녀. 맑게 웃는 모습이 눈부셔 기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에 렌즈를 끼면 일 마치는 저녁에 빼요. 렌즈는 빼고 나면 시원하지만 문제는 잘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럴 땐 남편과 아이들이 제 눈을 대신해 손발이 되어줍니다. 높은 계단에서는 남편이 안아주고, 보도블록에서는 아이들이 손 잡아주고 가방 들어주죠. 우리 식구들의 배려에 늘 감사해합니다.”
이처럼 아픈 말을 하는데 화사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저 마음속에는 얼마만큼의 고름이 쌓여 그녀를 짓누를까. “특수 안경을 끼고 다녀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기자가 묻자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제가 끼는 안경은 대한민국에 없는 아주 특별한 안경이라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일반 안경의 7배정도 무게입니다. 제 직업은 늘 누군가를 만나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끼고 나가면 보는 사람이 어지러워 안돼요. 때문에 집안에서만 착용합니다.”
이런 그녀를 위해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다는 시할머니.
“그만하면 됐다. 우리 손자며느리 참 애썼다”라며 두 손을 꼭 잡아주셨던 그리운 분.
치매를 앓으면서도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돌아올 때면 “저승에서도 환하게 볼 수 있도록 내 기도해 주마”라고 다독여주셨던 시할머니. 기자가 면허증이 있냐고 묻자 그녀는 코를 한 번 찡그리며 “저는 딸 수 없는 몸입니다. 몸이 1,000냥이면 눈이 900냥이예요. 그런데 그 900냥에 문제가 있으니 당연히 안 되죠”라고 했다. 더 안타까운 건 눈이 그렇다 보니 마음의 고향이었던 시할머니를 자신의 두 눈에 가득 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제 곁에 없더라도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도록 정말 오래오래 담고 싶었는데......”
서산시 인지면으로 시집오면서 시할머니를 모셨고, 거동이 불편하신 뒤로 요양병원에 모셔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공연으로 재롱을 떨었다는 한 단장.
“제가 왜 시각장애인협회에 가입이 되었고, 충남지체장애인협회에 소속되었는지 이제 이해되시죠? 무엇보다 제가 그 아픔을 더 잘 알기에 함께 세상을 멋지게 살아내고 싶은 거예요. 웃음을 주고 행복도 주며 말이죠. 그래서 더 아름다운 세상임을 노래로 보여주고 싶어요. 이것은 무엇보다 제 상처를 보듬는 일이기도 하구요.”
“지난번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공연도중 ‘내일 눈 뜰 때는 부디 환한 광명이 비쳐지게 해달라고 오늘 밤 기도합시다’라고 했더니, 앞자리에 계신 분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함께 울었습니다. 그건 사실 제 얘기거든요. 앞으로도 그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때론 저조차도 ‘왜 나만 이래야 되나’라고 울부짖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죠. 왜? 남들 앞에서는 늘 웃어야 되는 한 단장이잖아요(웃음). 슬프면 안 되잖아요. 용기를 줘야 되잖아요. 무엇보다 빛과 소금이 되고자했던 제가 먼저 주저앉으면 안 되잖아요.”
“제 삶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봉사 할 생각이에요. 소외되고 아픔 속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기쁨이 되고자 슬픔은 잠시 감추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거든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시할머니가 입원해 계시던 요양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했어요. 그곳에 가보면 어려웠던 그 시절 자식 뒷바라지 시키랴, 가부장적 남편 시중들랴, 시부모님 모시랴, 살아도 어째 그렇게 힘들게 사셨는지... 보면 정말 짠해요. 어떤 분들은 무거운 걸 얼마나 들었는지 허리 굽어진 분들이 너무 많아 가슴이 아파요. 그런 분들이 제가 공연을 하면 그렇게들 즐거워하셔요. 하물며 평소 한 쪽 들기도 힘겨워하던 팔도 척척 들어 올리며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웃지도 않던 분들이 입을 벌리며 웃는 모습도 보이구요. 또 때론 보행보조지팡이에 의지하던 분이 편찮으신 걸 잊으시고 춤을 추신 적도 있어요. 그럴 땐 찡하면서 울컥 눈물이 앞을 가리죠. 그러다 화장이 지워지면 환자복 소매를 들어 닦아주시기도 하고, 꼭 안아주시며 등을 토닥여주시기도 하고요. 얼마나 좋으면 뽀뽀세례까지 할까요. 대한민국에 새파란 연지곤지 찍는 사람 있음 나와보라 그러세요(웃음). 그분들은 감각이 없다보니 너무 세게 뽀뽀를 해서 제 양 볼에 간혹 피멍이 들 때도 있답니다. 이 또한 제겐 기쁨 아니겠어요.”
“독거노인, 소외계층, 마을회관 등 안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지난번에는 휠체어에 앉아계신 어르신이 제 노래를 들으며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기적을 보인 적도 있어요. 어떤 분은 단 한 번도 온 적 없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다 저를 보시곤 ‘내 자식보다 낫다. 이제부터 내 딸 하자’라고 하시기에 ‘그러시죠 어머니’라며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했답니다. 아마도 서산에서 ‘부모님이 가장 많은 사람 있음 나와보라’고 말하면 저를 따를 자가 없을 걸요(웃음). 이 모든 것들이 제겐 살아가는 의미면서 동시에 제 상처의 치유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서산시대에 바라는 말이 있다며 활짝 핀 미소를 던졌다. “우리 서산시에는 봉사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제일 먼저 언론사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셨으면 해요. 특히 가슴 아프거나 힘든 사람들이 더불어 웃을 수 있도록 일선에서 다독이는 역할 같은 거요. 그러면 봉사하는 저희도 신명나게 일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우리 함께 손잡고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운명은 맘대로 바꿀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운명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녀에겐 무엇보다 ‘노래라는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한 단장을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장애는 그녀에게 넘어설 대상일뿐 길을 막지 못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에게 그녀의 노래가 날개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인터뷰가 끝나고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하얀 꽃 로즈베리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