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권동주 찜기공예 작가

최미향 기자l승인2018.11.22l수정2018.11.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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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주 찜기공예 작가

 

올 초 한국미술공모전 우수상...“세상에는 꿈을 꾸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해미에 전시관 만들 계획...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나의 꿈’

 

<대문을 열며>

아침을 여는 사람들. 그들을 맞기 위해 터미널 현대슈퍼 채반선생 권동주(59) 찜기공예 작가를 만났다. “새벽 장사는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그러다 늦은 아침이 되면 집사람과 교대를 하고 저는 집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죠. 그 참에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구요. 그래야 오후 근무를 또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작업장이 바로 우리 집 거실 한 켠이란 게 문제가 됩니다.

때론 지난주 고물상에서 득템한 찜기가 눈에 밟히기도 하고, 철 수세미 풀어 논 것도, 솜뭉치 헤집어 놓은 것도 고스란히 눈에 보이니 잠이 쉬 오겠습니까. 왜 있잖아요. 멋진 옷 보고 오면 여자 분들은 천정에 옷이 계속 보인다면서요. 제가 그래요. 자꾸 구해다 놓은 재료들이 막 눈에 아른거리는 거예요.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어떨 땐 에라 모르겠다 하곤 잠자는 걸 포기해요”라며 멋쩍게 싱긋 웃었다.

사실, 슈퍼에서 인터뷰하기에는 너무 분잡했고 또 인근 찻집의 음악소리가 너무 커 도저히 불가능 했다. 그러다 결국 옮긴 곳이 작업장이 있는 권 작가의 집. 참 잘 온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거실에 모여 있는 휘황찬란한 작품들이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기자의 모든 신경들이 작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발견한 권 작가는 어느새 환한 얼굴이 되어 연신 작품 설명에 침이 마른다. “이번에는 TV 진품명품을 보고 매화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매화 줄기는 여전히 찜기이고 고정판은 양철로 된 쟁반 이예요. 저는 매사 물건을 보면 못 지나쳐요. 사실 작품을 구상하면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바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야 그 작품과 어울릴까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제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을 대충 흘러 보내기가 안돼요. 이번 매화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물상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는데 저 놈이 제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아주 잘 됐죠. 꽃잎은 플라스틱 음료병이예요. 청소하시는 분이 가져다 줬는데 세제로 씻고 말리고 아주 정성을 들였더니 제품 재료로 손색이 없어요.” 이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Q. 7남매중 막내라고 알고 있다. 누구를 닮아 손재주가 뛰어난가?

(권) 경기도 이천에서 구멍가게를 하시는 부모님 사이에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래도 좀 살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저희 집은 어떤 연유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가세가 기울어 결국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생활용품들을 손으로 직접 짜서 파시는 아버지의 재주로는 대 식구를 건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즐겁게 일을 하셨죠. “어제는 건너 집에서 돗자리를 주문했네. 내일부터는 좀 바빠지겠어.” 아버지는 돈이 된다는 것은 뭐든지 만들어 팔았습니다. 싸리나무로 만드는 물건들부터 짚으로 만드는 것까지 닥치는 대로 아버지의 손을 거치면 어느새 백화점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멋진 작품들로 새롭게 탄생되었지요. “와 아버지 너무 잘 만들었어요. 멋져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시며 또 다른 집 주문에 맞춰 작업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보였지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형제들은 재주 많은 아버지 피를 닮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 저처럼 만들기에 취미를 붙인 식구들도 있습니다. “우리 동주는 손이 야무져서 뭘 맡겨도 척척 해낸다니까.” 부모님의 칭찬에 어린 저는 괜히 굴러다니는 것들을 주워 모아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만들 때는 혼을 빼고 몰두하기에 힘들지 않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사는 것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해서 뭘 해. 이렇게 가진 것도 없는데...’ 자꾸 시큰둥해져서 학교 간다고 나와서는 뒷동산에 올라 가 시간을 때우곤 했습니다. 그러다 들키는 날에는 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났지요. 아버진 평상시에는 막내인 저를 귀여워 하셨지만 결석을 한 것을 아시는 날에는 정말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럴수록 배워야지.”

낮 동안 남의 집에서 일하시고 오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이 드실 때에는 자면서도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막내라고 항상 끼고 자는 아버지 옆에서 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흘렸지요.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빨리 돈 벌어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자식과 같은 작품 앞에서

 

Q.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귀금속 공장에 취직했다는데 그때 심경은 어땠나?

(권) 철이 없던 어린 나이에도 집에서 벗어나 빨리 경제력을 손에 쥐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차곡차곡 모아 서울로 탈출을 계획했지요. 하루 이틀 한 달, 드디어 제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사촌매형이 “너 솜씨 정도면 뭘 해도 잘 할 거야. 혹시 귀금속 해보지 않겠니?” 그 말이 얼마나 솔깃했던지 드디어 제 고향 이천을 뒤로 할 날이 온 것 같아 쾌재를 불렀습니다. “저 서울로 돈 벌러 떠나겠습니다.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꼭!” 힘들더라도 반드시 공부는 마쳐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에 “고등학교 과정을 절반정도 배웠으니 우리 형편에 많이 배운 거지요”라며 한사코 사회에 나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속상한 어머니는 밤새 눈시울을 적셨고, 저는 그런 부모님을 설득하여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정 힘들면 다시 돌아와라. 잠시 사회 경험만 한다 생각하고 말이야.” 고개를 끄떡이며 돌아서는데 발길이 자꾸 흔들리는 겁니다. ‘그냥 돌아서서 찢어버릴까? 다시없던 걸로 할까?’ 하지만 한편으론 ‘빨리 서울에 입성하여 귀금속공장에 취직해야지’하는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그곳에만 가면 내가 만들고 싶은 것들을 원 없이 만들겠지. 고생하시는 우리 부모님 금반지부터 만들어서 보내줘야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돈까지 벌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내 힘으로 선물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기쁜지요.

 

Q. 당시 직장 상사가 전국기능공대회 출전을 독려했다는데 출전은 했나?

(권) 하지만 처음 올라간 귀금속 공장에서 저에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때 빼고 광내는 보조일이 전부였습니다. 어디 감히 초보자에게 그 비싼 금·은을 쥐어주겠습니까. 6개월 동안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제품 광내기 작업만 죽도록 했습니다. 하루빨리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작품은 커녕 문지르는 일만 하다 보니 얼마나 깝깝하던지.

점심시간 선배들 모르게 틈틈이 은을 사다 링반지를 만들어 부모님께 보냈습니다. 학업을 포기하고 취직한 막내아들이 몰래몰래 만들어 준 반지를 보며 부모님은 많이도 가슴아파했습니다.

어느 날 그날도 몰래 반지를 만들고 있는데 그만 과장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엄청 혼 날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전국 기능공대회에 나가보는 것은 어떤가? 너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든지 연신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그래, 나도 기능공대회에서 1등만 하면 다시 공부할 수도 있을지 몰라.’ 그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분주해 지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잠자는 것도 사치였지요. 등수 안에 들기 위해 밤을 낮 삼아 맹연습에 돌입했습니다. 아침이면 누렇게 뜬 얼굴을 들고 작업장에 나타나 또다시 긴 하품을 할 새도 없이 또 작업에 몰두했고 저녁이면 혼자서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 최근 작업중인 매화 작품

 

Q. 귀금속 공장을 나와 의류도매시장에 취직을 했는데 왜 그랬나?

(권) 그러기를 몇 달, 형님에게서 문득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옷가게를 하자. 형들이 둘 다 옷가게를 하는데 너도 편승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우선은 평화시장에 가서 좀 배우고 우리 가게로 와라. 식구들끼리는 뭉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이젠 너도 장가도 가야하고 돈도 벌어야하니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그 짓만 하고 있겠느냐.’ 저는 정말이지 금속을 가지고 조물조물 뭔가를 만드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형님들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내용의 편지가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전화나 휴대폰이 발달 되지 않은 때라 거의 매일이다시피 형님들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형님들의 성화는 끝이 없었어요. 더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평화시장 의류도매상에 취직을 했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요. 저는 무엇보다 만드는 것에 취미가 있다 보니 처음에는 영 어색해서 매일 도망갈 생각만 꿈꾸었습니다. 학교 선생님 그리고 부모님께 큰소리치며 올라왔는데 겨우 하고 있다는 것이 의류도매상에서 옷이나 팔고 있다 생각하니 한동안 스스로에게 회의도 들곤 했지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이 또한 제가 선택한 길이었는데...

 

Q. 언제부터 터미널에서 슈퍼를 하게 되었나?

(권) 지금 가만 생각하면 신의 계시가 형님들 손을 빌어 저에게 내렸던 것 같아요.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면서 제 생활도 안정권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위의 사물들이, 사람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데요. 특히 평화시장 의류도매상 제 직장 바로 앞 도매상의 아가씨가 자꾸 제 신경을 건드리는 겁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순하게 생긴 아가씨, 괜히 마음이 푸근하고 살림도 잘 할 것 같은 그런 아가씨였습니다. 월급을 타면 그녀에게 치킨과 맥주를 사주면서 “다음에 월급타면 저한테도 사줘야한다”는 숙제를 은연중에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정이 들었고 당진이 고향이었던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집사람이 그러대요. “여보, 우리 서울에 있지 말고 서산으로 내려가서 슈퍼를 하자. 구멍가게 하면 먹고는 살 것 같아.” 그런데 옷 장사 하는 사람이 백 원짜리 심지어는 십 원짜리 코흘리개 돈이 눈에 차겠습니까? 도저히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절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나”고 했습니다. “남 이목 생각 말고 해보자. 정 안되면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문만 열어 달라”고 하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터미널에서 슈퍼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언제부터 취미생활을 할 생각을 했나?

(권) 막상 슈퍼를 시작하니 요구르트 한 병도 마음대로 마시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수중에 돈은 없고 아이들은 키워야 되고.... 배가 고파도 빵 하나, 우유 하나도 눈으로만 쫓지 덥석 먹지를 못했습니다. ‘에잇 하나만 먹어버릴까?’ 하다가도 ‘아니야. 집사람도 못 먹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먹어’라고 생각되면 잡았다가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서 시작된 터미널 안에서의 슈퍼 생활이 어느새 22년째를 훌쩍 넘겼네요. 세월이 이렇게나 빠르게 지나갑니다(웃음).

아내와 맞교대로 슈퍼를 하면서 두 아이들을 공부시켰고, 풍족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는 정도의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장사가 몸에 익다보니 자꾸 허전한 생각이 스멀스멀 가슴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겁니다. 지나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도 ‘저들은 저렇게 바삐 움직이는데 난 뭣하고 있나’는 생각이 들어요. 다들 행복한 듯 보였고, 다들 시간에 쫓기는 듯 하루하루를 잘 보내고 있는데 나만 동떨어져있는 듯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날도 심란한 마음을 안고 친구 고물상에 들렀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물건들이 쭉 쌓여있는 곳으로 자꾸 눈길이 가대요. 그때 제 눈에 물건 하나가 들어오는데 그것을 본 순간, 눈에서 불빛이 번쩍하고 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늘 주방에서 쓰고 있는 만두나 떡 등을 찌는 스테인리스 찜기였어요. “오우! 저것으로 작품을 만들어봐야겠다. 바로 저거야.”그날부터 세제로 깨끗이 닦고 분해하고 조립하고...

손에 상처가 나는 줄도 모르고 시간 날 때마다 책상에 앉아 몇날며칠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뚝딱뚝딱 꼬고 조이고 매고 감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했던 작품이 드디어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첫 작품 ‘잉어’에요. 지금 보면 정말 형편없는 작품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 첫 작품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자식입니다. 그 당시에도 하늘을 통째에 품에 안은 듯 벅찼거든요. 제 손으로, 그것도 폐품으로 만든 저의 작품이 마치 제가 낳은 자식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슈퍼장사를 하면서도 손으로 낳은 자식을 보고 싶어 어떻게 장사를 했는지도 모를 정도예요. 보고보고 또 봐도 마냥 신기하기만 했어요. 첫 작품을 완성하고 보니 못 할 것이 뭐있겠나 싶대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도전정신이 팍팍 드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지나는 손님들이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들고 가더라도 예사로 봐지지가 않아요. 모든 것들이 작품의 재료로 보이는 거죠. 이것도 직업병인가요?(웃음).

 

▲ 서산버드랜드에 기증한 새와 사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1

 

Q 주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권) 이곳 서산은 제가 사랑하고 우리 가족들이 제일 사랑하는 고향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고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제가 가장 잘 하는 찜기제품들로 말이죠. 그래서 시도된 것이 바로 꽃게와 대하 그리고 새들 이예요. 자분자분 소일거리로 서해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그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서산의 보고들이라며 신기해하더군요.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 가족들입니다.

한번은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이거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가게에 갖다 놓으면 어떨까? 장소가 협소하니 천정에 매달아 놓던가 아니면 매대 위에 놓아도 될 것 같은데?” 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우리 가족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그러자”고 하대요. 그래서 가게에 옮겨놓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작품들이 혹시라도 움직일 때 훼손이나 부서질까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지난번 서울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러대요. “작가님, 장소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서울에서 전시회 한번 하시지요?” 문제는 운반이 관건 이예요. 어디에 어떻게 무엇으로 움직여야 안전하게 별 탈 없이 가져갈지 그게 확답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포기를 했지요.

 

Q 혹시 꿈꾸는 것이 있나?

(권) 그러다보니 가까운 해미지역에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고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터만 사놓았지 여전히 공사는 못하고 있어요. 여건만 허락된다면 전시관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지난번 포항에서 펼쳐진 스틸축제에서 제가 한 부스를 맡아 작품을 선보였는데 반응들이 상당했어요. “어머나 어쩜 이런 작품을 다 만들어요? 정말 이게 찜기고 철수세미 맞아요? 와 이건 우리가 마시는 음료수 병이네요. 진짜 신기하다”라며 얼마나 좋아하던 지요.

우리 슈퍼에 오는 아이들도 그래요 “와 지난번 TV에 나온 아저씨다. 아저씨가 진짜 이거 다 만들었어요? 공룡도요? 여기 새는 천수만에 있는 새 맞아요?”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해미 축제와 함께 볼거리 제공을 위해 전시관을 꿈꾸고 있습니다.

 

Q 작품으로 많은 분들과 소통을 하던데?

(권) 꿈만 꾸고 있기에는 너무 먼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우선 몇 년 전 버드랜드에 제가 만든 작품들을 기증하기도 했어요. 어떤 손님들은 그곳에 갔다가 작품보고 왔다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슈퍼 투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저도 모르게 ‘참 잘했구나’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오는 분들도 있지만 너무 멀어서 보러오지 못하는 타 지역 거주자들은 일부러 전화를 해 오는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런 일이’ 방영이 되고 나니 하루에도 50여 통의 전화가 빗발치며 걸려오더군요. 장사가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정말 TV라는 매체가 대단하다는 감탄이 세어 나오더군요. 그러고 나서 ‘생생정보통’, ‘6시 내 고향’등에 출연을 하면서 아예 유명인사가 되었다니까요. 심지어는 아무 옷이나 입고 외출을 못할 정도입니다. 마음 놓고 나쁜 짓도 못하고요(웃음). 지난번에는 해외에서도 공중파를 봤다며 몇 십년 만에 친구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제 작품은 잃어버린 친구까지도 찾아주는 아주 이상한 힘을 가졌습니다(웃음).

 

▲ 서산버드랜드에 기증한 새와 사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2

 

Q 한국미술공모전에서 수상을 했다던데?

(권) 올 초에는 한국미술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물상을 이곳저곳 뒤지러 다녔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고물상 주인들이 간혹 이상하게 생각하며 힐끗힐끗 쳐다보는 때도 있어요. 제가 폐품으로 만든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들렀다. 이 물건 혹시 가지고 있나?”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줄 테니까 나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합디다. 그러면 하는 수 있나요. 하나 만들어 주고 재료 몇 개 얻고....

하지만 한국미술공모전에 출품하신 작가들이 워낙 쟁쟁하신 분들이 많다보니 수상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수로 수상자 안에 들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하나는 우수상 그리고 또 하나는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받는데 가슴에서 물소리가 나더군요. 그동안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데 남자라도 복받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가난하지만 손재주 좋은 고등학생이 학업을 포기하고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재주를 살려 철수세미와 찜기 그리고 폐품 하나하나를 모아 작품으로 만들어내고... 때로는 손이 찔려서 파상풍 주사를 맞으러 가기도 했고, 또 때로는 집사람에게 핀잔도 받으면서 꿋꿋하게 작품세계에 골몰했던 일, 그리고 결국 안 될 것 같았지만 도전하고 노력하다보니 이룩한 일들. 특히, 세상에는 꿈을 꾸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보통의 법칙도 깨달아 보고...

 

Q 서산시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권) 만약 작품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서 제 친구들을 보면 주로 혼자 외로움을 달래거나 TV에 매달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저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만 봤을 지도 모릅니다.

제가 찜기제품으로 작품을 만들면서 제 취미생활을 즐기니 많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추켜 세워주면서 부럽다고들 하세요. 그럴 때마다 저는 다시 사는 것 같은 희열을 느껴요. 찜기공예 제품을 만드는 것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셈이지요. 어제도 어떤 손님이 “늙지 않는 비결이 뭐예요?” 라고 묻는데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늙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요.

우리 서산 시대 독자여러분들도 한 가지쯤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해요. 그렇게만 된다면 늙을 일도 외로울 일도 없지 않겠지요. 특히 계절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적극 취미생활을 추천합니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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