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표은용 농촌중심지활성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최미향 기자l승인2018.11.07l수정2018.11.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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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는 곳에는 무조건 길이 있다”

표은용, 고향을 잘 다듬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나의 꿈’

 

▲ 표은용 농촌중심지활성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운산초 졸업

한림대학교 지역개발 대학원 최고지도자과정 수료

혜전대학교 사회교육원 최고지도자과정 수료

운산면 체육회장(전)

운산라이온스클럽 초대회장(전)

서산장학재단 운산지회장(전)

대철중학교 운영위원장(전)

운산면 주민자치위원장(전)

운산면 농촌중심지활성화추진위원회 위원장(현)

운산면 바르게살기위원회 위원장(현)

 

<인터뷰 들어가기 전>

농촌중심지활성화추진위원회 표은용(65, 신협 이사장, 운산가든 대표) 위원장을 만나러 가는 날은 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일요일 오전이었다. 가든 앞 정원에는 가을날씨 치고는 제법 더워서 마치 초여름을 방불케 함인지 여기저기 벌들이 집을 나와 꽃대위에 몸을 눕히고 연신 꿀을 채취하고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태연히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녀석들도 멘탈 강한 기자를 닮았나 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원 한켠에서 누군가 국화꽃 가지를 꺾고 있기에 먼저 인사를 건네니, 얼른 고개를 돌리며 “안녕하세요. 아름다우신 분이네요”라며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미소를 지어준다. 그 모습은 마치 국화의 꽃말처럼 고귀와 지조 그리고 진실함이 풍겨져 정말 서정주 시인의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분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저런 분과 사시는 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심히 궁금하여 작은 소정원을 돌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손님들이 없어서인지 넓고 깨끗한 한옥의 정갈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돌아서는데 저 끝에서 환한 미소로 기자를 부르는 표 위원장을 발견했다. 빠른 걸음을 움직여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친절했다. 언제 오셨는지 한 다발의 국화꽃을 가지고 와 꽃꽂이를 하고 있는 사모님을 건너다보는 눈빛이 어쩜 그리도 정스럽든지...

긴 대화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국화 향에 매료되어서인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가 이어졌다.

 

▲ 표은용 위원장 부부

 

# 부친의 교육관은 무엇이었나?

(표) “저는 운산에서 나서 지금껏 운산을 벗어나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운산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아요(웃음). 저의 어린 시절은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먹고 살기에는 그만그만한 집이었습니다. 우리 5남매는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생활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저희 아버님은 시골 사람 답지 않게 깨어있는 분이셨습니다. 늘 “봉사하면서 살되 그래도 남는 시간이 너에게 주어진다면 남을 보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라”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그 것은 어린 시절 저에겐 ‘사람이 살면서 여건이 되면 꼭 그렇게 살아야 되는가 보다’라는 믿음으로 굳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안타까운 게 하나 있어요. 바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이 머리에 남아있질 않고 다만 아픔들이 덩그러니 생각날 뿐이에요. 기자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불구잖아요. 그러니 어린 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였겠습니까. 제 나이 세 살, 발목의 작은 종기 하나가 번져 고관절 염증으로 이어졌고 결국 저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물론 의술이 발달된 시절도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건 아버지가 군대 계신 관계로 어머니 혼자서 저를 업고 먼 곳에 위치한 병원을 자주 방문할 엄두를 못 냈다는 거예요. 지금처럼 자동차가 있기를 했습니까. 무슨 수로 가겠어요. 그러다보니 답답한 마음에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침술원으로 데리고 다니곤 했습니다. 때로는 무당들을 집으로 불러 굿을 하곤 했지요. 그러다보니 병은 자꾸 악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5년, 세 살부터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저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늘 병마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행복하게 중학교를 꿈꾸고 있던 중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모님이 화분(花粉)차를 내어 왔고 표 위원장의 이야기는 그 틈을 타 잠시 멈춰졌다. 기자는 잘 먹겠단 인사를 하곤 달콤한 차를 한 모금 마시는데 온 몸의 기온이 따뜻하게 번져온다. 기자는 얼른 입고 온 초록색 스웨터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며 인터뷰이를 건너다보았다. 표 위원장도 어느새 화분차를 음미하며 사모님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의 기류가 앞에 놓인 화분차보다 달콤했다.

 

# 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서러운 것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집안사정 때문에 결국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대신 이종찬 선생이 운영하였던, 당시 3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글방으로 공부를 하러 다녔죠. 저에겐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 지요. 하지만 어린 마음에 ‘이것도 나에겐 사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을 배우고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 취직을 하기 위해 기웃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저에게 말했어요. ‘은용,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에게는 더 나은 내일이 있을거야. 그러니 절대 실망하지 말고 애써 열심히 노력하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남을 위한 봉사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겠니.’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더 열심히 주어진 일에 매달렸습니다. 공장에도 가야했고 기술도 연마해야 했으며 무슨 공부든 닥치는 대로 배워야 했습니다. 여건이 주어진 대로 정말 열심히 밤을 낮 삼아 살았지요. 뜻이 있는 곳에는 무조건 길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말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아버지의 말씀은 제 뇌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죠. 이것이 토대가 되어 외식업의 최고지도자과정까지 밟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와서 가만히 그때를 뒤돌아보면 스스로 막 흐뭇해요.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힘들었지만 잘 넘겼다고 자신에게 그냥 막 칭찬해 주고 싶은 거요(웃음).”

 

# 옛날 사진사들의 지위는 지금의 아이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는데?

(표) “저는 못 배운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정통으로 사진관을 운영하는 분을 만나 사진 찍는 법과 나름 사진관의 운영방법을 배우게 되었지요. 그 당시는 흑백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나마도 여건이 녹록치 않은 때라 사진사들의 지위가 대단했습니다. 거기다 마그네슘을 ‘팡’ 터뜨려 찍으면 아가씨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사진사들의 인기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았죠(웃음). 그동안 모은 돈으로 운산에서 자그맣게 사진관을 차렸어요. 당시의 운산 인구는 1만2천명 정도였으며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인구가 실로 많았습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어요. 사진기는 또 얼마나 비쌌습니까. 개인적으로 카메라를 소장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사진관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출장도 참 많이 다니곤 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 어느 날 우리 집사람을 우연히 만났어요. 지금 우리 식당위치가 그 당시에는 향나무가 숲을 이루었던 곳이에요. 많은 사진사들이 출사를 왔던 장소가 바로 여기였구요. 그날도 저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으로 출사를 왔더랬습니다. 그 시절 운산은 자가용 있는 집이 딱 한 대, 오토바이는 딱 세대가 전부였는데 그 중 한 대가 바로 제 오토바이였어요. 사진사에다 오토바이까지 있으니 딱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뭐겠어요(웃음).

아무튼 우리 집사람 얘기를 하다 말았죠?(웃음) 아가씨 몇 명이 향나무 숲으로 출사를 왔는데 그중 유독 한 아가씨가 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겁니다.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에게 눈길이 갔고, 급기야 오토바이 뒷자리에 그녀를 태우는 영광을 누렸지요. 당시 오토바이 뒷자리는 지금의 리무진보다 아가씨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니까요. 제가 태워주는 날이면 우리 집사람도 여느 아가씨들처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은 일이예요.”

그때 커피를 내다 주던 사모님께서 “솔직히 저는 오토바이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우리 남편의 자상하고 배려가 많은 모습에 더 마음이 끌렸답니다. 안 믿겨지시겠지만 (표 위원장은)지금도 그때 그 모습과 조금도 변함이 없어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요”라는 말에 기자는 입에 넣던 커피를 쏟을 뻔 했다. ‘어떻게 이 연세에도 여전히 서로를 끔찍하게 보듬으며,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지?’ 부러움 반 따뜻함 반으로 찬사를 보내자 기자 옆에서 가만히 웃으며 듣던 국화마저도 오글거리는가 한바탕 몸을 비튼다.

 

▲ 독거노인 바람막이 공사

 

# 이웃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표)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알고 ‘살려면 사진사 일이나 한번 배워보지 그래.’ 그말 한마디에 제 삶의 가장 소중한 엽지기를 얻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딸을 안았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도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어느 때인가부터 시대가 바뀌어가듯 사진관도 세월에 따라 서서히 사장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옆에 계신 지인이 ‘음식점을 하면 먹고는 살지 않겠어’라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이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하잖아요. 시대가 발전해가면서 핵가족화는 당연지사고 그러다보면 외식사업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운산가든이 벌써 26년째, 제 삶의 전환점은 바로 외식사업을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셨던 아버지는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늘 그분들과 함께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저도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지역을 위해 뭔가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좁혀져 갔어요. ‘고향에 살면서 봉사하고 아픈 이웃을 보살피며 그렇게 삶의 기틀을 마련하자’라고 생각하니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만든 단체가 운산면의 <라이온스>였지요. 그것을 필두로 체육회 이사, 주민자치위원회 등.... 봉사를 하면 받는 쪽보다 주는 쪽이 왜 그렇게 좋을까요. 저는 무엇보다 우리 주민들이 작은 손길 하나로도 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는 어떤 것들이 있나?

(표) “35인승 버스가 있다 보니 제 차로 직접 회원들과 함께 목욕봉사를 하는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32개 부락의 어르신들 등을 밀어 드릴 때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잠시 주저앉을 때도 있었어요. 돌아오는 길에는 따뜻한 식사도 대접해 드리고 말이죠. 걱정되는 건 많은 어르신들이 틀니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혹시라도 식사하시기에 불편은 없는지 사소한 것들도 자주 신경 쓰곤 합니다.

또 하나는 매년 연말에 떡국을 뽑아 각 부락마다 나눠 드리는 일입니다. 누구나 연말연시면 춥고 외롭지 않습니까. 이때 조금이나마 그분들에게 따뜻한 이웃의 손길을 나눠드리면 365일 모든 날들이 갑자기 포근해 질 것 같지 않으세요? 어찌 보면 1년을 보내면서도 ‘그래 너 잘 가라’라고 해도 기꺼이 웃으며 갈 것 같은(웃음).

또 기억나는 것은, 독거노인이나 옛날 가옥을 가지고 계신 어려운 분들의 집수리를 해 주었던 겁니다. 예전 집들은 창호지를 바른 문들이 많아요. 그런 집들은 겨울에 무척 춥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원들과 함께 보온차원에서 각목을 덧대어 바람막이 비닐을 쳐 드리곤 해요. 그렇게 해 드리면 너무들 좋아하시지요. ‘연탄 없어도 잘 지낼 수 있겠어’라며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여름엔 겨울에 쳐 드린 비닐이 또 무지 더워요. 그땐 잠시 찢어 놓았다가 겨울에 다시 보수용 바람막이 공사를 하고... 그렇게 한 것이 벌써 어언 15년째입니다. 이외에도 많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금까지도 목욕봉사네요.”

 

▲ 어르신 식사봉사

 

# 운산면 ‘농촌중심지활성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맡아 지역을 되살려야 할 숙제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표) “사람은 늘 무한한 세상을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기자님도 저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있지요. 그때 저는 참 좋은 이미지를 우리 운산에 남겨두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물물이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더 우리 지역에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구요.

얼마 전 우리 운산면에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진실하다 생각해서 추대해주지 않았나 나름 생각해 봅니다(웃음).

기자님은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 우리 운산면에는 5일장이 있었어요. 아주 유명했죠. 가까운 당진은 물론 예산과 홍성 등지에서도 찾아오는 집합의 장터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때는 요 너머 용장천에 물이 사시사철 흘러 피라미는 물론 장어도 잡고 했어요. 어쩌면 꿈같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참혹해요. 우리 기자님 여기 시장 한 바퀴 돌아보셨습니까?” 벌겋게 상기된 모습으로 말하는 표 이사장의 얼굴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지난봄에 잠시 다녀봤는데 거미줄이 쳐져있고 대부분 문이 닫힌 채로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자 크게 소리를 돋우며 말문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사람은 떠났고 옛날의 영화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의 눈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기에 가슴이 아팠다.

 

▲ 태풍피해 복구봉사

 

# 운산을 살릴 만한 방법들이 뭔가?

(표) “여러 가지 고민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현재 공사가 진행 중에 있구요.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용장천을 생태공원 조성사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물길을 모아 하천생태계 복원사업을 추진하며 더불어 잠수교처럼 물이 많을 때는 잠기는 한이 있더라도 교량을 설치했으면 어떨까 생각중입니다.

둘째, 금년 말에 완공될 용장천 옆 공원이 천과 연계되어 문화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하길 기원합니다. 그곳에는 수령 많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고고하게 서 있습니다. 노송을 중심으로 문화를 곁들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운산 주민들 외에도 외지의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거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셋째, 장옥(長屋)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선 인허가가 안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재건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사시는 분들을 먼저 보호해야 하고, 그 다음 추가분은 분양을 하여 시장을 활성화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서산시 차원에서도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청정한 지역의 운산을 참살이 공간으로 재탄생시켜야 합니다. 우리 운산은 서산목장과 가야산 그리고 문화재의 보고들이 내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을 새롭게 조명하여 자연친화적인 도시답게 웰빙공간으로 다시 재탄생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투스톱을 살려 발길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운산에는 수선화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유기방 가옥과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벚꽃의 몽환적 장소인 용비지가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 특유의 느낌을 살리는 일도 고려해 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복안들이 산재되어 머릿속에 들어 있습니다. 아무쪼록 더 멋진 구상을 하여 우리 운산면이 나날이 발전되어 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 글을 접하는 우리 서산시대 독자여러분께서도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십시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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