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송금영 충청지방통계청장

최미향 기자l승인2018.10.17l수정2018.10.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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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금영 충청지방통계청장

 

송금영 충청지방통계청장은 말한다. “과거 고을로 부임해오는 원님들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있다. ‘여기 사는 백성들은 과연 몇이나 되느냐? 뭘 해 먹고 사느냐?’ 지금으로 보면 바로 인구와 경제활동조사이다. 기본적인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올바른 정책수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통계청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들을 일선에서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하다 보니 보이지 않은 갈등이 있을 수 있다. 직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기반조성과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凡事留人情 後來好相見)> 즉,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두면 훗날 좋은 낯으로 만나게 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자 또한 인정스런 미소와 푸근한 말투 때문에 송 청장을 좋아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하회탈이라는 별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요즘 직원들과 다정한 미소와 정을 나누기 위해 밥을 먹고, 걷고, 대화를 하며 그들의 고충을 듣는다. 아픔을 말할 때는 함께 아파도 하고 기쁨을 이야기 할 때는 호탕하게 공감하기도 한다. 때론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때론 톡톡 터지는 알싸함으로 인정을 쌓는 일, 그것이 곧 신뢰를 구축하여 결국 업무로 이어져 정확한 통계생산을 낳게 할 것임을 그는 안다.

목을 축이며 이어진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서 시작하여 통계청장이 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이어졌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Q. 어릴 적 나는 어땠으며, 바둑은 상처 치유의 목적이었나?

(송)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 곳은 경남 거창이었지만 어릴 적 서울로 가서 말단직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만 다섯 군데를 전학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자꾸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갔지요. 설상가상으로 우리 아버진 남들에게는 굉장히 좋으신 분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만은 유독 강하고 엄했습니다. 어쩌다 친척들이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둬서 좋겠다’라고 하면 소심한 성격임에도 ‘한번 살아보세요’라고 했을까요. 초등학교 시절 시험을 치면 우등상을 자주 탔습니다. 다른 집 친구들은 당시 자장면을 사 줬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런 저에게 아버지 몰래 10원짜리 삼립빵을 사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만 우등상을 놓쳤어요. 그날은 영락없이 아버지에게 무지 많이 맞는 날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저를 가슴을 쓸어안으며 마음 아파했고, 저는 어느 가을 낙엽 떨어질 때처럼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왜 자존감이 떨어지는데 그렇게 마음이 아픈 줄 모르겠습니다(웃음). 초등학교 때는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가끔 행복했던 날 중에 하나는 어린 내가 동네 이발소 아저씨께 바둑을 배우던 일이었습니다. 이발소 아저씨와 둘이서 바둑을 두면 몸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기억나지 않아 좋았습니다. 주로 아저씨가 이겼지만 때론 모른 척 져 주던 때도 있었어요. 그런 날이면 세상을 다 안은 듯 행복했습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중학교 때는 바둑실력이 5급 수준까지 올랐어요.”

생각만으로도 기쁜 듯 앞에 놓인 물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입 꼬리를 천천히 올리더니 미소를 짓는다. 절대 치아를 드러내지 않은 살폿한 미소가 송 청장의 크나 큰 웃음이다.

 

Q.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송)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50대 중반, 당신이 뇌졸중으로 불편한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산에서 잠실까지 새벽마다 건물청소를 하러 집을 나섰으니 말입니다. 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책임감은 누구도 따라 올 수가 없었어요. 그것이 은연중에 배움으로 이어졌는지 저도 중학교 때부터 1시간이나 먼 거리를 단 한 번도 결석 없이 통학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느 날, 일어나 학교를 가야하는데 그만 제가 쓰러진 거예요. 연탄가스에 중독이 된 겁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한다는 마음에 겨우 몸을 일으켜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탔어요. 창문을 열고 차창 밖으로 날리는 바람에 얼굴을 묻으며 학교로 갔습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했지만 그래도 성실이란 정신력으로 갔나 봐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학교로 찾아오셨고, 저를 데리고 매점으로 가 먹을 것을 사주셨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제 모습을 보신 분들이 ‘친아버지 맞냐?’며 물으시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두려움과 어려움의 대상이었어요. 휘문고등학교 시절에도 중학교 못지않게 먼 거리를 통학하면서도 단 한번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집 옆에 사는 단아하고 예쁜 여고생의 도움도 한 몫 한 것이 아니었나 몰라요(웃음). 그 여학생과는 2년 동안 같은 지하철을 탔는데도 저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대화 한마디 없었어요. 그렇지만 힘든 와중에 의지가 되어 주었던 건 분명해요.”

혹시 그 여학생의 가방을 들어준다거나, 그 여학생에게 편지를 적어 전해준 적은 없냐는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그럴 정도의 숫기만 있으면 제가 지금 여기 앉아있겠습니까(웃음)”라며 활짝 펴진 미소를 지었다.

 

Q. “저질체력을 가졌다”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어떻게 마라톤을 하나?

(송) “키가 큰 반면에 상당히 저질 체력을 가진 저였습니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아는 어머니는 항상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부장적이며 무서웠던 아버지 밑에서 어쩌면 어머니를 제가 보호해야 될 것 같단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초등학교 시절, 1시간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버스비를 모아 어머니께 드리고 싶었거든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께 내밀면 어머니는 저를 꼭 안아주시며 따뜻한 미소로 토닥여 주셨습니다. 체력이 약한 제가 왕복 두 시간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아침마다 산행을 한 덕택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우리 아버지는 새벽 5시만 되면 저를 깨워 산에 데리고 다녔고, 내려오는 길에는 반드시 냉수마찰을 함께 했습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기란 죽기보다 싫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곧 제겐 법이었기에 군말 없이 따라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쩌면 2000년 인구총조사 홍보를 위해 처음 마라톤대회(7km)에 참가했던 것을 시작으로 풀코스(42.195km)까지도 완주할 수 있었던 것도 돌아보면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여전히 체력에 대한 한계도 있어요. 근력검사를 했는데 ‘4시간 이내로 뛰면 큰일 날 수도 있다’라고 했거든요. 저는 욕심을 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춘천마라톤 4회와 서울 동아마라톤 2회 풀코스 완주기록은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하기 이를 데 없어요.(웃음)”

 

▲ 지난 7월 2일 충청지방통계청장 취임식

 

Q. 아버지의 병마로 학업을 포기하고 통계청으로 입사했다는데 당시 얘기를 해 달라?

(송) “제 성향은 다분히 문과 쪽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계셨기에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과를 택하였고 산업공학과에 입학을 했죠. 당시 시대적 상황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마음 놓고 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안되겠다 싶어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했습니다. 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유난히 추운 겨울 어느 날 제대를 했어요. 복학을 준비하던 차,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시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저의 3월 복학은 수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어요. 먼저 등록금은 고사하고 집안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해 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통계직을 별도로 뽑는 시험이 있었는데 900여명 지원자에 25명을 뽑았던 시기였어요. 운 좋게도 필기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면접이 있던 날이었어요. 모두들 새로 맞춘 양복을 입고 면접 장소에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잠바를 입었어요. 새로 맞출 돈도 없었고 빌릴 수 있는 성격도 되지 못했습니다. 면접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와 ‘면접 보는 사람이 그렇게 입고 오면 되냐?’고 하더라구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면접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 말을 들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스럽던지...지금으로 보면 ‘참 자유롭구나. 꼭 양복을 입고 와야 되는 법은 없다’라고 생각할 텐데 말입니다.”

 

Q. 경제통계 전문가인 ‘송 박사’라는 별명이 있다던데?

(송) “산업공학과를 다녔기에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산업’자만 들어 간 산업통계과에 지원을 했습니다. 지원자가 많았는데 감사하게도 여기서도 운이 따랐던 것 같아요. 광업제조업 연간조사 담당을 맡았습니다. 그때 일을 잘 배웠던 것 같아요. 그 일을 빌미로 경제통계의 전문가가 되었고 ‘송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별명에 걸맞아야 되는데 자꾸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요. 안되겠다 싶어 통계청에 입사를 하고 이듬해 겨우 복학을 해서 경영학과로 전과를 했습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졸업이라는 것이 제겐 그리 큰 의미는 없어요. 배운 걸 그대로 일선에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저는 타고 난 것이 문과 성향인데 신기하게도 숫자에는 좀 밝았던 것 같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저는 한번 본 숫자는 정확하게 기억해 내요. 비밀인데 여기엔 저만의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보고서는 웬만하면 제가 직접 작성하거나 직원들이 가져오는 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제가 직접 작성을 한번 해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머리에 기억이 돼요.”

 

Q. 사랑과 결혼에 대해 말해 달라. 그리고 특이사항이 있다던데 그것이 뭔가?

(송) 기자가 미소를 머금은 그에게 “주로 숫자를 잘 기억하는 것은 여자 분들이 그렇던데... 특히 싸울 때보면 언제 몇 월 며칠까지 다 기억해서 맞대응하잖아요”라고 넌지시 말하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제가 좀 여성스런 감성입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참에 지금의 아내 분을 만난 사연에 대해 묻자 그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며 손을 비볐다.

“당시의 박봉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등록금을 내니 돈이 없어요. 어느 날 문득 삼성전자에 다니는 자그맣고 단아했던 그녀를 군대 동기에게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저희 처갓집은 미국에 있었고 아내도 영주권이 있었는데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저를 초청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어요, 저도 미국으로 들어 갈 준비를 위해 퇴직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가 3개월 만에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힘들고 외로워서 더는 미국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아무 일없다는 듯이 저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했고 동시에 청주에 있던 충북통계사무소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습니다. 돈이 어디 있어요. 그냥 아내 비상금과 부모님이 보태주신 100만 원을 합쳐서 단칸방을 얻어 생활을 했습니다. 달달 긁어모아 방을 얻으니 돈이 없었어요.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으로 입에 풀칠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여유가 생겼고 그곳에서 두 딸을 낳았습니다. 작지만 소소한 행복이 저희 부부 곁으로 몰려 왔지요. 면허증도 없었지만 승용차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당시 아이 둘을 유모차에 태워 여기저기 시내구경을 다녔고, 청주에는 우암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시내에서 걸어서 한 시간 이상 그 산을 넘어가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시설이 있었어요. 취학 전이었던 어린 두 딸은 놀이기구를 타겠다는 일념으로 저를 따라 힘든 산을 즐거운 마음으로 넘곤 했습니다. 작지만 큰 행복이었죠.”

참고로 “당시에 따지 못한 운전면허증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며 그것이 특이사항이라고 싱겁게 미소 지었다. 정말 드문 일이라 기자도 깜짝 놀랐다. “요즘은 그래도 주말에는 겁 많은 집사람이 저 대신 운전을 배워 여기저기 함께 다녀주기도 합니다.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Q. 현장조사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획기적 발상을 했다던데?

(송) “본청에 근무하면서 지방사무소로 출장을 가면, 그곳 직원들과 함께 잠을 자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며 서로의 애환을 들어 주곤 했어요. 그만큼 끈끈한 정이 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온라인 입력시스템 개발이 되지 않아 지방 사무소 팀장들이 매달 조사한 조사표를 직접 들고 본청으로 와 제출하면 본청 자료처리 부서에서 입력과 내용검토를 했어요. 그날 밤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술잔을 앞에 놓고 현장의 소리와 불응으로 힘들어하는 얘기들을 나누며 함께 울기도 웃기도 했습니다. 특히 대기업 조사가 힘들었는데 그것은 관계의 어려움이 아닌 조사품목의 가짓수가 많다 보니 자료 취합이 어려웠던 것이었어요. 일단 잠정으로 조사하고 확정치를 나중에 반영하다 보니 숫자가 많이 바꿔지기도 했습니다. 현장조사의 어려움을 다소나마 줄이고자 1997년 우리 팀에서 모뎀을 이용한 CASI(사업체 응답자가 조사내용을 직접 입력) 조사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선 굉장히 획기적인 발상이었죠. 이 아이디어 하나로 직원들뿐만 아니라 사업체에서도 응답에 드는 시간적 비용과 인력 낭비를 줄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통계법 위반이 표창장으로 이어진 황당한 사건은 뭔가?

(송) “IMF때문에 1998년 우리나라 경제가 바닥으로 꼬꾸라졌습니다. 당시 산업활동동향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과장님이 ‘우리가 기업의 원자재 수급상황, 자금난 등을 파악해서 관련 정책부처나 기업에 도움을 주자. 어차피 매달 광업제조업 사업체 대상으로 조사를 하고 있으니 원자재나 자금상황 조사표를 부가로 추가하여 조사하는 건 어떨까. 이것은 곧 어려운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파악하여 개선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제안했죠. 기업의 사정도 좋지 않은데 응답부담을 주게 되어 기존 조사에 대해서도 불응이 생길수도 있다며 지방청으로부터 반발이 있었지만 그동안 지방 직원들과의 좋은 관계 덕분에 매달 조사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을 집계하여 기재부 등 관련 부처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통계법 위반이 된 사건이었어요. 통계법에 따르면 어떤 항목을 바꾸거나 새로운 조사를 부가할 때면 반드시 통계청장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승인 없이 그냥 부가조사를 해버렸으니 당연히 통계법을 위반한 거죠. 나중에 감사원 종합감사를 받았을 때 ‘예산도 없이 그것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국가정책에 도움을 주기 위해 했다’ 하여 우리 과가 모범사례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보람과 자부심도 갖고 있지만 참으로 황당하기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 통계청 업무소개하는 송금영 청장

 

Q. 우리나라 통계청의 위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신을 가진 분들을 위해 한마디 해 달라?

(송) “우리나라 통계 수준이 실상은 상당히 높은 편이거든요. 제가 (통계청)처음 들어왔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주로 일본의 통계를 본떠서 하거나 일본으로 연수를 갔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서구 유럽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만큼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국민들의 인식이에요. 직원들이 열심히 찾아가 조사를 하면 허위로 응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내가 부실하게 응답을 했으니 통계도 분명 부실할 것이다’라는 인식이 있어요. 통계라는 것은 분명 기준이 있고 오차가 있습니다. 통계는 종합적인 현상과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실업률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제 딸 중 한 아이도 취업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취업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많은 분들은 ‘실업자가 아니냐?’ 하지만 이것은 비경제활동으로 실업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가를 인식할 때도 비슷해요. 많은 분들은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품목에만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제일 쌌을 때와 비교를 합니다. 하지만 물가통계에서는 만약 품목이 콩나물이라면 작년 10월 물가와 올해 10월 물가 등 특정 시점을 비교하죠. 수백 개 물가조사 품목에는 품목별 가중치가 있습니다. 저희 통계청에서 매월 발표하는 소비자물가는 가중치를 반영하여 종합적으로 봅니다.”

 

Q. 정확성 통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송) “통계청에서는 방문 면접을 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인 가구 및 맞벌이 가구의 증가, 사생활 노출 기피, 기업정보보호 강화 등 조사환경이 많이 어려워지고 있어 방문 면접조사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조사방법을 효율적으로 개선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대면 조사방법이었죠. 서로(조사자와 응답자)의 불편함을 줄여주는 것, 특히 현대인들의 환경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필요했던 사항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IT 기술을 활용한 전자조사의 확대와 정부기관 및 공공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행정자료를 이용하는 것이죠. 그리고 최근에는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모바일을 사용하는 획기적 조사방법까지 시행되고 있고요. 행정자료를 통해서는 무응답 또는 부실 자료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등 조사자료의 품질을 높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기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Q. 정책수립을 위한 통계, 시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송) “지역통계 활성화를 위해서 충청지방통계청에서는 매년 지자체에 수요조사를 하며 무엇이 필요한지 컨설팅도 해 드리고, 정책부서에 설문지를 돌려 통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통계가 필요한지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정된 인원으로 모든 지자체에 대해 다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저희(통계청)는 기술지원을 하고 통계 생산의 주체는 지자체에서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기획, 설계, 조사, 집계 및 분석, 보고서까지 다 써 줘야 하는 현실이에요. 저희로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통계를 개발하여 지자체에 주더라도 (지자체)그곳 담당자들이 바뀌면 직원들 끼리 잘 연계가 안 된다는 거예요. 행정안전부나 관련 학자들은 ‘왜 통계청에서 그런 일을 하냐.’며 의아해 합니다. 사실 통계라는 것은 인력과 예산 그리고 시간이 많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지역 통계를 개발하고 분석하는 이유는 올바른 정책을 수립하는데 정확한 통계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서산 시민들의 질적 삶을 위해서라도 통계조사에 정확하게 응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미향 기자  vmfms08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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